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 *
레몬 로베르트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마자 생긴 작은 소란 덕에 몰튼 남작은 자리를 떴다.
연신 허리를 굽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작에게 라모나는 괜찮다며 어서 가 보라고 등을 떠밀어 주었다.
남작이 떠나가고 알폰조와 로베르트 두 사람과 덩그러니 남겨진 그녀는 오늘 집을 나서고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어 보였다.
“축제 구경은 다 한 것 같네요.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는 게 어떨까요.”
드디어 집에 간다는 생각에 라모나의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 피어났다.
하지만.
“벌써?”
“아쉽지 않습니까?”
알폰조와 로베르트는 아직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이럴 수가. 라모나의 얼굴에 피어나던 웃음꽃이 급격하게 다시 시들었다.
“……다 본 것 같은데.”
라모나가 힘없이 중얼거렸지만 두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바다 풍경이 좋더군.”
“뭐, 바다야 항상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 그보다는 축제에 왔는데 길거리 음식이라도 먹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사랑?”
로베르트의 제안에 라모나의 귀가 팔랑거렸다.
“음, 그럼…….”
고민 끝에 그녀가 중재안을 냈다.
“먹을 걸 좀 사서 바다로 갈까요?”
알폰조가 왜 그들과 함께 축제를 구경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황자의 의견을 무시하기는 좀 그랬다.
라모나의 예상과는 달리 아직까지 알폰조는 수상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벤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어쩌면 2황자 전하가 아닐 수도 있어…….’
그렇다면 범인은 틀림없이 요하네스일 것이다.
그를 떠올린 라모나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느새 로지나가 사라졌다는 건 까맣게 잊은 채였다.
알폰조는 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윽.”
음식 앞에 늘어선 인파에 치이자 라모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살이 닿는 게 소름 끼치게 싫었다.
‘어쩌지.’
역시 그냥 돌아가자고 할 걸 그랬나. 라모나가 고민하는 사이 불편해하는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로베르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 안 좋은 건 아닙니까?”
“예, 그런 건 아닌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라모나는 망설였다.
피식 웃은 로베르트가 그녀의 머리를 쓱 쓰다듬었다.
평소와는 다른 스킨십에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이상한 노릇이었다.
이 남자의 손길만은 괜찮다니.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이 갑자기 스르르 녹는 기분에 라모나는 눈을 깜빡였다.
“레이디를 고생시키는 건 신사의 도리가 아니죠. 저기 벤치에서 기다리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작년에 보니 오징어 튀긴 것이 제법 괜찮던데 그걸로 사갈까요?”
“……꼬치도요.”
라모나의 대답에 로베르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그가 잔망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분부대로.”
로베르트에게 음식을 부탁한 라모나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해 빠져나갔다.
언제 왔는지 그녀의 곁에 선 알폰조가 레몬즙을 섞은 탄산수를 내밀었다.
“좀 먹게.”
“아, 감사합니다.”
순간 두 사람의 손이 스칠 뻔하자 알폰조가 황급히 손을 뒤로 뺐다.
“……전하?”
“벌레가 있어서.”
벌레? 2황자가 벌레를 무서워했나? 고개를 갸웃한 라모나가 알폰조에게 잔을 받아 들었다.
그가 라모나와 손이 닿지 않도록 잔의 윗부분을 살짝 쥐고 전해 주었다는 건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둘만 있는 건 좀 불안한데.’
그에 대한 경계를 놓지 못한 라모나가 살며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공작가의 호위들이 눈에 보였다.
안심한 그녀가 음료를 마시는 척만 하다 살며시 내려놓던 때였다.
“왜 하필 로베르트 메닝엔이었지.”
알폰조의 말에 라모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당황한 라모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알폰조의 얼굴 뒤로 석양에 물든 바다가 펼쳐졌다.
그는 라모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말했다.
“요하네스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면 나를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뭐라고?’
의미심장한 알폰조의 말에 라모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걸 이 남자가 어떻게 알지?’
호흡을 멈춤과 동시에 사고도 멈췄다.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을 지웠다.
“황자 전하, 실례지만 지금 뭐라고 하신…….”
라모나가 알폰조에게 되묻던 그때였다.
“어머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반가워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그들을 몰래 뒤쫓다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던 레이디 클라이스트, 로지나였다.
어디를 바쁘게 다녀오기라도 한 건지 오늘도 그녀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황자 전하도 계셨네요. 클라이스트의 딸이 2황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알폰조는 미간을 찌푸린 채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못마땅한 듯 고개를 돌렸다.
“……보는 눈이 많군. 인사는 생략하도록 하지.”
“이미 인사는 다 해 버렸는데 어쩌죠? 호호호.”
입을 가린 로지나가 어쩐지 산만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웃었다.
“그런데 각하는……? 어디 계시나요?”
나타나자마자 로베르트를 찾는 로지나의 질문에 라모나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먹을 걸 좀 사 온다고 하셨어요.”
“좋네요, 저도 마침 배고프던 참이었는데.”
이건 또 뭔 소리야. 뻔뻔한 로지나의 대답에 라모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로지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또다시 활짝 웃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남은 축제는 함께 구경하지 않으시겠어요?”
“……곧 들어갈 예정이라서요.”
“어머나!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순간 라모나의 미간이 꿈틀했다.
‘들어갈 예정이 좋은 생각이라고?’
왜? 내가 들어가면 둘이 뭐하려고?
욱한 그녀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레이디 클라이스트와 함께 축제를 구경하는 것도 즐겁겠네요.”
로베르트 뺨치는 예쁜 미소는 덤이었다.
잠시 뒤, 전리품처럼 양손 가득 음식을 들고 돌아온 로베르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로지나?”
그의 입에서 또 로지나의 이름이 나오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베르트.”
그제야 라모나와 알폰조가 둘이서 그를 기다렸다는 것을 깨달은 로베르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런, 내 사랑! 나의 천사! 많이 기다렸습니까?”
유독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한 로베르트가 긴 다리를 성큼성큼 뻗어 라모나와 알폰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혹시라도 당신을 누가 훔쳐 갔을까 봐 제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아십니까?”
오늘도 역시 정도 없는 그의 주둥이에 라모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왠지 모르게 흐뭇한 표정으로 그런 로베르트를 바라보던 로지나는 라모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어머어! 이 오징어 맛있겠어요.”
‘뭐지? 아까부터 자꾸 나를 훔쳐보는 것 같은데.’
라모나가 떨떠름한 기분으로 꼬치를 들었다.
어느새 입을 다문 알폰조도 슬쩍 라모나의 옆으로 다가와 꼬치를 하나 들었다.
졸지에 로베르트와 로지나, 그리고 알폰조 세 사람에게 둘러싸인 라모나가 어색하게 바닥을 바라보며 꼬치를 한 입 깨물었다.
‘맛있네.’
그래, 맛있는데…….
‘빨리 먹고 집이나 가고 싶다.’
머릿속이 영 복잡하기만 했다.
* * *
엉겁결에 합류하게 된 로지나를 포함한 네 명에게 로베르트가 사 온 음식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알폰조가 나서서 다시 사 온 음식까지 다 먹고 난 후, 네 사람은 나란히 해안가를 걸었다.
라모나, 로지나, 알폰조. 그리고 로베르트.
이상하게 로지나가 자꾸 라모나와 알폰조의 사이로 파고드는 탓에 자리 배치가 영 희한해졌다.
그 덕분인지 로베르트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라모나에게는 보이지도 않았다.
“날씨 좋네요.”
어쩐지 흐뭇해 보이는 로지나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하늘은 푸르게 물들었다.
라모나는 생각에 잠긴 채 묵묵히 길을 걸었다.
‘아까 그건 뭐였지.’
분명 알폰조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정보가 새어 나간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에 알폰조의 태도가 너무…….
‘확신에 차 있었어.’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알폰조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알폰조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쏴아아.
시원한 파도 소리가 어색한 눈 맞춤을 씻어 갔다.
고민 끝에 라모나는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
그녀의 목소리에 로지나와 로베르트, 그리고 알폰조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꿀꺽.
긴장한 나머지 침을 한번 삼킨 그녀가 말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
라모나의 말에 알폰조는 별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일행과 따로 떨어져 해변가를 걷기 시작했다.
“할 말이 있나?”
“아까 하신 말씀이요.”
“아아.”
알폰조가 피식 웃었다.
여유를 가장한 웃음이었지만 라모나는 그 사이로 삐져나오는 조바심을 읽었다.
‘확실히…… 지난번에 봤을 때와는 달라.’
그러고 보니 지난번과는 다르게 오늘의 알폰조는 그녀와 살이 닿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했다.
이건 둘 중 하나였다.
그날의 일을 마음에 새겼거나. 아니면.
‘내가 남자와 살이 닿는 걸 혐오한다는 걸 알고 있거나.’
갑자기 라모나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숨쉬기가 불편해진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명치 근처를 문질렀다.
이내 알폰조가 입을 열었다.
“그 말 그대로지.”
그가 다시 라모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그대가 가장 잘 알 테고.”
쿵.
그 순간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라모나의 심장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