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잠시 그녀의 제안을 고민하는 듯하던 로베르트는 이내 코웃음을 쳤다.
아닌 척하지만 자존심이 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딴 치졸한 작전 펼칠 필요가 있나? 그녀와 나는 이미 약혼한 사이고, 우리 사이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아무 문제가 없기는 무슨. 속으로 웃음 지은 로지나는 얼른 당황한 척을 했다.
“그래요? 저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것…… 어머, 아니에요.”
로지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녀가 로베르트에게 우아하게 인사를 건네고 응접실을 나서려던 때였다.
“잠깐만.”
로베르트가 그녀를 붙잡았다.
‘걸려들었군.’
잔뜩 신이 난 로지나는 얼른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뒤를 돌았다.
“예?”
“그게 무슨 소리지.”
“아아…… 별건 아닌데…….”
그녀는 한껏 말끝을 흐렸다.
“아까 호위들을 보고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2황자 전하의 사람이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각하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나 생각했어요. 제가 넘겨짚은 모양이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알폰조의 이야기가 나오자 로베르트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진짜 에드윈 이 멍청한 놈.’
이걸 어떻게 모를 수 있어?
앞에서 봐도, 뒤에서 봐도, 달려가면서 봐도, 하다못해 옆 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누가 등만 떠밀어 주면 연애는 물론 결혼까지 할 사람들인데!’
그리고 나는 거기서 한 몫 챙겨가야지. 잔뜩 신이 난 로지나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 * *
‘진짜 미친 거 아냐?’
당신은 내 거라고 말한 여자를 두고 약혼녀를 내보내? 그것도 단둘이 얘기하려고?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죽음으로 사죄. 그녀는 계약서의 조항을 마음에 새기며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는 잔뜩 신난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티아가 혼신의 힘을 다해 아이들을 놀아 준 덕이었다.
“꺄아! 나도! 나도 줘요!”
지금도 막내 애니가 폴짝폴짝 뛰며 티아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병약해 보이는 것이 저 아이가 바로 벤의 아픈 손가락이구나 싶었다.
지난 생, 벤은 동생의 약값을 벌기 위해 미카엘라의 심부름을 맡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니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미카엘라가 퍼뜨린 그 전염병 때문이었다.
‘여기 있자니 지난 생에 대한 생각을 도저히 안 할 수가 없네.’
“후.”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헨트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아름다운 만큼 라모나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곳이기도 했다.
‘다 내 죗값이지.’
라모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정원을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라모나를 발견한 티아가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
덩달아 아이들도 라모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티아와 아이들이 라모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꺄아아!”
그때였다.
툭.
티아의 주머니에서 하얀 종이 뭉치가 떨어졌다.
종이 뭉치를 발견한 사무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나도 이거 만들어요?”
“응?”
티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사랑의 묘약 말하는 거야?”
“에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바보!”
사무엘이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그거잖아요! 기분 좋아지는 가루.”
기분 좋아지는 가루?
‘……이게 바로 그거였구나!’
심상치 않은 예감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 * *
로지나를 내보낸 후, 응접실에 홀로 남은 로베르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원인은 하나였다.
서부 경계 사령관, 2황자, 알폰조.
알폰조! 그놈의 알폰조! 어딜 가나 따라다니는 알폰조!
‘그냥…… 죽일까?’
그는 정말 진지하게 황족 시해를 고려했다.
고대의 기록 중에 환수를 불러일으키는 방법이 남아 있다던데, 알폰조가 서부 경계에 있을 때 한번 시도해 보면 괜찮지 않을까?
……까지 생각한 로베르트가 자괴감에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정신 차려, 로베르트 메닝엔.’
요하네스도 아니고 2황자를 죽이기는 왜 죽인단 말인가.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었다.
그는 진지하게 자신의 상태를 되돌아보았다.
‘대체 뭐가 문제지?’
얼굴이면 얼굴, 몸이면 몸, 권력이면 권력. 하다못해 재산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자신이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땅이나 파고 있는 걸까.
로지나의 제안이 말도 안 되게 치졸하고 쪼잔한 계획인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제안에 응한 자신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난…… 쓰레기야.’
잘나고 잘생긴 쓰레기.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그의 자존감이 한 10센티미터 정도 줄어들었다.
로베르트는 소파에 축 늘어졌다.
살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잘나디잘난 메닝엔 공작에게 이런 감정을 선사한 건 단언컨대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유일했다.
그는 맥이 빠진 얼굴로 손목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알폰조를 싫어한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알폰조를 싫어한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로베르트 메닝엔을…… 젠장, 이게 아니지.”
중얼거리던 로베르트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런 미친.’
라모나가 로베르트를 싫어할 만한 이유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벌떡.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현실을 자각하고 나니 이유가 한 200가지 정도 떠올랐다.
일단 첫 만남부터 그녀를 떠봤고, 강제는 아니었지만 메닝엔 공작저에 그녀를 감금했으며, 그녀의 평판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일에 앞장섰다.
‘최악이군.’
갑자기 찾아온 자기 객관화 시간에 로베르트는 한없이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다.
반면 알폰조는 어떤가.
라모나의 동생, 레이먼의 신뢰를 받는 좋은 상사인 데다가, 위험에 빠진 그녀를 도와주었고.
‘몸이 좋아.’
군인답게 몸이 아주 거대했다.
드디어 로베르트는 세상에 근육 바보가 취향인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약혼녀가 바로 그 취향일 수도 있다는 사실도.
심각한 고민에 빠진 그가 턱을 만지작거리던 그때였다.
똑똑.
“로베르트?”
라모나가 웬일로 한 번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각하가 아니라 로베르트라고.
순식간에 화색이 된 로베르트가 직접 달려나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라모나?”
그의 환한 얼굴에 라모나가 흠칫 하고 놀랐다.
“……왜 그런 표정으로 저를 보세요?”
“제 표정이 많이 이상합니까?”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가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좀 과하게 즐거워 보이시는데요.”
로베르트는 그 순간 라모나의 얼굴에 떠오른 불쾌함을 놓치지 않았다.
‘설마?’
정말 로지나 때문인가?
진짜 그 계획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흠,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들어오시죠.”
헛기침한 로베르트가 라모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평소와 같은 예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였다.
* * *
라모나는 조금 전과는 달리 로베르트의 얼굴이 유독 밝아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대체 레이디 클라이스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기에?’
로베르트의 팔을 꽉 붙든 채 라모나를 훑어보던 로지나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피식, 하고 비웃던 비웃음까지도.
‘……기분 나빠.’
그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껏 돌아왔던 기분이 다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갑자기 저 잘난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었다.
라모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로베르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주먹을 날리든, 발로 걷어차든. 아무튼 그 전에 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무엇입니까.”
“사람을 물려 주세요.”
“분부대로.”
달칵.
응접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라모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흰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혹시 이걸 본 적이 있으신가요?”
고개를 갸웃한 로베르트가 종이를 펼쳐보았다.
종이에는 거무튀튀한 가루가 들어 있었다. 머리 아픈 약초 향이 물씬 풍기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약초입니까?”
라모나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시장에서 사랑의 묘약이라고 팔던 거예요.”
사랑의 묘약이라는 말에 로베르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는 진지하게 양손을 모으며 물었다.
“사랑의 묘약이라니, 구매하신 겁니까?
왜 저래? 불길한 예감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요. 구매할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도 티아의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더라고요.”
로베르트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가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뭘 알겠다는 거지?’
라모나의 감이 오랜만에 경고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지금 분명히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영 찝찝한 예감을 떨치지 못한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살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까지 하나 했더니 다 이유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대체 뭘 알겠다는 건데? 점점 대화가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던 때였다.
로베르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이걸 먹으면 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