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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74화 (75/151)

#74화

수도, 크레모라 백작저.

“베르나딘!”

양팔을 한껏 벌린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 아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베르나딘을 꽉 끌어안고는 중얼거렸다.

“세상에, 신이시여. 이게 얼마 만이니.”

“잘 지내셨습니까.”

“그럴 리 있겠니! 나야 네가 없으면 항상 외로운 것을. 너도 알다시피 폐하도…… 아냐, 됐다.”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 과장스레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매일 이런 말만 하는 것 같구나. 듣기 싫을 텐데.”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

베르나딘은 다정하게 그녀를 달랬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바네사가 이내 입을 열었다.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바네사! 너도 오느라 너무 고생 많았다. 어서 들어오렴. 어서.”

신이 난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 바네사를 향해 손짓했다.

말없이 빙긋 웃은 바네사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말은 못 했지만 내심 너희가 안 올라올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이번 사교 시즌을 나 홀로 다닐 생각을 하니, 세상에! 너무 끔찍하더구나.”

“황실의 일원으로서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베르나딘의 말에 크레모라 백작 부인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떠올랐다.

“그럼, 누가 뭐래도 너희는 완벽한 황실의 일원이지.”

이내 신이 나서 자식들을 데리고 앞장서던 백작 부인이 깜짝 놀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오늘 우리 저택에서 모임을 하기로 했는데. 얼른 취소해야겠네.”

“그 시가 모임 말입니까?”

베르나딘이 미간을 찌푸리자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 손을 내저었다.

“설마 이 어미에게 그 정도 낙도 앗아 갈 작정은 아니겠지? 얼굴도 비추지 않으면서?”

“몸에 좋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저택 안에 있는 게 더 몸에 안 좋겠지. 잔소리는 그만하면 됐다, 베르나딘. 어째 얼굴이 더 상한 것 같구나.”

“상하기는요, 뤼스톡에서 매일 먹고 늘어져라 잠만 잔 탓에 오히려 불어났습니다.”

베르나딘의 말에 크레모라 백작 부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야. 내 눈에는 아주 홀쭉해졌단다. 이만 들어가 쉬렴, 오늘은 자고 갈 거지?”

“예, 입궁은 천천히 하려 합니다.”

“그래도 내일은 입궁해야지. 폐하께서도 그걸 바라실 거다.”

백작 부인의 말에 베르나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베르나딘은 짐을 풀어야겠다며 자신의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흐뭇한 미소로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크레모라 백작 부인은 베르나딘이 사라지고 나서야 살짝 뒤를 돌았다.

바네사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일은 네 말대로 했다, 바네사. 설마 별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바네사는 전과 다르지 않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어요.”

“그래도 나는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너무 걱정되어서…….”

바네사는 안색이 어두워진 백작 부인의 손을 붙잡으며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다 오라버니께 힘이 되는 일이에요, 어머니.”

다 잘 될 거니까요.

바네사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크레모라 백작 부인의 손을 꼭 붙잡았다.

* * *

다그닥 다그닥.

레헨트에서 수도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불편해…….’

라모나는 처음으로 로베르트가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로베르트가 왜 화가 난 건지. 아직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화낼 일 아닌가.’

물론 그녀도 숨기는 게 있으니 할 말은 없었다.

“하아.”

라모나가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로베르트는 여전히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이 오늘따라 고집스러워 보였다.

‘말을 한번 걸어 볼까?’

고민에 빠진 라모나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참 잘생기기는 했다.

레이디 오셀튼이 2시간 동안 로베르트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게 이해가 가는 미모였다.

시원하게 뻗은 이마와 날렵한 코, 라모나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굵은 목선.

‘정말 내가 시간을 거슬러오지만 않았다면 속절없이 휘둘렸을 텐데.’

이걸 아쉬워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라모나는 씁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던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얼굴이 따가울 지경입니다.”

“……예?”

“워낙 열렬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고 계시기에.”

머쓱해진 라모나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그것만 죄송합니까?”

로베르트의 되물음에 라모나는 입을 다물었다.

로베르트는 창밖을 향하던 시선을 돌려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턱을 괴고 고개를 약간 기울인 그가 물었다.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말씀하세요.”

“왜 그렇게 본인을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놓습니까?”

“예?”

“날 이용할 거면 마음껏 이용해 봐라, 하는 각오인 것 같은데. 왜 항상 당신의 신변은 뒷전인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그의 말에 라모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 비슷한 이야기를 예전에도 했던 것 같다.

뭐라 딱히 대답할 말이 없던 라모나가 침묵을 유지하자, 로베르트는 그녀를 타이르듯 말했다.

“제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합니까. 벤트하임의 치부? 그걸 알아내는 대가로 당신의 팔이나 다리가 없어져도 괜찮다고 하면 어떡하려고?”

“그러지 않으실 거잖아요.”

라모나의 대답에 로베르트가 헛웃음을 쳤다.

“언제부터 저를 그렇게나 신뢰하신 건지.”

“정말이에요, 각하가 진짜 그러지 않을 분이시라서 그런 거예요.”

“아니면 다 알고 그러는 겁니까?”

뭘?

당황한 라모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예?”

“후우, 됐습니다. 사교 시즌이나 잘해 봅시다.”

로베르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땅까지 선물한 세기의 연인을 보여 줘야 할 테니까요.”

어쩐지 등 뒤가 오싹해지는 말이었다.

* * *

벤트하임 공작저. 벤트하임 공작 부인은 정원을 둘러보다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정원 꼴이 이게 뭐람, 한 10년은 뒤처진 졸부의 취향 같군.”

화들짝 놀란 정원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싹 엎어 버려. 곧 사교 시즌이 시작인데 이런 정원을 손님들에게 보여 줄 수는 없지.”

로베르트가 라모나에게 레헨트령을 선물했다는 소식이 들린 그날부터 벤트하임 공작 부인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질수록 힘들어지는 사람은 벤트하임 공작저의 사용인들, 그리고 미카엘라였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미카엘라의 드레스를 점검하겠다며 하녀들을 다그친 공작 부인은 드레스를 확인하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드레스는 나쁘지 않다만 네게는 어울리지 않는구나. 시간이 아직 여유 있으니 아예 새로 하나 맞추는 게 낫겠어.”

“그것도 괜찮겠네요.”

미카엘라는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원단부터 비즈의 색상까지. 하나같이 벤트하임 공작 부인의 입김이 닿은 드레스였다.

무조건 이렇게 가야 한다며 윽박지를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어울리지 않는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머니와 굳이 갈등을 빚고 싶지는 않았던 미카엘라가 슬쩍 요하네스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아! 황태자 전하의 의복 색을 물어보고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어머니.”

황태자라는 단어에 공작 부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쓸 만한 생각이구나. 이 기회에 벤트하임의 이름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멍청한 놈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도록 하자구나.”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신데렐라니 뭐니 떠들어 대는 꼴들이 아주 경박하기 짝이 없어.”

공작 부인이 또 라모나의 이야기를 입에 담자 미카엘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격지심을 견디지 못한 미카엘라가 입을 열었다.

“그래 봤자 메닝엔 공작의 변덕일 뿐인데, 들떠 있을 라모나가 안쓰럽죠.”

라모나를 비난하는 미카엘라의 말에 벤트하임 공작 부인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이 그런 평가를 받던 시절이 떠오른 탓이었다.

이내 그녀는 불쾌함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미카엘라.”

“예, 어머니.”

“지난번처럼 멍청하게 굴지 말고 똑바로 행동하렴. 가문의 이름에, 그리고 이 어미의 이름에 먹칠하는 건 절대 용서 못 한다.”

“……명심할게요.”

“똑똑히 기억해.”

꽈악.

벤트하임 공작 부인이 미카엘라의 팔을 꽉 붙들었다.

“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나서 주었는데도 황태자비가 되지 못한다면…….”

그녀가 이를 악문 채 속삭였다.

“그건 사람도 못 되는 머저리잖니? 그렇지?”

움찔.

미카엘라의 가녀린 어깨가 떨렸다. 그 순간 요하네스의 의미심장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레헨트.

‘그거면……. 요하네스 전하의 신임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라모나 따위 없어도 충분해. 미카엘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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