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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75화 (76/151)

#75화

아무튼 마차는 메닝엔 공작저에 무사히 도착했다.

내심 납치 걱정에 긴장을 풀지 못하던 라모나는 마차가 공작저의 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내가 이 저택을 보면서 안도하는 날이 다 오다니.’

공작저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 생활에 적응해 버린 자신을 보며 라모나가 헛웃음을 삼켰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클레멘스와 유디트는 부재중이었다.

“할머님은?”

로베르트의 질문에 브리튼이 고개를 숙였다.

“선대 공작님과 부인께서는 헤센 백작저를 방문 중이십니다.”

그들이 헤센 백작저에 머무르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로베르트가 혀를 찼다.

“이모할머님 댁에? 쯧.”

그 의미를 파악한 라모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레헨트 일 때문에 많이 화가 나신 거죠?”

“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할머님은 그 정도로 약속을 어기실 분은 아니시니까요.”

샤프롱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머쓱해진 라모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는 브리튼에게 다시 물었다.

“그 밖에 별일은 없었나?”

“레이디께 레이디 슈타이덴의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알폰조가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초대장을 보낸 모양이었다.

라모나는 로베르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 봐야겠네요.”

로베르트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피곤하시겠지만 오후에는 드레스를 맞출 디자이너가 공작저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돌아오자마자 바로 드레스를 맞추라는 소리에 라모나가 눈을 깜빡였다.

‘하긴 시간을 계산해 보면 조금 늦은 감이 있지.’

아이젠부르크 자작가에서 지금 드레스를 맞추겠다 하면 단칼에 못한다는 대답이 떨어졌을 텐데, 공작가쯤 되니 어떻게든 일정을 맞춰 주는 모양이었다.

수긍한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혹시 몰라 도와줄 사람을 불러 두었습니다만, 불쾌하시다면 돌려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뭐 별일 있겠어? 대수롭지 않게 여긴 라모나가 그 일을 머릿속에서 흘려보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똑똑.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이제 좀 괜찮으세요? 많이 걱정했는데.”

활짝 웃는 로지나를 발견한 순간.

“……덕분에요.”

라모나는 험악한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 * *

덜덜덜.

한 남자의 손이 쉴 새 없이 떨렸다.

힐끔, 남자의 손을 살핀 벤이 물었다.

“괜찮아요?”

“젠장. 그 빌어먹을 년.”

남자는 대답 대신 살벌한 눈빛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메닝엔 공작에게서 레헨트를 선물 받은 약혼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빈민가를 격리하는 것이었다.

전염병이 돈다나 뭐라나.

“그래 봤자 남들 다 겪는 정도였는데, 하여간 계집들은 겁만 많아서.”

라모나를 욕하는 남자의 말에 벤이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가 겁 많은 사람은 아닌데.’

보아하니 빈민가가 격리되면서 각성제를 만드는 이들과 물건을 주고받을 수 없게 된 듯했다.

재료도 들어가지 못하고, 만들어진 각성제도 내보내지 못하고.

덕분에 각성제를 즐기던 이 남자를 비롯한 사람들이 금단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찌어찌 수도까지 올라오기는 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납치는커녕 제 몸 건사하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벤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슬쩍 물었다.

“어제는 악몽 꾸는 것 같던데요.”

“뭐? 악몽? 누가?”

“아저씨요. 자다가 막 소리 지르던데. 뭔 일이라도 난 줄 알고 기겁했다니까요.”

“이게 진짜, 아저씨 아니라니까!”

평소라면 넘어갔을 별것 아닌 농담에도 남자는 주먹을 휘둘렀다.

깜짝 놀란 벤이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으억!”

남자의 발길질이 조금 더 빨랐다.

정강이가 찌릿하는 고통에 벤이 이를 악물었다.

‘이 새X. 아주 제대로 맛이 갔네.’

기분이 좋아지는 약이라더니, 약을 먹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만큼 안 먹을 때면 사람이 포악해지는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린 벤이 얼른 자리를 떴다.

‘아무리 봐도 이 일은 너무 위험한데…….’

분위기가 영 이상한 것은 각성제 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를 납치할 것이라며 자신을 포섭했건만,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벤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천천히 일하는 것뿐인가……?’

고개를 갸웃한 벤이 다시 남자를 훔쳐보았다.

눈 밑이 퀭해진 채 혼자 끊임없이 욕설을 중얼거리는 남자의 모습은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 * *

‘기가 막혀.’

라모나는 헛웃음을 쳤다.

드레스를 맞추러 온다는 디자이너는 마담 루였다.

몸에 딱 붙는 관능적인 디자인과, 진한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하기로 유명한 마담 루는.

‘레이디 클라이스트가 좋아하는 디자이너잖아.’

라모나의 얼굴이 또다시 험악해졌다.

‘그러니까 디자이너도 레이디 클라이스트에게 소개받고, 드레스 맞추는 걸 도와줄 사람도 레이디 클라이스트라는 소리네?’

이 새X 진짜 미친 거 아냐? 분노한 라모나의 주먹이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원래 맞추던 디자이너를 찾아가겠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미카엘라의 주문을 받는 디자이너가 옷을 멀쩡하게 완성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라모나는 한숨을 삼키며 이 불쾌한 상황을 받아들였다.

“일단 원단부터 좀 보고 싶은데.”

심상찮은 분위기에 눈만 굴리고 있던 마담 루는 얼른 그녀에게 샘플 북을 내밀었다.

“레이디께 어울릴 만한 원단을 미리 빼 두었는데 그것부터 보시는 건 어떠세요?”

“그럼 그것부터.”

로지나는 말없이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찻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라모나는 애써 그런 로지나를 모른 척하며 샘플 북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빨리 해치우고 돌려보내야지.’

그리고 가만두지 않겠다.

그녀는 굳게 다짐하고 드레스를 맞추는 데 집중했다. 원단을 고르고, 또 드레스에 덧댈 레이스를 고르는 동안 로지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라모나가 드레스 디자인을 보며 가슴이 너무 파인 게 아닌가 고민에 빠지자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마담 루.”

“예?”

“레이디께 이런 진부한 디자인만 보여 드리면 어떡해. 마담 루를 추천한 내 면이 뭐가 되라고.”

저건 또 뭔 소리야?

라모나가 싸늘한 얼굴로 로지나를 바라보았다.

우물쭈물하던 마담 루는 이내 조심스레 다른 디자인 북을 하나 꺼내 들었다.

“으음, 이쪽도 한번 보시겠어요? 레이디?”

라모나가 말없이 표지를 넘기자 마담 루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레이디의 우아하고 고전적인 분위기와는 조금 많이 다른 느낌의 디자인들이라 제가 보여 드리지 않은 거예요. 이건 제가 실제로 만들 용도로 해 둔 스케치는 아니라서요. 절대 오해는 하지 마셔요. 네?”

이내 디자인 북을 확인한 라모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걸 어떻게 입어?’

회귀하는 사이에 사교계의 트렌드가 바뀌기라도 한 걸까?

온통 피부색으로 가득한 디자인 북을 확인한 라모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로지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한 디자인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 이건 참고로 제가 고른 거예요.”

네크라인을 어디까지 파야 안 흘러내릴 수 있는지 실험해 본 것 같은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어, 어깨는 왜 또 드러나 있어?’

도대체 이 드레스의 상, 하의는 어떻게 이어져 있는 걸까?

당황한 라모나의 눈이 지진이라도 단 것처럼 흔들렸다.

이내 불쾌함이 욱 하고 치밀어 올랐다.

드레스가 파인 것 같다고 고민하는 자신에게 이런 걸 보여 주라 하다니.

탁.

디자인 북을 덮은 라모나가 로지나를 바라보았다.

“레이디 클라이스트.”

“예. 말씀하세요.”

“의도가 뭐죠?”

“어머, 오해하신 모양이네요.”

로지나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냥 각하가 좋아하실 만한 걸 추천해 드린 것뿐이에요. 저야 워낙 오랫동안 각하를 곁에서 봤으니까요.”

마담 루는 이제 드레스고 뭐고 그냥 여기를 빨리 탈출하고 싶은 얼굴이 되었다.

라모나는 굳은 얼굴로 로지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상하네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혹시 제가 공작 각하의 드레스를 맞추는 중인가요?”

“오.”

라모나의 말에 로지나의 눈이 커졌다.

“이건 제가 실수했네요. 레이디의 말이 옳죠. 사실 각하의 취향 따위 알 바가 아니긴 해요. 내 눈에 예쁜 드레스가 최고죠.”

그녀가 라모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역시 전 그쪽이 참 마음에 드는데, 아직도 이름은 안 허락해 주실 거죠?”

무례한 로지나의 태도에 라모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로지나는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에요.”

그녀가 라모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라모나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함께 춤을 추다 맨살이 손가락에 닿는 것만으로도 남자들이 무슨 상상을 할 수 있는지, 아세요?”

“……그런 발언 불쾌하네요.”

“오해하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전 그냥 연인 사이에 시도해 볼 만한 자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에요.”

로지나가 한쪽 눈썹을 까딱하며 도발적인 시선으로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요? 그쪽도 눈 뜨고 자기 남자를 뺏기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마담 루는 이제 거의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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