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레헨트, 바이스카스텔.
잘 준비를 마친 라모나가 침대에 누워 눈을 깜빡였다.
‘도무지 잠이 안 오네.’
내일이면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심란했다.
‘지금쯤 또 레헨트 소식으로 난리가 났겠지.’
그녀를 놓고 사람들이 얼마나 떠들어 대고 있을지. 안 봐도 뻔했다.
라모나의 잠을 방해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또 요하네스의 꿈을 꿀까 두려웠다.
그에게서 벗어나겠다 마음먹었으면서 고작 꿈이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하다니.
‘……한심하네.’
주르륵.
긴 머리카락이 힘없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한번 떠오른 부정적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생각을 불러왔다.
<요하네스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면 나를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알폰조의 말을 떠올린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가능성을 두고 생각해 보았을 때는, 로베르트와 그녀의 대화가 새어 나갔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했다.
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그게 아닐 것이라 속삭였다.
‘그게 아니라면…….’
또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리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아, 일단 자자. 라모나, 이런다고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어.”
그래, 일단 자자. 일단 2황자 전하를 만나봐야 일이 확실해지지.
그녀는 몸을 뒤척이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러나.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한 마리 한 마리 세던 양이 어느덧 목장을 하나 꾸리기에도 거뜬할 만한 숫자가 되었을 때,
‘양 244마리, 양 245…… 도저히 안 되겠다.’
벌떡.
결국 라모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후.”
뜨거운 물로 목욕을 마친 로베르트가 가운을 입은 채 소파에 걸터앉았다.
시원스레 내놓은 목선을 따라 내려가면, 벌어진 가운 틈새로 탄탄한 대흉근이 언뜻 비쳤다.
거울을 살핀 그는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턱을 만지작거렸다.
“뭐, 이 정도면 제법 훌륭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폰조는 너무 과했다.
그래, 과하고말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 로베르트가 잠자리에 들기 전 내일의 일정을 미리 점검해 보았다.
짧은 휴가는 이제 끝, 내일이면 다시 일상이 시작된다.
‘레헨트를 선물하겠다 소문은 다 내 놨고…….’
남은 건 절차.
차라리 결혼을 했다면 절차가 더 수월할 텐데, 아직 약혼 중이라 일이 좀 복잡해질 듯했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또다시 지난밤의 일이 눈앞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로베르트는 한숨을 삼켰다.
‘위험했지.’
가지 말라며 양 뺨을 붉힌 채 그의 손을 꼭 붙잡던 라모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그는 자신의 이성이 이대로 끊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이라도 라모나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얹고…….
‘그만, 그만. 안 돼. 그만.’
점점 상상의 수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그는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당장 해결해야 할 레헨트의 문제라든가, 수도로 돌아가면 마주할 클레멘스와의 문제라든가 등등.
최대한 골치 아픈 문제를 열심히 떠올리고 나서야 그는 침착하게 중얼거릴 수 있었다.
“차근차근 해결하면 되니, 뭐. 문제 될 건 없지.”
그가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직 머리에 남은 물기 덕에 손가락 끝이 촉촉했다.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그거였다.
푸른빛.
생각에 빠져 있던 로베르트는 물끄러미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너무 건강하다.”
역시 건강이 최고였으니까.
“제국에서 가장 건강하다.”
그가 신전을 찾은 사람처럼 엄숙한 목소리로 자신의 손목을 향해 라모나의 건강을 기원하던 그때였다.
똑똑.
불청객의 노크에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본느?”
그러나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이본느의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 좀 괜찮으세요?”
“라모나?”
이 시간에?
그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을 끝내기도 전 그의 입이 반사적으로 열렸다.
“들어오시죠.”
아차, 가운.
눈이 휘둥그레진 로베르트가 다급히 외쳤다.
“조금! 조금 있다가!”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옷을 갈아입기 위해 가운을 벗어 던진 그가 황급히 대답했다.
“지금 벗고 있습니다.”
맞기는 한데 많이 잘못된 대답이었다.
“네? 뭐라고요?”
기겁한 라모나의 되물음에 로베르트는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니 다 벗고 있는 게 아니라 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문밖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라모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에 비수처럼 꽂혔다.
“진짜 변태인가 봐…….”
아닌데. 진짜 그런 거 아닌데.
오랜만에 로베르트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잠시 후, 간신히 옷을 찾아 갈아입은 그가 문을 열자 떨떠름한 표정의 라모나가 말했다.
“저……. 그냥 자러 갈게요.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해요.”
“아니, 아닙니다. 라모나.”
로베르트가 애써 미소 지었다.
“말실수일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네요.”
라모나는 대답과는 달리 안 다행스러운 얼굴로 로베르트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잘 챙겨 입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조심스레 로베르트의 침실에 발을 내디뎠다.
소란 때문인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로베르트는 열심히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그의 질문에 라모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별일은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서요.”
“레헨트 말입니까?”
“네. 사실 그걸 제가 받아도 되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아요.”
라모나의 하소연에 로베르트가 장난스레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간 고생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시죠.”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지기는 하네요.”
라모나는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
이내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잠이 안 와서요.”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꿀꺽.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머뭇거리던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재워 드릴까요?”
“혹시 정말 미치셨나요?”
“그럴 리가.”
억울한 얼굴의 로베르트가 양손을 들어 보였다. 우스꽝스러운 그의 표정에 라모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덩달아 로베르트의 얼굴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는 라모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아마 돌아가서도 마음고생할 일이 많을 겁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레헨트로는 오히려 부족할 정도죠.”
말하다 보니 아차 싶었다.
푸른빛.
그래, 좋은 말만 해야지. 좋은 말.
그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뭐, 좋은 일만 있을 겁니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말입니다.”
그때 귀신같이 푸른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젠장.’
로베르트는 빠르게 자신의 말을 되돌아보았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산다는 말에 반응한 건지, 아니면 마음고생에 반응한 건지.
아니면 설마.
‘재워 준다……?’
순식간에 그의 가슴이 기대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한 침대에서, 그녀를 다독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아 절대 거기까지.
진짜 거기까지만 생각 중이었다. 정말이었다.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광대가 슬그머니 올라가기 시작하던 그때였다.
라모나가 갑자기 기겁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맙소사.”
“라모나?”
“또 나타났어.”
콩, 콩.
그녀가 소파에 이마를 박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 무슨 일이야. 깜짝 놀란 로베르트가 황급히 그녀의 머리를 붙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라모나가 울상이 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로베르트,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닌데요.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요.”
역시 그 빛이 마음고생이라는 말에 떠오른 걸까?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넘실거리는 빛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순간 라모나가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그가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토끼처럼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손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베르트……?”
무슨 일이지? 당황한 로베르트가 그녀에게 되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맙소사.”
라모나는 기함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당신도 보여요?”
“예?”
그녀가 가녀린 손목을 들어 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당신 눈에도…… 이게 보이냐고요?”
이럴 수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로베르트와 눈이 마주친 라모나는 확신했다.
“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