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다음 날 아침.
“말도 안 돼…….”
티아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라모나의 침실 창가를 서성였다.
이내 티아는 심각한 얼굴로 라모나에게 물었다.
“역시 술이 문제였을까요?”
“술은 없었잖아.”
“그러니까요. 바로 그게 문제였던 거죠. 앗! 아니면 혹시……?”
원인을 알아냈다는 듯 티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뒷마당이 아니라 침실에 준비했어야 하는 걸까요?”
“티아?”
“너무 오픈된 공간이라서?”
“티아아?”
“하지만 아가씨, 전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요. 축제, 밤, 불꽃! 로맨틱한 분위기! 어떻게 이 완벽한 환경을 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어요?”
후다닥. 라모나의 곁으로 달려온 티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짜 소문처럼 공작 각하는 고자 아닐까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담요를 달라거나,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거나…….
‘맙소사!’
그제야 라모나는 어젯밤의 로베르트가 갑자기 추위를 타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당황한 그녀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아, 고자가 아니라 베르나딘 황자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소문이었나? 아무튼 그럼 그거 아닐까요?”
“……그 소문 너랑 내가 냈거든.”
“헉, 맞다!”
맞기는 뭐가 맞니. 라모나는 식은 눈으로 티아를 바라보았다.
이내 티아는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잖아요. 사랑해서 아가씨와 약혼했으면서…… 어떻게 어젯밤 같은 완벽한 환경에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날 수 있어요?”
아니야, 티아. 아무래도 그, 뭔가가 일어날 뻔했던 것 같아.
입을 틀어막은 라모나가 애써 모른 체를 했다.
“으음…… 플라토닉인가?”
“그렇다기에는 외간 여자를 턱턱 만나고 다니잖아요. 전 정말 화가 나요!”
그제야 라모나는 티아도 로지나를 의식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피식 웃은 라모나가 이내 심각한 척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렇죠! 이거 완전 쓰레기 아니에요?”
분노한 티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모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쓰레기지.”
“쓰레기네!”
“쓰레기야.”
제국의 기둥 메닝엔 공작은 졸지에 쓰레기가 되었다.
아무튼 오늘 아침, 바이스카스텔에는 비밀리에 부쳐진 벤의 편지가 도착했다.
각성제를 만드는 무리가 라모나를 납치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상황을 예상했던 라모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역시 그 개자식이 확실해.’
그녀는 무리의 배후에 요하네스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다.
그녀는 지체 없이 자신의 계획을 가장 완벽하게 이뤄줄 수 있는 쓰레기, 아니 사람을 찾아갔다.
* * *
똑똑.
“라모나?”
가벼운 셔츠 차림의 로베르트가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오늘따라 셔츠 단추는 왜 저렇게 풀고 있는 거야? 민망하게…….’
흐트러진 옷 사이로 비치는 그의 탄탄한 가슴팍을 발견한 라모나는 슬그머니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경치가, 아니 날씨가 좋네요.”
“그렇군요. 경치가 아주 좋군요.”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라모나는 그제야 로베르트가 일부러 저런 차림으로 그녀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역시 진짜 변태는 달라도 다르구나.’
어젯밤의 그 아련한 남자는 어디로 간 걸까.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바로 로베르트의 가슴…….
‘어머, 뭐라는 거야.’
이 아니라, 지금 로베르트의 얼굴을 보면 휘말릴 것 같은 자신이었다.
왜지? 술도 안 마셨는데!
결국 라모나는 로베르트가 창문에 매달리기라도 한 듯 창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라모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로베르트의 얼굴이 굳었다.
납치라는 이야기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당분간은…… 저와 함께 다니는 게 좋겠습니다. 차라리 수도로 빨리 올라가는 것도 방법이겠군요.”
그 말은 라모나도 찬성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처리할 일이 있지.’
라모나가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네, 그리고 그 각성제 일 말인데요.”
“말씀하시죠.”
“전염병과 묶어서 처리하도록 하죠.”
“묶어서 말입니까?”
로베르트의 되물음에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빈민가를 격리하는 걸 제안해요.”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저 말씀해 주시죠.”
“아직 레헨트까지는 번지지 않았지만, 수도에는 전염병이 돌고 있어요. 그 핑계를 대면 빈민가를 격리하더라도 황제 폐하의 의심을 사지는 않을 거예요.”
“그 말은 맞습니다만, 격리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빈민가를 격리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크게 두 가지에요. 첫째, 수상한 이들의 출입을 막을 수 있고. 둘째, 각성제 반출을 통제할 수 있죠.”
미카엘라가 또 회귀 전과 같은 일을 벌이지 못하게 막으면서, 각성제를 만드는 것을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라모나는 이 방법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빈민가를 격리하면 저 남자가 욕을 먹을 테니까.’
그녀는 지난 생, 그가 죽은 후에도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로베르트의 이름이 오르내렸던 것을 기억했다.
‘이번에는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아.’
저 제 잘난 맛에 사는 남자의 이름에 오점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지금처럼 당당하고 고귀한 메닝엔 공작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건 무슨 욕심인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잠자코 라모나의 말을 듣던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괜찮은 방법입니다만…….”
쯧, 습관처럼 혀를 찬 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키지 않는군요.”
“이유가 있나요?”
로베르트가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턱을 괴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사실 저는 벤트하임 고자 놈들이 아이젠부르크의 영지를 몰수하겠다 나선 것의 해결책으로 레헨트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네?”
갑자기 영지 몰수 이야기가 나오자 당황한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레헨트를 당신에게 약혼 선물로 주려 했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면 자작의 사업도 흔들리지 않을 테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령 정말 영지가 몰수된다 하더라도 해결책이 생기니 말입니다. 하지만…….”
말을 흐린 그가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이미 당신을 납치하려고 노리는 놈들을 그런 식으로 더 자극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라모나는 순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농담으로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의외네요. 감히 메닝엔의 사람을 손대려는 놈들이라 가만두지 않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요.”
“물론 가만두지는 않을 겁니다. 절대 그런 짓을 못 하도록 미리 손을 썰어 버리는 것도 방법이겠죠.”
그러나 가벼운 농담으로 넘기기에는 로베르트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지극히 낮은 확률이라도 그들이 당신을 납치했을 때, 당신을 해코지할 마음을 먹을 일을 남기고 싶지 않은 겁니다.”
“…….”
라모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런 생각을 해 준 게 고마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뻤다.
하지만 고마워하기에는 지난 생의 죄책감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고, 기뻐하기에는 눈앞의 일들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적어도 격리는 내 명이라 할 수 있겠네.’
사교계의 악녀라는 호칭이 레헨트의 악녀로 바뀐다고 한들 큰 타격도 없다.
그거 하나는 확실히 다행이었다. 라모나는 한숨을 삼켰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라모나의 입에서 나온 것은 감정을 뚝뚝 떼어 낸 담백한 말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계획대로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라모나.”
“뭐, 제가 위험할 일이 있겠어요?”
라모나는 애써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당신이 저를 지켜줄 텐데요.”
그녀가 말하는 순간 로베르트의 눈이 커진 것도 같았다.
* * *
레헨트 빈민가의 허름한 집, 데미안의 은신처.
몸을 낮춘 채 주변을 두리번거린 한 남자가 재빨리 쪽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소년을 확보했습니다.”
수하의 말에 데미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전의 접촉자는?”
“감옥에서 처리했습니다. 소년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수도로.”
“넵.”
일이 순조롭다.
수하를 내보내고 은신처에 홀로 남은 데미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2황자도 모자라 레이디 클라이스트까지 나타날 줄이야.’
요하네스가 명령했던 것과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하지만 판단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주인의 몫이었다.
어쨌든 소년을 확보했고, 요하네스가 명령한 정보도 손에 넣었다.
각성제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효과를 발휘했다.
각성제를 먹은 사람은 기분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힘이 샘솟고, 3일간 잠을 자지 않아도 끄떡없었다.
하지만 요하네스는 약효가 떨어지면 분명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라 의심했다.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주기적으로 각성제를 복용한 빈민가의 사람들은 팔다리가 없어진 것 같다며 난동을 부리거나,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지곤 했다.
심지어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데미안의 입장에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주인이 원하는 결과를 빨리 얻을 수 있었으니까.
‘한 열댓 명쯤 더 죽었으면 좋았겠지만, 뭐 이만하면 됐군.’
그가 달력을 한번 바라보았다.
곧 사교 시즌이 시작될 때였다. 이제 슬슬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