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라모나와 로베르트는 생각보다 늦은 시간에 바이스카스텔을 나섰다.
식사할 때만 해도 뉘엿뉘엿 지고 있던 해는 어느새 자취를 감췄고, 깊은 바닷물을 한 아름 떠 놓은 듯한 짙푸른 남색이 하늘을 물들였다.
휘이잉.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라모나의 치맛바람을 흔들었다.
귀한 신분임이 티가 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며, 이본느가 챙겨 준 레헨트의 전통 의상이었다.
라모나는 덩달아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았다.
‘이런 요양이면 제법 괜찮네.’
마음에 좀 여유가 생겨서일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이스카르텔의 식사는 어떠십니까.”
“훌륭했어요. 특히 그 레몬 버터가 들어간 가자미 구이요. 정말 맛있더라고요.”
“그 가자미 요리는 주방장의 자존심이죠.”
“바이스카르텔 주방장의 자존심은 아주 수준이 높네요.”
오랜만에 잔뜩 신이 난 라모나를 바라보는 로베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식전주로 레몬주도 괜찮은데, 다음번에는 한번 내오라고 하죠.”
레몬주라는 말에 라모나의 얼굴에 곤란함이 떠올랐다.
“아, 음…….”
술을 마셨다가 또 푸른빛이 보이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든 탓이었다.
“술은 몸이 괜찮아지면 먹을게요.”
고민 끝에 라모나는 한 번 더 환자가 되기를 택했다.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직도 그녀가 크게 아프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한 얼굴이었다.
이내 그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바람이 찹니다. 걸치시죠.”
그리고 라모나의 어깨에 그 재킷을 둘러 주었다.
“괜찮아요.”
“아니면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라모나는 거절했으나 로베르트가 너무 완강했다.
결국 그녀는 로베르트가 자신의 어깨에 재킷을 얹도록 두었다.
그의 옷에서 풍기는 익숙한 향기에 라모나의 귓불이 살짝 달아올랐다.
뭘까, 이 기분은. 당황한 라모나가 딴청을 부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럴 때면 항상 착각하지 말라거나, 아니면 영광으로 알라는 둥의 화려한 헛소리를 늘어놓을 로베르트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따라 말을 멀쩡하게 하네.’
과묵한 것 같기도 하고?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내 마음이 더 편한 건가?’
타당한 추론이었다.
의아했던 라모나가 그를 바라보자 로베르트는 얌전히 엄지를 치켜들었다.
“건강이 최고입니다.”
좀 다른 방면으로 이상해진 것 같기도 하다. 범상치 않은 예감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그 파란빛이……’
저 자식의 마지막 정신 줄이었나?
‘설마.’
라모나는 그렇게 혼자만의 고민에 빠져들었다.
* * *
잠시 뒤 도착한 레헨트의 빈민가.
떠오르는 지난 생의 기억에 라모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원래는 이런 모습이었구나.’
꾀죄죄한 얼굴의 아이들은 경계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헐렁한 옷 사이로 얼핏 비치는 아이들의 앙상한 팔이 라모나의 가슴을 찔렀다.
‘저렇게 연약한 아이들이 전염병에 걸렸다면…….’
당연히 죽어 나갔겠지. 라모나는 굳은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거리의 풍경은 하나같이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 레헨트의 빈민가는 거친 불길 속에 휩싸여 있었으니까.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로베르트는 뒤를 따르는 호위들에게 집중하라며 눈짓했다.
그러고는 비장한 얼굴로 선언하듯 말했다.
“당신은 오늘 안전하게 바이스카스텔에 돌아갈 것입니다.”
쟤는 또 왜 저래?
순식간에 감정선이 파삭 하고 깨진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그러지 않기를 바라기라도 하세요?”
“그럴 리가요. 저는 항상 당신의 안전을 기원합니다.”
로베르트는 엄지를 또다시 치켜들었다.
“건강도.”
‘감사해요.’
“……진짜 왜 저러지.”
“라모나? 당신 또 생각을 내뱉은 것 같습니다.”
“어머나! 죄송해요.”
화들짝 놀란 라모나의 사과에 로베르트는 뭐가 좋은지 웃음을 터뜨렸다.
깊은 검은 눈이 시원스레 휘어졌다.
‘웃기지도 않는데 왜 웃는 거야.’
얼굴이 훅 달아오르는 기분에 라모나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또다시 어깨에서 은은한 그의 향기가 풍겼다.
라모나의 기억대로 빈민가의 상수도 체계는 엉망이었다. 상수도라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우물 몇 개에 의존하는 형태구나, 지난 생과 같아.’
확실히 누군가 악의를 품고 무슨 짓을 벌이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전염병이 도는 계절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이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도시의 체계를 보완하는 것은 레헨트의 영주인 로베르트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각하.”
“말씀하시죠.”
“레헨트는 직접 관리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영주 대리를 맡은 몰튼 남작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직접 손을 대기엔 아시다시피 제가 맡은 일이 좀 많아서요.”
‘아니요.’로 답할 수 있는 단순한 질문에도 자기 자랑을 끼워 넣다니. 역시 대단한 재주였다.
아무튼 라모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뭐가 좋을까. 어떻게 해야 저 남자를 움직일 수 있을까.’
그사이 로베르트의 날카로운 시선이 골목 사이를 향했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그가 호위들에게 눈짓했다.
이내 로베르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라모나를 불렀다.
“나의 천사?”
“예?”
저도 모르게 대답한 라모나의 얼굴이 구겨지자 로베르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죠.”
바이스카스텔로 돌아가는 길.
그들의 앞에 낮에 보았던 기묘한 조형물이 다시 나타났다.
오늘 하루도 사람들이 열심히 일했는지, 맨 위에 얹어진 커다란 동그라미에 아까 보지 못했던 초록색 이파리가 잔뜩 덮어져 있었다.
그걸 빤히 바라보던 라모나가 말했다.
“사람이 맞나 보네요.”
“사람 말입니까?”
“예, 저 맨 위에 얹어진 이파리가 머리카락 같은데요.”
“흠.”
일리가 있군.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던 로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요.”
“계속 보다 보니 거북이 같기도 해요.”
“거북이도 머리카락이 있습니까?”
“해초?”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두 사람이 시시한 농담을 나누던 때였다.
“아직도 이걸 다 못 팔았어? 죽고 싶어? 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길가에 울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라모나와 로베르트가 황급히 눈빛을 주고받았다.
소란은 점점 커지더니, 이내 퍽, 하고 무언가가 바닥에 던져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라모나가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호위를 보내겠습니다.”
로베르트가 단호하게 그녀를 막아섰다.
험상궂은 목소리의 주인은 다시 고함을 질렀다.
“네놈 때문에 내가 그분들께 깨지게 생겼잖아! 엉? 총알 맛 좀 보고 싶어?”
의미심장한 말에 라모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레헨트의 빈민가, 정치범, 무장.
세 개의 키워드가 한 번에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순간 라모나는 요하네스가 이곳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덜컥 겁을 먹은 그녀가 로베르트의 팔을 꽉 붙들었다.
“빠, 빨리 돌아가요.”
“라모나? 무슨 일입니까.”
당황한 로베르트가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그냥 저택으로 어서…….”
“진정하십시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빨리요!”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치고 말았다.
놀란 로베르트의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라모나는 이성을 되찾았다.
“……아.”
젠장,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 * *
다시 돌아온 바이스카스텔의 침실.
쪼르륵.
로베르트는 라모나에게 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
“……감사해요.”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덕분에요.”
그녀의 짧은 대답에 로베르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털썩, 그녀의 옆에 앉았다.
물 잔을 양손으로 쥔 라모나가 곁눈질로 살짝 그의 안색을 살폈다.
“눈치 보지 마시죠.”
라모나의 시선을 눈치챈 로베르트가 이번엔 자신이 마실 물을 따랐다.
“당신은 제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덧붙였다.
“게다가 몸이 안 좋은 일로 눈치를 줄 만큼 제가 매정한 사람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라모나는 로베르트가 조금 전의 일을 그녀가 몸이 안 좋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나마 다행이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된 라모나가 물을 홀짝였다.
“레몬주라는 게 있댔죠.”
“예.”
“한 잔 마셔 보고 싶은데요. 술의 힘을 조금 빌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나 로베르트는 그녀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됩니다.”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살며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저런 단호한 거절이라니. 심술이 난 그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무해.”
“그래도 안 됩니다.”
“진짜 너무해.”
“뭘 이 정도로 너무하다고 합니까.”
“각하는 항상 저한테 너무하다고 하잖아요.”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가 상체를 돌렸다.
소파 위에 팔꿈치를 기댄 그는 턱을 괴며 라모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돌변한 그의 분위기에 당황한 라모나가 눈을 깜빡였다.
“왜, 왜요.”
피식.
작게 웃은 로베르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속삭였다.
“로베르트.”
“……예?”
“로베르트라고 불러 주시죠.”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짧은 순간,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로 지난 생과 같이 1년 후에 이 남자가 죽게 된다면, 자신은 남은 삶을 절대로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라고.
그것이 죄책감 때문일지, 아니면 얄팍한 의리 때문일지.
혹은 어떤 다른 감정 때문일지는 모를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