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네가 그걸 왜 먹어요?
라모나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강렬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지난번에 봤던 푸른빛이 정말 로베르트 메닝엔의 마지막 정신 줄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도대체 저 미친 자신감의 근원은 뭘까. 저렇게 살면 세상이 행복할 것 같기는 했다.
말을 잃은 라모나를 향해 로베르트는 곤란하다는 듯 크게 웃어 보였다.
“이런 걸 믿으실 줄이야. 생각보다 순진한 면이 있으시군요.”
“믿을 리가 없죠. 저는 그냥 이게 뭔지 아시냐고 각하에게 물었을 뿐이랍니다.”
로베르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눈썹을 까딱했다.
“사랑의 묘약 아닙니까.”
뭔 착각을 한 건지 알 것 같다. 라모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얘 오늘도 뭐 잘못 먹었니? 기가 찬 라모나가 헛웃음을 쳤다.
“말이 안 되잖아요! 애초에 사랑의 묘약이라는 게 있을 리가요. 그리고 사지도 않겠다는 데 주머니에 넣어 준 것도 수상…… 각하! 먹지 마세요!”
말하는 도중에 로베르트가 가루 가까이 얼굴을 대는 걸 발견한 라모나가 기겁하며 그를 말렸다.
“……안 먹습니다. 그냥 가까이서 살펴본 것뿐입니다.”
“진짜 안 돼요.”
“저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저도 그러길 바라는 중이에요.”
기어이 로베르트에게서 그 가루를 빼앗고 나서야 라모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빈민가의 아이가 가루를 보더니 그러더라고요.”
로베르트는 조금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 말입니까?”
“기분 좋아지는 약이라고요.”
그제야 어쩐지 나사가 하나 풀린 것처럼 바보 같던 로베르트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가 심각해진 얼굴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기분 좋아지는 약이라면…… 각성제?”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 로베르트를 향해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아예 레헨트에서 제조를 하고 있을 줄이야. 그래서 그냥 나눠 주었군요. 한번 사용해 보면 분명 사러 올 테니 말입니다.”
“네, 사실 이해가 좀 안 가는 부분도 있기는 해요.”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배후에 요하네스가 있다면 이런 식으로 판매하기보다는 정말 필요할 때를 위해 보관해 둘 텐데 말이죠.”
“아마 그 상인이 몰래 빼돌린 걸 겁니다. 어딜 가나 그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렇다면 이해가 가네요.”
응접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벤의 이야기에서 상황을 짐작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런 종류의 약은 한번 자리 잡기 시작하면 뿌리 뽑기 어렵다.
게다가 레헨트는 유명한 휴양 도시, 여기서 각성제를 접해 본 귀족들이 수도로 이걸 공수해 갔다가 문제라도 생긴다면…….
‘메닝엔 공작가가 덤터기 쓰는 건 시간 문제지.’
확실히 미카엘라가 벌일 수 있는 규모의 일은 아니었다.
요하네스.
이번 생의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로베르트가 다리를 꼬며 입을 열었다.
“라모나, 지난번에 당신이 말한 것 있지 않잖습니까. 전염병 말입니다.”
“예, 제 예상이 빗나간 건…… 그건 죄송하게 생각해요.”
“아니, 어쩌면 빗나간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심각한 얼굴의 로베르트가 말했다.
“각성제를 복용하는 동안에는 통증이나, 몸의 이상에 대해 인지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예, 자신이 전염병에 걸렸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전염병을 퍼뜨리겠죠.”
예상하지 못했던 최악의 시나리오에 라모나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 * *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길, 라모나가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과거에는 없던 일이야.’
겪어 보지 못한 일이라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흘러갔을까.’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큰 힘이다. 하지만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해 보기도 전에 미래가 바뀌어 버렸다.
‘역시 내 선택 때문인가.’
그녀가 로베르트 메닝엔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미래가 지난 생과 같이 흘러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라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나는 나 혼자 살자고 다른 이들을 위험에 몰아넣고 있는 걸지도 몰라.’
우울한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어쩌면 자신의 선택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후회에서 시작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 나가 로베르트 메닝엔까지 이르렀다.
‘약속한 증거를 찾아 주고 나면 지금과 같이 지내지는 못하겠지.’
순간 또다시 로베르트의 팔을 붙들고 있던 로지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라모나와는 달리 로베르트와 정상적인 관계를 다져 온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아.”
이게 뭐라고 속상하지. 긴 한숨을 내쉰 라모나가 정원을 내다보았다.
아이들은 실내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멀리서 하얀 무언가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응? 저건?’
이본느?
고개를 갸웃한 라모나가 이본느에게 물었다.
“왜 그러지.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거야?”
“손님이 오셨습니다.”
침착하기 짝이 없던 이본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라모나가 다시 물었다.
“어떤 손님이 오셨기에……? 할아버님?”
“그게…….”
이윽고 이본느의 대답을 들은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뒷목을 잡았다.
“2황자 전하가 레헨트에 요양을 오셨다고 합니다.
* * *
불청객의 등장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상대는 황자인 것을. 결국 로베르트는 툴툴대면서도 알폰조를 맞으러 나갔다.
알폰조는 담백한 인사와 함께 로베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군, 메닝엔 공작.”
“그러게 말입니다, 황자 전하.”
싱긋 웃은 로베르트가 악수를 청하는 알폰조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나 알폰조는 태연한 얼굴로 로베르트의 손을 한번 맞잡고는 손을 놓았다.
“레헨트에는 어쩐 일이신지.”
“몸이 안 좋아서.”
“저런, 서부 경계의 사령관께서 몸이 안 좋으시다니요.”
“그렇게 되었군.”
로베르트의 날 선 공격도 무던한 알폰조의 앞에선 별 의미가 없었다.
그의 적의를 대충 흘려 버린 알폰조가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이내 라모나를 발견한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알폰조의 얼굴에 떠오른 반가움을 발견한 로베르트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구겼다.
예상보다 너무 반가워하는 알폰조에게 당황한 라모나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아이젠부르크의 딸이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덥석.
라모나의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알폰조가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소름이 돋은 라모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이상을 눈치챈 알폰조는 얼른 손을 놓았다. 마치 라모나가 그와의 악수를 싫어할 줄 알았다는 듯이.
대신 그는 그녀와 끝까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대를 꼭 다시 만나고 싶었어.”
라모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도 황자 전하를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상하네, 지난번에 봤을 때랑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어색한 미소를 지은 라모나가 슬며시 그에게서 손을 빼냈다.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로베르트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딱히, 아.”
그때까지도 라모나를 바라보고 있던 알폰조는 무언가 생각난 듯 로베르트를 돌아보았다.
“저녁이나 함께 들면 좋겠군.”
“하하하, 보통 초대는 주인이 하는 겁니다만.”
“그럼 초대해 주겠나?”
아무리 비꽈도 타격을 받지 않는 상대. 이게 바로 로베르트가 알폰조를 싫어하는 이유였다.
* * *
어쨌든 귀한 손님을 맞이하게 된 바이스카스텔. 알폰조에게 정원을 소개하는 로베르트에게 라모나가 귓속말을 속삭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각하?”
“저도 모릅니다.”
“기분이 되게 나빠 보이시네요.”
“그럴 리가요.”
소곤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알폰조가 입을 열었다.
“보기 좋군.”
“……예?”
당황한 라모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그런 사이가 될 줄을 몰랐거든.”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로베르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예?”
“아, 오해는 하지 말게. 그저 가문 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야.”
알폰조가 머쓱한지 머리를 긁었다.
불편하다, 불편해. 라모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억지로 미소 지었다.
오늘따라 영 바보같이 구는 로베르트도, 어딘가 수상한 알폰조도 다 귀찮기만 했다.
‘쉬러 왔는데 일만 더 생긴 기분이야.’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황자 전하께서는 레몬 축제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레몬 축제?”
“예, 레헨트의 명물이랍니다. 꼭 가 보시는 걸 추천해 드려요.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예요.”
‘실은 저도 가 본 적이 없지만요.’
라모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오.”
알폰조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이내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
“그렇죠?”
“축제는 언제부터지?”
축제 일정을 몰랐던 라모나가 재빨리 로베르트에게 눈빛을 보냈다.
‘내일부터.’
로베르트의 입 모양을 읽은 라모나가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내일부터입니다.”
“아주 좋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라모나를 향해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
“그럼 자네가 나를 안내해 주면 되겠어.”
라모나는 다시 한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지금의 알폰조는 지난번 그녀가 보았던 알폰조와는 너무도 다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