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Chapter 8. 레헨트의 네 사람
다음 날.
“흐으으음, 지금이 몇 시야.”
10시가 다 되어서야 라모나는 눈을 떴다.
‘너무 늦게까지 잤네.’
오랜만에 늦잠이었다.
보아하니 티아가 일부러 그녀를 깨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누운 채로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라모나는 몽롱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씨 좋네…….”
“역시 놀러 가기 딱 좋은 날씨 아닙니까?”
“그러네요.”
“오늘 가죠, 레헨트.”
“너무 급하지 않…… 엥?”
당신이 왜 여기 있어?
그제야 로베르트의 목소리에 기겁한 라모나가 황급히 이불을 끌어 올렸다.
“미쳤어요? 여기는 제 침실이에요!”
“이미 자주 들어왔는데 새삼스레 뭘…….”
무언가를 말하려던 로베르트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입을 다물었다.
“아닙니다.”
이내 그는 곤란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건 끝까지 말할 걸 그랬나.”
갑자기 고분고분해진 로베르트의 태도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뭐예요.”
“예?”
“또 무슨 꿍꿍이냐고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당신이 건강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여기서 건강이 왜 나와? 이해할 수 없는 로베르트의 화법에 라모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자는데 어떻게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실 수 있어요? 레헨트는 또 뭐예요? 가지 않기로 했잖아요!”
“보통 5시면 돌아다니시기에 10시까지 주무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레헨트는…….”
잠시 말끝을 흐린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그래도 직접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작 소매치기 소년의 말로 그곳의 정황을 어떻게 파악합니까.”
젠장, 저건 반박할 여지없이 맞는 말이었다.
“……위험할 텐데요.”
“충분한 호위를 준비했습니다.”
“제가 안 가고 싶다면요?”
“그럴 리가.”
그가 특유의 예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물론 저택에 할머님 할아버님과 함께 남고 싶은 거라면야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제법 유익한 시간이겠군요.”
“…….”
그건 좀.
상상만으로도 숨 막히는 풍경에 라모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기왕이면 미남과 함께하는 휴가가 낫지 않겠습니까?”
당당한 로베르트의 태도에 라모나는 대꾸할 의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미남 좋아하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각하는 아닌데요.”
“그럴 리가.”
라모나가 말없이 로베르트를 바라보자, 그는 허리를 숙이고는 라모나의 귀에 속삭였다.
“잠시 수도를 벗어납시다. 우리.”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 분명한데, 라모나는 그를 타박하지 못했다.
귓가에 닿은 숨이 오늘따라 간지러운 탓이었다.
* * *
눈앞에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 그리고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 짜릿한 레몬 향기.
‘와!’
라모나는 여러모로 감탄을 아낄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풍경, 온 천지를 진동하는 레몬의 존재감, 그리고,
“각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로베르트.”
“좋아요. 로베르트,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레이디의 관심은 항상 영광입니다.”
“혹시 할 일 없으세요?”
메닝엔 공작의 시간이 항상 남아도는 것에 대한 의아함이었다.
로베르트는 머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
“아니, 가자고 하자마자 출발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요. 제가 레헨트는 가지 말자고 말씀드렸었잖아요.”
“그럼 레헨트를 위해서라고 하죠.”
“차라리 그쪽이 더 신빙성이 있네요.”
“……진짜 너무하군요. 저를 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시는 겁니까.”
“짜릿하지는 않고요?”
라모나의 되물음에 로베르트가 머쓱해하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제 나를 너무 잘 알아…….”
그렇게까지 구는데 모르면 그게 더 바보 아닌가. 라모나는 코웃음을 삼켰다.
오는 내내, 마차에서 유난을 떠는 로베르트 때문에 부끄러워 혼났다.
그녀가 이마에 손만 올려도 어지러우냐며 마차를 멈춰 세우는 바람에 일정이 어마어마하게 지체됐다.
결국 보다 못한 라모나가 자신은 괜찮다며 이러다 길에서 자게 생겼다고 울부짖고 나서야 마차는 제 속도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남자랑 있으면 매일 소란이 일어난다니까.’
그립다. 평화로운 삶.
라모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항구 도시다운 활기가 가득한 레헨트. 회귀 전, 그녀가 봤던 것과는 영 다른 풍경이었다.
‘뭔가……. 안심이 되네.’
오랜만에 습관처럼 손목을 내려다본 라모나가 피식, 하고 웃었다.
흉터 없는 깨끗한 손목을 확인하고 나서야 라모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샛노란 레몬을 산더미처럼 수레에 싣고 가는 사람들, 물감을 풀어놓은 듯 영롱한 바다.
강렬한 햇볕 탓인지 알록달록한 색상이 온 천지에 가득했다.
그나저나 뭘 하려고 저렇게 레몬을 많이 가져가는 걸까?
‘설마 버리는 건가?’
호기심에 라모나가 힐끔 그쪽을 훔쳐보자, 로베르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느새 그녀의 곁에 다가온 로베르트가 라모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당황한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그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레헨트의 레몬 축제를 설명했다.
“저 레몬으로 뭘 만드는 줄 아십니까?”
“레몬이요? 음, 술? 마들렌?”
“아닙니다.”
“그럼요?”
“거대 레몬을 만듭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라모나가 헛소리하지 말라는 의지를 담은 차가운 눈빛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진짜입니다만?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바라보시죠?”
“좋아서요.”
“아, 제가요?”
“날씨요.”
로베르트의 표정이 또다시 일그러지자 라모나는 속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싱그러운 미소에 로베르트의 얼굴도 덩달아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내 그가 라모나의 모자 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햇볕이 많이 뜨겁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어깨를 감싼 손이며, 훅 다가온 얼굴까지. 오늘따라 유독 로베르트가 가까웠다.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또 귓불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라모나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바보같이 말을 더듬은 걸 보니 역시 날이 더운 게 틀림없었다.
뒤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티아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지만, 다행히도 라모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거대 레몬이 뭔가요?”
“레몬 축제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레몬을 가져다가.”
로베르트가 철사를 엮어 만든 거대한 타원을 가리키며 고갯짓했다.
“못으로 박아 조형물을 만들죠. 그중 제일 유명한 게 거대 레몬입니다.”
“어머, 재밌네요. 근데 그 옆에 저건……?”
무언가를 발견한 라모나의 얼굴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시선을 눈으로 좇은 로베르트의 표정도 덩달아 일그러졌다.
“음?”
동그라미, 그리고 그 아래 굵직한 직사각형과 네 면에 달린 기다란 무언가.
“사람인가?”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완성되면 확실해지겠죠.”
로베르트도 어깨를 으쓱했다.
멀리서, 그런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검은 그림자가 레몬 수레 사이로 후다닥 사라졌다.
* * *
산 중턱에 있는 메닝엔 공작가의 여름 별장, 레헨트의 바이스카스텔.
“어서 오십시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부인이 로베르트와 라모나를 향해 깍듯한 인사를 건넸다.
겉옷을 사용인에게 맡기며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이본느?”
“여부가 있겠습니까.”
“라모나, 이쪽은 바이스카스텔의 시녀장 이본느입니다.”
“만나서 반갑군, 아름다운 저택의 관리인으로서 자부심이 크겠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곳의 가치를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레이디.”
대답과 동시에 이본느가 동그란 안경을 추켜올렸다.
댄버스 부인도 그렇고, 이본느도 그렇고. 메닝엔 공작가의 저택을 관리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할머님의 고용인 취향이려나……?’
유디트를 떠올린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로베르트의 어머니가 공작저 적응에 힘들어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뭐, 어차피 내 이야기는 아니니까.’
자신이 정말 로베르트와 결혼 생활을 하게 될 리도 없지 않은가.
애초에 그럴 생각도 아니었을뿐더러, 로베르트는…….
거기까지 생각한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과거와는 달리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번 생에도 레헨트에는 전염병이 돌 것인지, 그리고 그 각성제라는 게 어느 수준인지.
‘확인부터 해 봐야겠다.’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두워진 그녀의 안색을 눈치챈 로베르트가 말했다.
“오는 길이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이만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도록 하죠. 이본느, 레이디께 침실을 안내해 드리도록.”
“아뇨.”
“……예?”
“짐을 풀고 산책을 좀 하고 싶은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레헨트의 빈민가를 먼저 돌아봐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