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Chapter 10. 말하는 대로
“보이는군요.”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진실의 순간, 그는 찰나의 고민 끝에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이게 맞다.
사실 진작 이랬어야 하는 일이다.
“예.”
로베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라모나가 자신을 질책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로베르트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세상에, 신이시여.”
새하얗게 질린 라모나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실 안을 서성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금방이라도 다시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에 로베르트는 일어나 라모나에게 다가갔다.
그때,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건…… 안 돼.”
라모나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로베르트가 멈칫,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치 봐서는 안 되는 광경을 훔쳐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 기분이었다.
마법이 깨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이쯤 되면 이런 불쾌한 기분이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라모나는 로베르트에게 조심스레 되물었다.
“로베르트, 그럼 당신도…….?”
당신‘도’라니.
로베르트는 라모나의 질문에 담긴 숨은 의미를 곧장 파악했다.
“혹시 저 같은 사람이 또 있습니까?”
그의 질문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라모나는 이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라모나의 대답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 사람의 존재는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저에게 먼저 접근했어요. 뭔가를 알고 있다는 여지를 남기더라고요.”
“……!”
로베르트는 확신했다.
2황자 알폰조, 그 자식이다.
그제야 로베르트는 라모나가 왜 쓰러졌는지를 이해했다.
‘젠장.’
분명 알폰조가 그녀를 협박한 것이리라.
한층 심각해진 그가 라모나에게 질문했다.
“그럼 그 사람이 하는 말도 당신에게 이루어집니까?”
그의 질문에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푸른빛 말입니다.”
라모나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잠시만요, 로베르트. 다시 말해 줄래요?”
“그 사람도 당신에 대해 말하면 푸른빛이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아니요, 그 말 말고요. 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이 이루어진다니요?”
그제야 로베르트는 라모나와 자신이 하는 말이 묘하게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입을 틀어막은 라모나가 그에게 다시 물었다.
“당신이 하는 말이 이루어져요?”
“아니, 라모나. 잠시만 그게 아니고…….”
“당신이 나한테 하는 말이?”
“그,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한 로베르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순식간에 수많은 질문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게 뭐지? 그 얘기를 하던 게 아니었나? 그럼 알폰조는 뭐야? 이거 잡아뗄 수 있기는 한가?
‘아니, 잡아뗄 수 있기는 한가, 가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떼야지.
겨우 정신을 차린 로베르트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라모나, 이러지 말고 우리 차분히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그 순간 그의 손목에서 푸른빛이 마구 샘솟았다.
동시에.
“꺅!”
발을 헛디딘 라모나가 소파 위에 넘어지듯 주저앉았다.
‘아니, 이렇게까지 대놓고 일어난 적은 없었잖아!’
로베르트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얼떨결에 소파에 앉게 된 라모나는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맞아, 그때도 이랬잖아……? 기린…… 발 걸어서…….”
아 젠장, 이렇게 대놓고 일어난 적이 있었군.
‘빌어먹을.’
당혹감에 빠진 로베르트가 연신 머리를 쓸어 넘겼다.
“라, 라모나, 일단 지금 너무 피곤해 보이는데 레몬주라도 한잔하고 잠자리에 드는 건 어떻습니까?”
로베르트는 이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푸른빛이 또다시 폭주했다.
동시에, 똑똑.
“각하, 아직 주무시지 않는 것 같기에 레몬주를 가져왔습니다.”
잔뜩 신난 목소리의 이본느가 문을 두드렸다.
경악한 라모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더 이상 변명의 여지도 없다.
최악의 타이밍, 최악의 방법으로 들켜버린 비밀.
‘망했군.’
로베르트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 *
잠시 후, 라모나는 묵묵히 레몬주를 들이켰다.
맡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일 만큼 새콤한 향이 로베르트의 침실을 가득 채웠다.
‘이 와중에도 맛은 있네.’
그 사실이 어이없었던 라모나가 헛웃음을 쳤다.
로베르트에게도 푸른빛이 보인다는 걸 깨달은 순간, 심장이 멎어 버리는 줄 알았다.
그도 회귀자라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레헨트의 일도, 그녀가 요하네스의 정부가 되었던 것도.
로베르트가 다 알고 있었다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는 건 다행이긴 한데…….’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니. 이건 또 예상 못 했던 문제다.
‘인생 진짜 알 수가 없네.’
이쯤 되면 지난 생에 지은 죄의 값을 치르는 중인 게 아닐까. 라모나가 다시 한번 레몬주를 홀짝였다.
로베르트는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지만.
“저…… 라모나?”
“비밀이라는 게 이거였구나……. 그랬구나…….”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허망한 라모나의 혼잣말에 다시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상황이 말이 되나?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재앙의 주둥이, 재앙의 주둥이라고 말하긴 했는데 로베르트의 주둥이가 정말 재앙을 불러올 줄이야.
저 입에서 쏟아진 말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니.
‘신이시여, 어떻게 제게 이런 시련을……?’
라모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뺨을 힘껏 꼬집어 보았다.
“윽!”
역시 아픈 걸 보니 꿈이 아니었다.
그래, 따지고 보면 사람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
‘그거보단 차라리 이게 말이 되네. 골치가 아파서 그렇지.’
그래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계약서에 하루에 세 마디만 하기를 넣었을 텐데!
‘내가 왜 술을 그만큼이나 마셔서!’
또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이고 분노와 체념을 반복하고 나서야 라모나는 이성을 되찾았다.
“……언제부터였나요.”
“예?”
“푸른빛이 떠오른 거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당신이 저를 찾아온 그 날부터인 것 같습니다.”
“그럼 푸른빛이 당신의 말을 이뤄 준다는 사실은 언제 알게 된 거예요?”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 진짜 미치겠네.”
라모나가 머리를 움켜쥐자 로베르트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라모나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런 능력이 로베르트 메닝엔에게 생겼기에 망정이지, 만약 요하네스에게 생겼다면…….
그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으니까.
‘어쩐지 자꾸 건강이 최고라느니 그런 말을 하더라니, 이런 이유였구나.’
그녀가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일단…… 감사해요.”
“뭐가 말입니까.”
“적어도 그 능력으로 저를 휘두를 생각은 안 하셨잖아요. 제가 의심스러우셨을 텐데도 말이에요.”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글쎄요, 권력자에게 당연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요. 저는 제법 좋은 패잖아요.”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다시 다물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당황한 라모나가 얼른 입을 열었다.
“아무튼, 잘하면 이걸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무슨 뜻입니까.”
“음, 예를 들어서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벤트하임의 치부를 알아낸다.’ 이런 말을 해 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이내 그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라모나.”
“……예?”
“이 일은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당신을 속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당신을 그렇게 이용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로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차라리 제게 화를 내십시오. 계약을 수정하자고 제안하시던가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로베르트의 말에 놀란 라모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깨문 로베르트가 짓이기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당신이 무슨 물건이라도 된 것처럼 이용 가치를 자꾸 논하지 말고.”
젠장, 로베르트가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자리를 떴다.
“로베르트!”
당황한 라모나가 황급히 그를 쫓아 나가려 했지만, 로베르트의 발걸음이 워낙 빨랐다.
“……화 난 건가?”
대체 왜?
라모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왜 꼭 자신이 그에게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일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