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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70화 (71/151)

#70화

불꽃놀이가 시작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다.

할 일도 없고, 제법 출출해진 그들은 이본느와 티아가 준비한 피크닉 바구니를 사이좋게 열어보았다.

바구니를 열자마자 보인 것은 또 레몬이었다. 반으로 갈린 레몬을 보며 라모나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혹시 레헨트에서는 레몬도 과일처럼 먹나요?”

“설마요. 아마 꼬치에 뿌려 먹으라고 준비한 것 같습니다.”

로베르트는 음식을 펼쳐 놓더니 먹음직스러운 고기구이 위에 능숙하게 레몬즙을 뿌렸다.

라모나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런 그를 구경했다.

“이런 걸 자주 해 보셨나 봐요. 피크닉 같은 거요.”

“아버지가 좋아하셨거든요.”

부모님을 입에 담는 로베르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택 밖으로 나가면, 어머니는 좀 숨을 쉬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종종 저를 데리고 나들이를 가곤 했죠. 뭐, 그것도 어린 시절의 이야기입니다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라모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솨아아.

시원한 파도 소리가 어색한 침묵을 따스하게 녹여 주었다.

라모나는 다디단 음료수를 홀짝이며 말했다.

“좋네요.”

“뭐가 말입니까.”

“이제야 좀 레몬 축제를 즐기는 것 같아요. 아까는 그냥 해야 할 일을 하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가 피식, 작은 웃음을 흘렸다.

“아아, 그 불청객.”

그의 입에서 알폰조의 이야기가 나오자 라모나는 입을 다물었다.

괜히 입을 열었다 복잡한 속내를 고스란히 들키는 것보다는 침묵이 나았다.

로베르트는 레몬을 뿌린 꼬치를 라모나에게 내밀며 물었다.

“몸은 좀 괜찮은 겁니까?”

“예. 별문제 없어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픈 사람을 무리하게 돌아다니게 하면 안 됐는데.”

“각하가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우린 동지였잖아요. 아닌가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라모나가 그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이파이브 하자는 의미였는데, 로베르트는 덥석, 그 손을 잡았다.

놀란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손이…… 되게 크네.’

손이 시리다는 생각은 못 했는데, 따뜻한 로베르트의 손이 닿고 나서야 라모나는 자신의 손이 차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손을 빼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던 라모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면 숨을 쉬는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가요.”

로베르트는 묵묵히 캄캄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저를 두고 아이젠부르크의 신데렐라라고 말할 때면,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면서도 가슴이 조금 답답할 때가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에 빗대서 저를 바라보잖아요. 그 뒤에 얽힌 사연이나, 상황은 전혀 보지 않죠.”

라모나는 회귀 전의 삶을 떠올렸다.

친구의 남편을 빼앗아 간 정부, 벤트하임의 시녀.

그 프레임으로 바라본 라모나는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끔찍한 사람이었다.

요하네스의 감금이나 집착도 힘들었지만, 그 점이 라모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는 점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저도 모르게 라모나가 손을 움찔 떨자 로베르트의 손이 더 세게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럴 일도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술이 아니라고 했는데 왜 얼굴이 뜨겁지.’

뜨거워진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툭, 치면 금방이라도 뜨거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라모나는 애써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어두운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로베르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어머니 이야기는 대충 아실 테죠.”

그가 가족 이야기를 꺼내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그런 그녀를 보고 피식 웃은 로베르트가 마저 입을 열었다.

“뷔나우의 신데렐라.”

“왠지 동질감이 느껴지네요, 사람들은 저를 아이젠부르크의 신데렐라라 부르는데.”

“이런.”

로베르트가 그녀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이해는 갑니다. 아, 당신 말고 제 어머니요. 그녀는 백작과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새 뷔나우 백작 부인과 그 자녀들에게 무시당하는 딸이었으니까요.”

마리안느 뷔나우. 아니 마리안느 메닝엔.

7년 전 세상을 떠난 제 어머니의 이야기를 입에 담는 로베르트의 얼굴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제 아버지는 그런 가련한 미인에게 첫눈에 반했고요. 그걸 사랑이라 해야 할지…… 동정심이라 해야 할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말끝을 흐린 그가 작게 웃었다.

“할아버님은 제 어머니를 탐탁지 않아 했지만 결국 결혼을 허락했습니다. 뷔나우의 신데렐라는 그렇게 탄생했죠, 하지만…….”

로베르트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오래 묵은 위축과 애정 결핍은 고작 결혼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죠.”

“아…….”

상황을 짐작한 라모나가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매사에 눈물을 쏟는 마리안느와 그런 아내가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는 리안드로.

그 사이에서 불안에 시달리는 손주를 본 유디트는 결국 직접 나서 마리안느와 로베르트를 차단했다.

다행히 유디트의 양육 하에 로베르트는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뷔나우 백작 부인과 자녀들은 어머니의 불안을 끝없이 부추겼습니다. 그 자신들의 출세를 위해 어머니의 애정 결핍을 이용했죠.”

로베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황태자 요하네스의 사주를…….”

그때였다.

펑! 퍼벙!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몬 축제의 백미,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불꽃 소리에 귀가 다 먹먹해졌다.

라모나가 미간을 찌푸리고 로베르트를 향해 외쳤다.

“각하! 죄송하지만 못 들었어요!”

“……아.”

로베르트는 옅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흔들었다.

“별거 아닙니다.”

펑!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서 터지는 색색의 불꽃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어머!”

불꽃에 시선을 빼앗긴 라모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신이 난 그녀가 외쳤다.

“너무 예쁘네요!”

로베르트는 그런 라모나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라모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휘이이잉, 펑!

점점 더 높아지고 화려해지는 불꽃에 라모나의 얼굴이 활짝 폈다.

로베르트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런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잠시, 불꽃이 높게 치솟는 사이에 주변이 고요해지자 그가 입을 열었다.

“라모나.”

“예?”

“가족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비밀입니다.”

그의 말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그 순간 하늘 높이 치솟은 거대한 불꽃이 터졌다.

퍼벙! 펑!

색색의 불티가 그녀의 짙고 푸른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로베르트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 제가 혹시 당신에게 비밀을 가졌더라도…… 제가 너무 밉더라도 한 번쯤은 용서해 주시죠.”

“……로베르트?”

“치졸하게 부탁합니다.”

라모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바로 라모나가 로베르트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으니까.

불꽃놀이가 끝나고, 바다는 다시 어두워졌다.

고요한 바이스카스텔의 뒷마당에서 라모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나야말로 지금 당신을 속이고 있다고.

뱉어내지 못 할 말들이 그녀의 목 아래를 뜨겁게 달궜다.

라모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울 것 같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는 말없이 그런 그녀의 뺨을 쓸었다. 또다시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시큼한 레몬 냄새를 뚫고 익숙한 그의 향기가 났다.

라모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촉.

그의 입술은 오늘도 그녀의 입술이 아닌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건…… 저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로베르트의 낮은 목소리가 라모나의 귓가를 울렸다.

간지러워. 고개를 숙인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춥습니까?”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분명 지금 고개를 들면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들킬 게 분명했다.

라모나는 로베르트의 손을 꼭 붙들고 어찌하면 좋을까 고민에 빠졌다.

“밤이 늦었군요. 이만 들어갑시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로베르트가 자리를 뜨려 하자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놀란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라모나?”

꿀꺽.

침을 삼킨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자고요.”

로베르트는 말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곧 입을 틀어막고는 어색하게 라모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간질간질하고도 어색한 분위기에 라모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로베르트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담요 좀 줄 수 있습니까?”

“예?”

“……너무 추워서.”

추운 날씨는 아닌데?

고개를 갸웃한 라모나가 얼른 두르고 있던 숄을 벗어서 그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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