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덜컹거리는 마차 안.
“하아,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턱을 괴고 삐딱하게 앉은 로지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그녀를 한껏 부추긴 에드윈은 능구렁이처럼 스윽 빠져나갔다.
혼자 클라이스트 자작저를 출발하고 나서야 로지나는 깨달았다.
‘아…… 나 또 낚였나 본데.’
“빌어먹을 에드윈. 하여간 쥐새끼같이 빠져나가기 전문이지.”
입술을 깨문 로지나가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겼다.
간만에 수도를 떠나온 게 즐겁기는 했다.
벤트하임 공작가의 아이젠부르크 영지 몰수 선언 이후로 사교계는 급변했다.
미카엘라를 뒤에 업은 레이디 애커만과 블레나가 기세등등하게 턱을 치켜들고 다녔고, 문제의 티파티를 주최했던 레이디 오셀튼은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거기다 요하네스가 다시 미카엘라를 황궁에 초대하면서 분위기는 확실히 미카엘라에게로 넘어갔다.
‘멜리사는 대체 뭔 생각인지 모르겠고, 흐음…….’
생각에 잠긴 로지나가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아무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꼴불견이었다.
저 상태로 사교 시즌이 시작한다는 건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차라리 진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공작 각하랑 진하게 연애라도 했으면 좋겠네.’
얼마 전, 그녀를 불러낸 바네사 황녀는 로베르트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로지나. 그동안 잘 지냈나요?>
바네사 황녀의 다정한 미소를 떠올린 로지나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이 시점에 그녀를 불러낸 이유는 뻔하디뻔했다.
‘간 보지 말고 선택하라는 거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다정한 얼굴 뒤에 가려진 바네사의 냉정한 면모를 떠올린 로지나가 혀를 찼다.
“미치겠네, 진짜…….”
그녀가 한숨을 삼키며 힐끔,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잠깐만.”
무언가를 발견한 로지나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저 여자가 지금 왜 저기에 있어?”
그녀가 황급히 마차 문을 두드렸다.
“멈춰, 마차 좀 잠시 멈춰 봐. 빨리.”
* * *
레헨트의 시장.
‘오!’
레몬 커드 향을 맡은 라모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티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뿌듯한 얼굴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죠? 그렇죠?”
“응, 이거 진짜 향이 좋네.”
“아가씨도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제가 또 아가씨 입맛은 척 하면 척이잖아요.”
주인은 얼른 비스킷에 레몬 커드를 발라서 건네주었다.
“한번 드셔 보세요, 아가씨. 안 사도 되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하지만 그 비스킷을 입에 넣은 순간, 레몬 커드를 사지 않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레몬 풍미가 가득해. 상큼하지만 시지는 않고, 적당히 달콤한데 부드럽기까지 하잖아?’
이거 엄청 맛있네!
눈이 휘둥그레진 라모나가 티아를 바라보았다.
티아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맛있는 건 레몬 커드뿐만이 아니었다.
‘이건 정말 완벽한 비스킷이야.’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주인에게 물었다.
“저…… 이 비스킷은…….”
“같이 드릴까요?”
주인의 말에 라모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 뿌듯한 얼굴의 주인이 재빠른 손으로 레몬 커드와 비스킷을 포장했다.
“아, 그리고 혹시.”
무언가가 떠오른 라모나가 머뭇거리듯 말했다.
“버터 쿠키도 있나?”
* * *
딸랑.
“좋은 하루 되세요!”
경쾌한 벨소리와 그보다 더 경쾌한 주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라모나와 티아는 상점을 나섰다.
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 산 것 같기도 해요. 레몬 커드는 오래 보관도 못 하는데…….”
“괜찮아. 어차피 나눠 줄 생각으로 산 거라서.”
“아아, 바이스카스텔의 사용인들에게 나눠 주실 거였구나! 역시 상냥한 우리 아가씨.”
“아니, 거기 말고.”
라모나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들를 데가 있거든.”
뒤따르던 호위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 * *
라모나의 발걸음이 점점 구석진 곳으로 향할수록 티아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가씨, 이런 곳은 너무 위험해요. 저희 이만 돌아가는 건 어떨까요?”
그녀가 라모나에게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러나 라모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만날 사람이 있어서.”
“여기서요?”
티아는 믿지 않는 눈초리였지만 라모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도착한 웬 허름한 집.
‘여기도 오랜만이네.’
과거의 기억에 쓴 웃음을 삼킨 라모나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분명 안에서 재잘대는 아이들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노크 소리에 집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라모나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너희 형이 이것 좀 전해 달래.”
형이라는 말에 그제야 문이 열렸다.
작은 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남자아이가 물었다.
문틈 사이로 부족한 세간살이가 눈에 띄었다.
라모나는 속에서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겨우 삼켰다.
“네가 사무엘이지?”
“네. 오늘 형 못 온대요?”
“응. 대신 쿠키를 전해 달래.”
쿠키라는 말에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아이는 라모나를 집으로 들이는 대신 손만 살며시 내밀었다.
“주세요.”
낯선 얼굴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쿠당탕!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겁을 먹은 사무엘은 얼른 문을 닫아 버렸다.
쾅!
‘뭐지?’
당황한 라모나가 뒤를 돌아보자, 이가 누런 한 남자가 그녀를 보고 씨익 웃었다.
“그 집에 볼일 있어?”
이내 남자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없으면 꺼져.”
남자가 라모나를 거칠게 밀치려 하자 은신해 있던 호위들이 나타나 그를 검집으로 후려쳤다.
“억!”
한 방에 제압당한 남자가 뒤통수를 감싸 쥐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응?”
호위들의 얼굴을 확인한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전부 처음 보는 얼굴인데?’
골목에서 튀어나온 호위들은 분명 메닝엔 공작가의 병사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티아가 잽싸게 라모나의 앞을 막아섰다.
그사이 빠르게 자세를 가다듬은 공작저의 호위들이 정체불명의 병사들의 뒤를 덮쳤다.
“웬 놈들이냐!”
좁은 골목에서 라모나의 앞을 가로막은 티아, 그 앞을 막고 선 수상한 무리. 그리고 그들의 뒤를 막아선 라모나의 호위들.
금방이라도 피를 볼 것 같은 팽팽한 대치가 이어졌다.
“뭐, 뭐, 뭐야!”
졸지에 가운데에 낀 벤의 집을 덮쳤던 남자가 앉은 채로 뒷걸음질 치며 외쳤지만.
퍽.
이번에는 메닝엔 공작가의 병사의 검집이 그의 뒤통수를 향했다.
남자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기절했다.
기절한 남자가 거추장스러웠던 티아는 발로 그를 슥 밀어내고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수상한 무리를 향해 외쳤다.
“정체를 밝혀! 어디에 소속된 자 들이냐!”
수상한 무리들은 곤란한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사이 라모나의 호위들이 바짝 붙여 잡은 검을 그들의 뒤통수에 더 가까이 갖다 댔다.
대치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상황의 이상함을 눈치챈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사람들, 나를 노린 게 아니야.’
이들이 나타난 상황도 그렇고, 자신들이 위험에 처한 지금도 그들은 라모나를 공격하거나 협박하려 들지 않았다.
‘설마……?’
순간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 라모나가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티아가 파르르 떨며 외쳤다.
“아가씨, 위험해요!”
“괜찮아, 티아.”
티아를 진정시킨 라모나가 수상한 무리를 향해 물었다.
“그분이 그대들을 보냈나?”
라모나의 질문에 그들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내 무리의 대장으로 추정되는 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
“그대들이 모시고 있는 자가 2황자 전하인지 묻는 거야.”
……이다가 가로저었다.
‘뭐지? 그럼 대체 누구에게 속한 사람들이야?’
길어지는 대치에 라모나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지던 그때였다.
불쑥.
한 여자가 골목에서 튀어나왔다.
긴장한 티아가 어깨를 움찔 떨며 라모나의 그녀를 노려보았다.
“누구야!”
“하아, 하아. 목소리도 크네.”
전력 질주라도 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여자의 정체를 알아챈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레이디 클라이스트?”
레이디 클라이스트, 로지나는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이내 라모나를 향해 거만한 표정으로 턱을 까딱하며 말했다.
“거기, 그만 포기하시지.”
대체 뭘 포기해?
‘……레몬 커드를?’
라모나는 티아가 들고 있는 쿠키 봉투를 한번 바라봤다.
그때, 로지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남자는 내 거니까.”
그녀의 당당한 선언에 골목에 정적이 흘렀다.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볼을 꼬집어 보았다.
설마 지금 이거 또 꿈인가?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