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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69화 (70/151)

#69화

* * *

달칵.

라모나가 무사히 깨어난 것을 확인한 로베르트는 조용히 그녀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젠장.’

그가 입술을 짓이겼다.

라모나의 눈에도 푸른빛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 했을까.

이런 상황은 곤란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가슴 속에 떠오른 감정은 곤란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새삼스레 자신이 숨긴 비밀의 무게가 더 크게 다가왔다.

제국 최고의 신랑감이라는 호칭도, 메닝엔 공작의 권력도. 하다못해 잘생긴 얼굴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숨을 삼킨 그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맞는 말이다.

라모나와 그는 분명 계약으로 얽힌 사이였다. 그녀가 1년 내로 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증거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들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될 것이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어쩌면 그녀를 처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이에서 비밀을 간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다는 말로는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없게 되었다.

라모나를 믿지 못해서 푸른빛에 대해 털어놓지 못했던 지난번과는 명확하게 다른 관점의 문제였다.

답답한 마음에 로베르트가 저도 모르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후. 꼴사납군 정말.”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자신이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된 걸까.

혀를 찬 그는 일단 당장 해야 하는 일을 떠올려 보았다.

‘빈민가를 정리하고…… 각성제에 대해서 정보를 좀 모으고……’

분명 요하네스는 꼬리를 잘 감췄을 것이다.

요하네스를 잡는 것보다 일단 각성제가 레헨트에 더 퍼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쪽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로베르트는 한숨을 삼켰다.

‘일단 그거면 되겠군.’

하지만 정말 그거면 되는 걸까.

멈칫한 그가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오랜만에 본질적인 질문에 도달했다.

자신이 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내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

동기는 확실했다.

메닝엔의 이름을 짓밟은 자들에 대한 복수. 그리고 명예 회복.

그렇다면 그 다음엔? 그 다음에는 무얼 하고 싶은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건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었다.

* * *

“걱정이에요, 정말.”

울상이 된 티아가 먼지를 탁탁 털며 이본느와 수다를 이어갔다.

“우리 아가씨가 자주 아프신 분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요즘 자꾸 아프신 걸 보니, 역시 마음이 힘드신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럴 수 있지.”

로베르트의 어머니, 마리안느를 떠올린 이본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레이디는 마음이 단단한 분이신 듯하구나.”

이본느의 말에 티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맞아요. 그래도 좀 아가씨를 힘이 나게 해 드리고 싶은데…… 뭐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티아의 말에 이본느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맞는 말이긴 한데 좀 서운했던 티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탁.

흐트러진 서류를 정리한 이본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각하께서 어련히 잘 하셔야 할 텐데.”

안 그래도 이곳 레헨트까지 2황자 알폰조와 라모나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들려오던 차였다.

직접 눈으로 보니 헛소문인 게 확실해졌지만, 그래도 또 축제까지 쫓아가는 알폰조를 보면 모를 일이었다.

“끄으응…….”

이본느는 오랜만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그건가.”

뭐지? 뭐지 뭐지? 솔깃한 티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 * *

똑똑.

“아가씨!”

“들어와, 티아.”

벌컥.

들뜬 얼굴의 티아는 이상하리만큼 경쾌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좀 괜찮으세요?”

“응, 그냥 잠깐 놀랐던 것뿐이야.”

“또 나무에 머리…… 막…… 그러고 싶으신 건 아니죠?”

“……응.”

티아의 말에 흑역사가 떠오른 라모나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도 푸른빛을 봤던 것 같은데.’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잘 안 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매일 터지는 사건에 라모나가 한숨을 삼켰다.

힐끔, 그런 라모나를 곁눈질로 살핀 티아가 물을 따르며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쉬워라. 세상에, 너무 아쉬워서 어쩌지.”

“응? 티아 무슨 일 있니?”

“어머! 제가 너무 아쉬운 바람에 생각을 말해 버렸네요!”

호들갑스레 발을 구른 티아는 물병을 얼른 내려놓고는 라모나에게 쪼르륵 달려왔다.

티아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레몬 축제의 묘미가 뭔지 아시나요?”

“거대 레몬?”

“물…… 론! 그것도 맞기는 하지만요. 딱 떠오르는 게 잊지 않으세요? 푸른 바다와 별이 쏟아지는 밤! 그리고!”

고민하던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레몬주?”

“……아가씨, 우리 술은 그만 마셔요.”

술 이야기에 티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그러긴 해야겠다. 머쓱했던 라모나가 어색하게 콧잔등을 문질렀다.

“그래서 레몬 축제의 묘미가 뭔데?”

기다렸던 라모나의 질문에 티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불꽃놀이요! 글쎄 바다에 배를 띄워서 불꽃놀이를 하는데, 여기 바이스카스텔의 뒷마당이 그렇게 명당이라네요.”

“어머, 그래?”

“네! 아가씨만 괜찮으시면 저희 구경 갈까요?”

구경 가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 티아의 목소리에 라모나는 웃음을 삼켰다.

“흐음, 글쎄…….”

라모나가 말끝을 흐리자 조바심이 난 티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구경거리인데, 그마저도 비가 오면 못 하는 거래요. 이렇게 날씨가 좋은 것도 다 불꽃놀이를 보라는 하늘의 뜻 아닐까요?”

“하늘의 뜻씩이나?”

결국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구경하면 좋겠다.”

불꽃놀이도 보고, 복잡한 머리도 정리하고, 그러면 될 것 같았다.

계획대로다. 티아가 음흉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라모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 * *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늦은 시각,

티아는 라모나의 어깨에 숄을 꼼꼼하게 둘러 주었다.

“혹시 춥거나 힘드시면 바로 들어가자고 말씀하셔야 해요.”

“그래.”

“제가 좋아한다고 괜찮은 척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알겠어.”

티아가 보고 싶어 하는 듯해서 보러 가자고 하긴 했지만, 막상 자정이 다가오니 라모나도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혹시 불꽃놀이도 레몬 모양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타당하지만 말도 안 되는 추론에 라모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잠시 뒤 도착한 바이스카스텔의 뒷마당, 잔디 위에는 두꺼운 모포가 깔려 있었다.

라모나가 불꽃놀이를 구경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피크닉이라도 하는 듯 꽂혀 있는 예쁜 파라솔, 그 아래 놓인 과일과 음식, 그리고 레몬주까지.

‘완벽하다.’

술을 마셔도 되려나 걱정이 되긴 했지만, 모포 위에 앉은 라모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레몬주를 한 잔 따랐다.

하지만.

“윽.”

‘왜 이렇게 달아?’

이거 술이 아니구나! 실망한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티아, 이거 음료…… 응? 티아?”

그러나 아까까지만 해도 신나게 재잘거리던 티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있었다.

“티아? 어딨어?”

파라솔에 가려 뒤가 잘 보이지 않았던 라모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티아? 거깄니?”

라모나가 빼꼼 파라솔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뒤를 살폈다.

그러나 발소리의 주인공은 티아가 아니었다.

“……라모나?”

로베르트 메닝엔이었다.

* * *

“세상에, 진짜 깜빡 속았다니까요. 티아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요.”

라모나의 하소연에 로베르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본느와 티아가 함께 벌인 일인 모양입니다. 제게는 이본느가 당신이 혼자 뒷마당에 앉아 있으니 얼른 나가 보라 했거든요.”

그제야 티아의 속셈을 알아차린 라모나가 허탈하게 웃었다.

“불꽃놀이가 보고 싶다더니 이런 일을 벌였을 줄이야……. 정말 너무 해…….”

힐끔, 그녀를 살핀 로베르트가 살며시 땅을 짚었다.

그가 라모나를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라모나.”

“……예?”

“저도 불꽃놀이가 보고 싶은데 당신이 좀 같이 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필 그때 바람이 불었다.

휘이잉.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까지 참 잘생긴 남자였다. 라모나는 멍하니 로베르트를 바라보다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각하는 자주 보셨잖아요.”

“아니요.”

“예?”

“한 번도 못 봤습니다. 불꽃놀이.”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짓말하지 마요.”

“왜 요즘 제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합니까. 할아버님이 이런 걸 안 좋아하셔서 정말 한 번도 못 봤습니다.”

로베르트가 씁쓸해하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라모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꼼지락.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음…… 죄송해요.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럼 같이 보고 갈까요?”

“사실 거짓말입니다.”

이게 진짜. 라모나의 얼굴이 험악해지자 로베르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당신과 보는 건 처음이니까요. 처음인 걸로 하죠.”

눈물점이 콕 박힌 그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저런 얼굴로 저런 말을 하는 건 반칙이지.’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양 뺨이 뜨뜻하게 달아오른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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