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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61화 (62/151)

#61화

* * *

레헨트에 위치한 메닝엔 공작가의 별장, 바이스카스텔의 응접실.

<마침 각하가 레헨트에 다녀오신다더라고. 절호의 기회 아니겠어?>

준비는 다 해 놨다며 레헨트로 보내더니, 그 준비라는 게 고작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에게 사람을 붙여 놓은 게 전부일 줄이야.

로지나는 이를 악물었다.

‘에드윈, 진짜 죽여 버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지극히 우연인 것처럼 “어머? 각하?” 하고 바람에 시폰 드레스를 휘날리며 로베르트 앞에 나타나.

아련한 첫사랑 느낌과 더불어 오랜 소꿉친구의 독점적인 행동으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자극하고 반응을 살피려 했는데!

당장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겁도 없이 빈민가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뒤쫓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뭐, 어쩌겠어.’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거. 로지나는 당당하게 허리를 세우고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로지나라 불러 줘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레이디 클라이스트.”

빙긋 웃으며 대답한 라모나는 그녀의 악수를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끝까지 레이디 클라이스트라는 호칭을 고수했다.

‘호오, 마음에도 없는 친한 척은 안 하시겠다? 생각보다 성격 있네.’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 로지나가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도발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 볼까 해요.”

“그 전에 말이에요.”

‘오,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시겠다.’

이거 제법 괜찮은 상대잖아? 로지나는 내심 감탄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로지나의 도발적인 되물음에도 라모나는 끄떡하지 않았다. 그녀는 태연하게 차향을 음미했다.

이내,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의 짙푸른 눈이 로지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레이디 클라이스트의 사람들이 저를 쫓고 있었는지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아아, 그 일은 죄송하게 됐네요.”

“아뇨, 저는 레이디의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일의 전말을 듣고 싶은 거랍니다.”

에드윈이 벌인 일의 전말 따위 로지나가 알 리 없다. 그러나 로지나는 이 김에 라모나의 속을 살살 긁어 보기로 결심했다.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낸 그녀가 턱을 괴며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그야…… 대체 각하가 어떤 여자에게 반했는지 궁금해서?”

“그렇군요. 그래서 수도에서도 안 하던 제 미행을 레헨트까지 와서 하신 거군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뻔뻔한 로지나의 대답에도 라모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라모나!”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로베르트 쪽이 더 동요하는 얼굴이었다.

로지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아, 이거. 확인할 필요도 없잖아.’

에드윈 진짜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봐, 어떻게 저런 얼굴을 보고도 확신을 못 하지?

로지나는 멍청한 오라버니를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한 가지가 영 마음에 걸렸다.

‘흠,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쪽은 너무 침착한데……. 설마 짝사랑인가?’

제 잘난 맛에 살던 메닝엔 공작이 짝사랑이라니. 눈물 나게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그렇지만 쌍방이라기에 라모나는 분명 그녀를 연적이라 생각하지 않는 태도였다.

‘오, 각하. 망했는데.’

안타깝…… 기는 무슨, 신이 난 로지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오셨어요?”

그녀를 발견한 로베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로지나?”

로베르트가 로지나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 라모나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로지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이거 어쩌면…… 생각보다 더 괜찮은 계획일지도 모르겠네?’

음흉한 계획을 떠올린 로지나의 광대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 * *

태연하게 차를 마시는 로지나, 그리고 화장실도 못 간 강아지처럼 구는 로베르트.

그 두 사람과 함께 응접실에 남게 된 라모나는 한숨을 삼켰다.

‘정말 하루하루가 시끄럽다.’

복잡한 수도를 떠나 요양을 왔는데, 결국 이곳도 이 모양이라니.

‘이쯤 되면 그냥 저 남자가 문제인 거 아냐?’

슬슬 짜증 나네. 라모나가 식은 눈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라…… 모나?”

곱지 않은 시선을 눈치챈 로베르트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왜 저렇게 웃어? 또 얼굴로 무마하려고?’

하여간 자기 잘난 건 알아가지고.

그 꼴이 오늘따라 보기 싫었던 라모나가 홱, 하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벌어진 소란에 겁을 먹은 벤의 동생들을 잘 구슬려 이곳으로 데려왔다.

머리가 큰 사무엘이 집에 남겠다고 드러눕기는 했지만, 기가 막힌 말재주의 소유자 티아에게 어린아이 하나를 설득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라모나를 밀치려던 남자는 그대로 생포해 감옥에 던져 넣었다.

호위는 그를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레헨트의 사람을 죽이는 것이 찝찝했던 라모나는 남자를 살려 두기를 택했다.

아마 동생들이 없는 빈집을 발견하면 벤은 그 즉시 그녀를 찾아올 것이다.

‘협박이라고 생각하려나……. 하아, 어쨌든 외출의 목적은 달성했네.’

그렇다기에 과정이 좀 많이 잘못되기는 했지만, 라모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각하? 그때 그 건은 어떻게 된 거죠?”

로베르트에게 애교 가득한 말투로 말하는 로지나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정정하겠다. 라모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가 라모나의 마음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로베르트와 로지나 쪽을 돌아보았다.

당황한 로베르트는 로지나에게 되물었다.

“응?”

로지나는 싱긋 웃으며 그의 팔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왜, 저번에 제게 따로 부탁하신 거 있잖아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지금…… 사람 앞에 두고 둘이 뭐 하는 거야?’

라모나는 이 분노가 자신이 무시당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로베르트가 전부터 레이디 클라이스트의 이름을 서슴없이 입에 담았다는 점까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라모나는 일단 그 생각을 모르는 척 뒤편으로 미뤄 두었다.

한번 끓어오르기 시작한 분노는 불이 붙은 듯 서서히 라모나의 가슴 속에 퍼져 나갔다.

‘아니, 자기는 나한테 맨날 알폰조 얘기하면서 화내잖아.’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야?

‘열 받네.’

로베르트는 로맨스도, 불륜도 하지 않는 중이었지만. 지금의 라모나에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응?’

로지나의 시선이 잠시 라모나를 향했다.

그녀는 로베르트의 팔을 붙들고는 라모나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어본 다음, 피식.

보란 듯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게?’

욱한 라모나가 눈을 크게 떴다.

이내 로지나는 다시 로베르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팔랑거리는 기다란 속눈썹이 가증스럽기도 했다.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하, 로지나.”

“으음, 그것 때문에 레헨트까지 왔는데 이러시기에요? 약속은 지키셔야죠.”

로지나가 살며시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으며 은근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곤란한 듯 이마를 짚은 로베르트가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라모나. 저…….”

더 듣지 않아도 알았다. 이건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라모나는 관리 안 되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대화 나누세요.”

그래. 아주 이대로 평생 대화 나누든가, 나누다가 그대로 늙어 죽어 버리든가 내 알 바 아니지.

“불청객은 빠져 드리도록 하죠.”

분노한 라모나의 눈이 화르르 타올랐다.

“라모나?”

당황한 로베르트가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라모나는 차갑게 자리를 떴다.

그 광경을 목격한 로지나의 얼굴에 다시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달칵.

문이 닫히고, 로베르트가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올렸다.

“급한 일도 아니지 않나?”

그의 시선은 아직도 라모나가 나간 문 쪽을 향해 있었다.

‘역시.’

로지나는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그녀는 질색하며 로베르트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죄송해요.”

“그래서 무슨 일이지.”

“레이디 바텐베르크는 그대로 둘 건지 여쭤보려 했어요. 사교계가 심상치 않기에요.”

로지나의 말에 로베르트가 미간을 찡그렸다.

“고작 그거 하나 물어보자고 레헨트까지 찾아왔다고?”

라모나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역시 이쪽이 로지나가 익숙한 로베르트의 모습이었다.

“각하도 아시잖아요, 대가로 약속하신 게 제게는 워낙 중요한 거여서요.”

“그건 뭐, 안타깝게 됐군.”

“그래서 각하께 제안을 하나 드리려고 하는데요.”

“레이디 바텐베르크를 수도에서 내쫓을 새 계획인가?”

“아니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각하를 향한 마음을 확신하게 만들 방법이요.”

“그건 또 무슨.”

로지나의 말에 로베르트가 헛웃음을 쳤다.

“그딴 소리나 할 거면 수도로 올라가도록.”

그러나 로지나는 굴하지 않았다.

“각하께서 제 이름을 불렀을 때,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의 표정을 보셨나요?”

“흠?”

“확실해요. 그건 분명 질투였어요.”

질투라, 그제야 로베르트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그가 긴 다리를 쭉 뻗어 우아하게 꼬았다.

“계속해 보도록.”

됐다. 로지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본인은 아직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요. 그럴 때는 역시 주변의 자극이 필요하죠.”

로지나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그리고 저만큼 그 일을 잘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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