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한편, 레헨트의 빈민가.
“어이! 벤! 요즘 뭘 하고 다니기에 그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냐.”
“뻔하죠, 뭐. 제 손가락에서 레몬 냄새 안 나요?”
“수레 끄냐?”
“그건 힘들어서 못 해요.”
“그럼 뭐 하는데.”
“못질이요.”
“짜식, 하여간 빠져서 편한 일은 기가 막히게 찾는다니까.”
사내의 농담에 벤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지난번, 수도에서 메닝엔 공작저로 끌려간 그날 이후 벤은 레헨트로 다시 돌아왔다.
<일단 내려가, 네게 할 일을 주마.>
메닝엔의 안주인이 될 것이라는 그 여자의 명령 때문이었다.
벤은 그녀가 동생의 약값으로 쓰라며 제법 두둑하게 챙겨 준 돈을 소중하게 챙겨 레헨트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 이후로 아무 연락도 없고……’
역시 허세에 불과했던 걸까. 이러면 무릎 꿇은 보람이 없었다.
‘뭐, 그나마 돈은 벌었으니까.’
벤이 혀를 찼다.
아무튼 돈도 받았겠다, 벤은 그 이후로 레헨트로 돌아와 상황을 계속해서 주시했다.
정치범들의 동향을 살피고, 수상한 사람이 나타날 때면 몰래 기록해 두었다.
지금 벤에게 시시한 농담을 계속 거는 남자도 그들 패거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 여자를 만나지?
벤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남자는 다시 벤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아 맞다, 벤.”
“억, 아파요!”
“너 저번에 수도에 갔다고 하지 않았냐?”
“아아, 네. 재수 없게 귀족 놈들에게 걸려서.”
벤이 과장되게 혀를 끌끌 차며 침을 뱉었다.
“퉤, 완전 미친년 하나 만났다니까요. 사람 하나 개고생시켜 놓고, 알고 보니까 그냥 보석함에 넣어 놓고 까먹은 거였던 거 있죠. 여기 봐요! 아직도 멍들어 있잖아.”
“와, 완전 제대로네. 그거 누구였댔지?”
벤은 남자의 은근해진 눈초리를 눈치챘지만 모른 척 눈을 굴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누구냐, 자기가 메닝엔의 안주인이 될 거라고 하던데요.”
“아이젠부르크?”
“맞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벤의 대답에 남자의 기색이 달라졌다.
“벤.”
“예?”
“그 저택 안에 들어가 봤냐?”
“아아, 네 그렇죠. 아주 으리으리한 게 황궁이 따로 없던데요.”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 이 자식아.”
황궁이란 말에 남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철썩.
남자의 큼직한 손이 벤의 등을 내려치자 벤이 고통에 진저리쳤다.
“으억! 아파요!”
“골로 가고 싶지 않으면 입조심하라고.”
남자는 으르렁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윽고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남자가 안도하며 벤의 어깨를 다시 툭툭 쳤다.
“그래서 메닝엔 공작저에 들어가 봤다고?”
“윽, 예. 정확히 말하자면 끌려갔는데요.”
“그 여자랑 하녀 얼굴도 봤고?”
“예.”
남자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벤에게 물었다.
“너 못질 그거 때려치우고, 돈 될 만한 일 하나 안 할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 돈이요?”
“어. 제법 짭짤하게 쳐 주마.”
꿀꺽.
벤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무슨…… 일인데요?”
벤의 반응에 남자가 씨익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여자가 지금 레헨트에 와 있다 이거야.”
* * *
다음 날 아침,
‘와.’
라모나는 어제 레헨트의 시장을 한 바퀴 돌고 온 티아의 전리품을 구경하며 감탄했다.
“이건 레몬 마들렌, 이건 레몬 휘낭시에. 그리고 이건 레몬 껍질을 넣어 만든 파운드케이크예요. 아! 이건 레몬 사탕이고요!”
“전부 레몬이네.”
“아무래도 레헨트는 레몬이 유명하니까요. 사실 레몬 커드도 샀는데 너무 맛있어서 다 먹어 버렸어요.”
“으음, 그래? 그건 나도 좀 궁금하다.”
“수도에 올라가기 전에 한 통 더 사올게요. 빵에 발라 먹기 딱 좋더라고요. 아! 요리할 때 쓰기 좋은 레몬 소금도 있었어요.”
“혹시 레헨트 사람들은 다 레몬만 먹고 사니?”
“그럴 리가요! 오렌지도 유명한걸요. 오렌지 주스가 정말 끝내주더라고요.”
레몬과 오렌지만 먹고 사는 사람들. 라모나의 안에서 레헨트의 이미지가 굳혀졌다.
“티아, 어제 굉장히 행복한 하루를 보냈구나.”
“헤헤헤, 이게 다 아가씨가 용돈을 두둑이 챙겨 주신 덕분이죠. 그런데 시장 상인들이 말하기를 이게 축소된 거라고 하더라고요.”
“응? 뭐가?”
“원래는 레몬으로 만든 음식뿐만 아니라 비누며, 오일이며 수제품을 만들어 파는 가게들이 엄청 많았대요! 그런데 지금은 다들 문을 닫았다고 하더라고요.”
“문을 닫았대?”
“예, 이유는 쉬쉬하더라고요. 아쉬웠어요.”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업까지 포기하면서 그 조직 일에 뛰어드는 모양인데…….’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납득이 잘 가지 않았다.
‘사교 시즌이 얼마 남지 않았어, 레헨트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는데.’
빠르게 진상을 조사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일단 벤을 만나 봐야겠다.’
고민하던 라모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아.”
“예? 무슨 일 있으세요, 아가씨?”
“그 레몬커드 말이야. 지금 먹어 보고 싶어서.”
“세상에, 역시 우리 아가씨!”
왜 여기서 역시라는 말이 나오는 걸까.
라모나는 작은 의문에 빠졌다.
* * *
오늘도 이본느가 챙겨 준 레헨트의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라모나가 저택을 나섰다.
오늘은 로베르트가 아닌 티아와 함께였다.
“꺅! 아가씨 이 옷 너무 잘 어울리세요. 완전 마을 최고의 미녀 같아요.”
양쪽 손으로 엄지를 번쩍 치켜드는 티아를 보며 라모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네! 완전 천사! 미의 여신! 제국의 보물!”
이상하게 익숙한 단어들의 향연에 라모나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아무튼, 그들은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고는 시장을 향했다.
전통 의상을 입었다 한들 딱 봐도 귀족 티가 날 텐데, 워낙 휴양지로 유명한 도시이다 보니 상인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대신.
“어머, 거기 예쁜 아가씨.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 봐요. 오늘 아침 갓 구운 마들렌이에요.”
“질 좋은 레몬 소금이요! 피부 미용에 최고입니다!”
“사랑의 묘약 안 필요해요? 이거 하나면 아주 끝장날 텐데? 응? 싸게 줄게.”
돈 냄새를 맡고는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정신이 쏙 빠진 라모나가 어쩔 줄 몰라 하자, 티아가 능숙하게 그들을 헤치고 라모나를 이끌었다.
“네에, 다 샀어요. 어제 다 샀어요. 에이! 아저씨 어제 저 보셨잖아요.”
라모나는 얌전히 티아의 뒤를 졸졸 따랐다.
상인들을 헤치고 나온 티아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라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앗! 아가씨, 사랑의 묘약은 좀 사 갈까요?”
내가 그걸 왜?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하긴, 다 상술이겠죠?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안 산다는 건 아니었지만 라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랑의 묘약을 판다는 상인은 끈질기게 그들의 뒤를 따라붙었다.
“이거, 이거 맛보기로 조금 줄 테니까 써 보고 효과 있으면 찾아와요. 응?”
그가 티아에게 슬그머니 조그만 종이 뭉치를 건네주고 사라졌다.
이렇게까지? 의뭉스러운 상인의 태도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티아도 찝찝한 얼굴로 그 종이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이거 그냥 버리는 게 낫겠죠?”
고개를 끄덕이려던 라모나는 생각을 바꿨다.
“아냐. 챙겨 둬.”
“너무 수상한데요.”
“응, 그래서 나중에 확인해 보게.”
“넵!”
“일단 레몬 커드 집으로 가자.”
‘그리고 또 갈 곳이 있지.’
그곳에 가면 무조건 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라모나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표정이 떠올랐다.
* * *
레헨트의 중앙 광장, 거대 레몬 위.
팟!
“윽.”
못질하던 레몬에서 즙이 튀자 벤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 진짜. 거지 같네.”
벤이 짜증스럽게 옷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이 멍청한 거대 레몬은 아직 절반도 완성되지 않았다. 무려 3일째 못질 중인데도!
‘그냥 거대 레몬 키우는 게 더 빠르겠네.’
벤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한번 생각해 보겠다는 벤의 말에 남자는 혀를 차며 비웃었다.
<그깟 못질해서 돈 얼마나 벌려고 그러냐. 쯧, 멍청한 놈. 돈 벌 기회가 와도 못 잡네.>
그러면서도 남자는 은근히 여지를 남겼다.
<딱 내일까지만 시간을 주마.>
지금이야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가 준 돈이 있어 주머니가 두둑하다지만, 동생의 약값을 대다 보면 금방 사라질 게 뻔했다.
남자는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자세히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귀족 아가씨와 하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니.
물론 돈만 많이 준다면야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저 무리들이 하는 일은 영 꺼려졌다.
노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끌어다가 웬 약초를 말려서 가루로 만드는 일을 시키는데, 이상하게 그 일을 한 사람들은 눈빛이 점점 흐려졌다.
‘잠도 못 자는 것 같던데.’
마치 레헨트 일대가 거대한 약의 소굴이라도 된 것 같달까.
벤은 이러다 자신의 동생들도 그들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었다.
‘근데 그 아가씨는 왜?’
귀족 아가씨를 데려다 일을 시킬 것도 아닐 텐데?
남자의 제안이 영 의아했던 벤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에 잠긴 벤에게 옆 사람이 소리쳤다.
“벤! 너 또 농땡이 부릴 거냐?”
“아, 아니에요. 하고 있어요.”
퍽, 퍽.
다시 레몬을 못질하는 벤의 얼굴에 미처 감추지 못한 찝찝함이 남았다.
심란한 마음으로 대충 못을 두들기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저 점심은 집에서 먹고 올게요.”
“동생들이랑 먹게?”
“예에.”
“하여간 저 자식 착하기는 하다니까.”
동네 아저씨의 말에 피식 웃은 벤이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
“뭐……. 뭐야 이게?”
소박하고 허름한 그의 보금자리는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애니?”
그가 황급히 동생들을 찾기 시작했다.
“얀닉? 사무엘?”
그러나 집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대답해! 애니! 얀닉!”
<딱 내일까지만 시간을 주마.>
불현듯 어젯밤 벤에게 제안하던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젠장, 젠장. 겁에 질린 벤이 미친 듯이 집 안을 뒤집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