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 *
아이들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기겁한 벤은 동네 사람들을 다 붙들고 물어봤지만,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고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다.
“미치겠네!”
쿠당탕!
길가의 나무 상자를 걷어찬 벤이 홧김에 소리를 질렀다.
‘진짜 그놈들인가.’
이가 누런 남자를 떠올린 벤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놈들이라면 사람들이 겁에 질려 입을 다물어 버린 것도 이해가 갔다.
‘젠장! 하루의 기한을 준다고 했으면서.’
쾅.
벤이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그놈들을 찾아가서 무슨 일이든 할 테니 아이들을 돌려달라고 빌까, 아니면…….
<그 여자가 지금 레헨트에 와 있다 이거야.>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를 찾아갈까.
불안한 발걸음으로 골목을 서성대던 벤은 이내 마음을 정했다.
잠시 후 바이스카스텔, 라모나를 만날 생각에 잔뜩 긴장한 벤이 비장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하지 마! 얀닉!”
“싫어! 형도 했잖아!”
멀리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벤의 눈이 커졌다.
“……사무엘?”
동생들의 목소리가 왜 여기서 들리는 걸까. 당황한 벤이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던 그때.
“일찍도 왔네.”
삐딱하게 선 티아가 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억!”
깜짝 놀란 벤이 비명을 지르자 티아가 코웃음을 쳤다.
“네 동생들 놀아 주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한지 알아?”
놀아 줘? 점점 알 수 없는 일의 실마리에 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는 일단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그제야 벤을 발견한 사무엘과 얀닉이 후다닥 달려왔다.
“형!”
아침에 보았을 때와는 달리 말끔해진 모습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벤이 얼떨떨한 얼굴로 동생들을 끌어안았다.
“애니는?”
“애니는 자고 있어, 저 누나가 약도 줘서 약도 먹었어!”
해맑은 얀닉의 대답에 벤이 티아를 바라보았다.
“저…… 이게 무슨 상황인지…….”
피식 웃은 티아가 손짓했다.
“따라와.”
“……예?”
“아가씨께서 널 기다리고 계셔.”
더 커질 데도 없을 것 같던 벤의 눈이 또 휘둥그레졌다.
* * *
수도, 황궁의 정원.
한껏 부풀린 치마를 입은 미카엘라가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벤트하임의 딸이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요하네스는 다정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오랜만이야, 레이디 벤트하임.”
미카엘라가 황궁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명을 내렸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미카엘라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간 별일 없으셨지요?”
“물론이지.”
“다행이에요. 요즘 수도가 워낙 시끄러워서요.”
“흐음, 무슨 일이라도 있나?”
“전염병이 도는 것 같더라고요.”
“저런, 안타까운 일이군.”
요하네스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 또…….”
미카엘라가 힐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바텐베르크 후작도 워낙 소란스럽게 돌아다니고요.”
요하네스는 미카엘라의 떠보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겁을 먹은 미카엘라가 저도 모르게 손을 뒤로 숨겼다.
그 광경을 목격한 요하네스가 피식,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의 푸른 눈이 꿰뚫을 듯이 미카엘라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수도는 항상 시끄럽지.”
“……그런가요.”
“그래, 벤트하임 공작이 아이젠부르크의 영지를 몰수하려 한다고?”
“아.”
미카엘라는 곤란한 듯 눈썹을 내려뜨렸다.
이내 그녀가 눈을 내리깐 상태로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네, 화가 조금 많이 나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아이젠부르크는 벤트하임의 오랜 가신…….”
“그 이야기를 공작에게 했나 보지?”
정곡을 찌르는 요하네스의 말에 미카엘라가 입을 다물었다.
“아이젠부르크의 여식이 내 정부가 되기를 거절했다고, 공작에게 이야기했나 보지? 응?”
“…….”
곤란해진 미카엘라가 입술을 깨물자 요하네스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대답.”
“그게…….”
“대답.”
“……죄송합니다, 전하.”
“멍청한 짓을 했군.”
요하네스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이내 그가 장미 넝쿨로 다가갔다.
탐스럽게 활짝 핀 붉은 장미꽃을 꺾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뭐, 공작이 나서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낼 테니…… 잘 된 건가.”
라모나의 이야기에 미카엘라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지만, 요하네스가 다시 뒤를 돌자 얼른 사랑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그려 냈다.
뻔히 보이는 그녀의 속내에 요하네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저런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것은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요하네스는 또다시 자신의 서랍 속에 넣어 둔 편지를 떠올렸다.
“그나저나 아까 그건 무슨 말이지.”
“……예?”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아, 전하께서 신경 쓰실 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에요. 레이디 오셀튼이 아프다며 저택에 틀어박혔거든요.”
전염병이라. 이번에는 편지의 내용이 맞아떨어졌다.
얼마 전, 요하네스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편지에는 자신이 미래를 보았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담겨 있었다.
이 정도면 병이다 싶을 만큼 상세한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헛소리에 코웃음 치며 편지를 태워 버리려 했다.
그러나 곧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편지가 고대 이브리트어로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이브리트어는 이미 사장된 언어, 현시점의 제국에서 이브리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이는 얼마 없었다.
그나마 사용하는 계층이라면…….
‘황족.’
대충 후보를 추려 본 요하네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전염병이라면 매년 벌어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뒤는 어떨까.’
미카엘라를 바라보는 요하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레이디 벤트하임.”
“예, 전하.”
“내게 고민이 하나 있는데 들어 보겠나?”
고민이라는 말에 미카엘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물론이에요. 전하.”
“요즘 황제 폐하께서 영 심기가 불편하셔서 말이지…….”
하늘처럼 푸른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레헨트라고, 그대가 들어봤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이번에는 미카엘라 벤트하임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요하네스의 검은 속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로베르트는 진짜 저녁까지 먹고 갈 기세인 알폰조를 겨우 돌려보냈다.
덕분에 하녀장 이본느는 한숨을 돌렸다.
아직 식사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다. 할 이야기가 있다며 라모나를 불러낸 로베르트는 기분이 잔뜩 상한 얼굴로 물었다.
“진짜 갈 겁니까?”
“뭘요?”
“내일 축제 말입니다.”
“그럼 어떡해요. 가짜로 갈 수도 없잖아요.”
라모나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하자 로베르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무하네.”
너무하긴 누가 너무한데? 라모나가 눈을 치켜떴다.
“각하도……!”
‘각하도 레이디 클라이스트랑 가시면 되잖아요!’라고 말하려던 라모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왠지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진 탓이었다.
로베르트가 입술을 삐죽이며 되물었다.
“각하도?”
“가, 가고 싶으시면 같이 가시던가요! 아니면 말든가!”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이내 그의 얼굴에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요.”
그의 얼굴이 환해진 만큼 라모나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이거 정말 괜찮은 생각 맞나?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뭐.’
내일의 나, 파이팅.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섰다.
“전 잠깐 일이 있어서 가 볼게요, 각하.”
“예?”
“……왜요?”
“저녁 시간까지 저와 함께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내가 왜? 고개를 갸웃한 라모나가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로베르트는 그녀의 의중을 읽었다. 그의 얼굴에 다시 못마땅한 기색이 떠올랐다.
“급한 일 아니면 식사를 함께하시죠.”
“불러 둔 사람이 있어서요. 이야기를 나누려고 해요.”
사람이 와 있다는 말을 핑계로 여긴 로베르트가 눈썹을 까딱했다.
“레헨트에 당신이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음, 딱 한 명 있네요.”
라모나의 대답에 누군가를 떠올린 로베르트가 쩍하고 입을 벌렸다.
“설마 그 소매치기 소년입니까?”
“예.”
“맙소사.”
로베르트가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지금 약혼자를 홀로 두고 외간 남자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겠다고…… 축제도 모자라서…….”
“외간 남자라기엔 너무 어린아이인 걸요.”
“내 사랑, 나의 천사. 정말 너무합니다.”
“죄송하지만 너무하다는 말 이제 조금 식상해요.”
“정말 잔인합니다.”
“네에, 그럼 잔인한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라모나는 그 말을 끝으로 로베르트의 침실을 나섰다.
달칵.
‘누가 할 말인데?’
왠지 낮의 일에 복수한 것 같아 신나는 기분으로 문을 닫은 건 비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