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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56화 (57/151)

#56화

라모나의 침실, 애매한 얼굴의 주치의가 그녀를 진찰했다.

“열은 없으시군요. 머리가 아프시다고요?”

“응.”

“다리에도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시고요. 걷기도 어려우실 만큼요.”

“맞아.”

틀린 말은 아니니까. 힘 빠진 라모나의 대답에 공작저의 주치의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로베르트는 심각한 얼굴로 주치의를 재촉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그런 건 아니옵고…….”

주치의의 얼굴을 보며 라모나는 내적 이불 킥을 했다.

‘당연히 할 말이 없겠지. 꾀병이니까.

내가 꾀병을 부리려고 부린 건 아니지만. 라모나가 슬그머니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렸다.

고심 끝에 공작저의 주치의는 진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레이디께서 스트레스가 너무 많이 쌓이신 듯합니다. 조용한 곳곳에서의 요양을 추천드리죠.”

라모나의 상태를 파악해서 내린 진단이라기보다는, 라모나의 소문을 파악해서 내린 진단이었다.

“역시 그건가.”

로베르트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작저의 주치의가 도착했다. 티아도 함께였다.

침대에 누운 라모나를 발견한 티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셨는데……!”

깜짝 놀란 티아를 향해 라모나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일단 최대한 환자다워 보이게.

라모나를 진찰한 아이젠부르크 자작저의 주치의도 공작저의 주치의와 똑같은 얼굴이 되었다.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그가 말끝을 흐렸다.

“보자 보자. 열…… 은 없으신 것 같고, 어이쿠. 이마에 타박상이 있군요.”

“머리가 아파서.”

“예?”

“아, 어지러워서. 비틀거리다 머리를 부딪쳤거든.”

“저런 저런, 어쩌다 그러셨을까나. 흐으음.”

순간 레헨트의 일이 생각난 라모나가 은근슬쩍 주치의를 떠봤다.

“그러고 보니까 요즘 전염병이 돈다던데…… 설마 그건 아니겠지?”

“아이구야, 그건 절대 아닐 겁니다. 아가씨의 증상과는 완전 다른 병입니다. 지금 유행하는 건 가벼운 장염이거든요.”

고민하던 주치의가 라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민망합니다만, 허허, 설사병이요.”

그가 라모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되는 과한 정보였다.

아무튼 긴 고민 끝에 자작저의 주치의도 진단을 내렸다.

“과로가 아니실까 싶습니다. 아니면 음, 스트레스?”

로베르트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역시는 무슨. 라모나는 부끄러운 기분에 이불 사이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 * *

달칵.

한참이나 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라모나는 한숨을 돌렸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야.’

이 얘기 어제도 한 것 같은데. 그녀가 헛웃음을 삼켰다.

로베르트와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마음먹은 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에게 너무 의지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말하자면 한 발자국 떨어진 관계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설령 등을 돌리더라도 그녀의 삶이 망가지지 않도록.

그게 딱 라모나가 원하던 두 사람 사이의 관계였다.

‘물론 위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며칠 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쓰린 착각이 드는 독한 술과 함께했던 밤.

까딱하면 그들의 관계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는 것을 라모나도 알고 있었다.

<라모나? 당신의 그이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느꼈던 감정은 분명 안도였다.

만약 라모나가 잠에 들지 않았다면, 분위기에 휘말려 로베르트와 입이라도 맞췄다면.

‘그럼 입맞춤 정도로 끝나지 않았겠지.’

상상만으로도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왜 벌써 날씨가 이렇게 덥지? 이상하네?”

라모나는 어색하게 손부채질을 했다.

그래도 위기를 무사히 넘겼고, 나름대로 잘 진행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진짜 종잡을 수가 없네.’

요즘 들어 부쩍 달라진 로베르트의 태도가 눈에 밟혔다.

자꾸 2황자를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굴지를 않나. 어제는 또 왜 그런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건지.

“무슨 걱정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옆에서 화병을 정리하던 티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

“아, 아냐. 티아. 그냥 혼잣말이었어.”

“많이 아프신 건 아니죠?”

“응, 괜찮아. 네가 항상 고생이 많네.”

라모나의 말에 티아가 미소 지었다.

“아가씨.”

“응?”

“저번에 갑자기 신문 찾던 날 아침 생각나세요?”

티아의 이야기에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

라모나가 회귀한 그날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기억하지.”

“그날 저는 진짜 아가씨가 어떻게 된 줄 알았거든요? 얼굴도 너무 창백하시고, 손도 막, 이렇게, 툭! 하고 떨어져서요.”

“……그랬나.”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제 말은 아가씨가 건강하시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예요. 주치의를 찾으러 뛰어다니는 것보다, 아가씨가 혼자 끙끙 앓고 계시는 걸 보는 게 더 고생인걸요.”

“티아…… 정말 감동이야.”

감격한 라모나의 얼굴에 티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다 아가씨가 제게 너무 잘해 주셔서 그런 거라니까요! 이상하게 그날 이후로 아가씨가 저에게 더 잘해 주시는 거 있죠?”

티아의 이야기에 뜨끔한 라모나가 웃음으로 대답을 무마했다.

죽었다고 생각한 티아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이전보다 더 잘해 줬던 것은 사실이니까.

티아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부모님이나, 레이먼. 그리고 로베르트.

‘아냐, 그 남자는…….’

원래는 아무 교류도 없기는 했다. 워낙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기도 했고.

또다시 로베르트의 죽음을 떠올린 라모나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일단 지금 도는 전염병이 단순한 장염이라면, 확실히 레헨트의 전염병만 막으면 될 것 같지? 약초는…… 그건 상황을 더 파악해 봐야겠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이불을 끌어 올렸다.

오늘의 난리를 보니 적어도 내일까지는 침대에 누워 환자 행세를 해야 할 듯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휴식을 제대로 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라모나는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미카엘라의 일이나, 푸른빛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였다.

* * *

두 명의 주치의가 불려 오는, 그리고 그 둘이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소란이 있었지만, 그래도 메닝엔 공작저는 금방 평화를 되찾았다.

“크게 아픈 것은 아니라니 다행이야.”

안도한 유디트가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클레멘스 또한 묵묵히 그녀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단 한 사람, 로베르트 메닝엔을 제외하고는.

저택의 불이 모두 꺼진 늦은 밤. 그는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아플 때까지 고민하고 있었을 줄이야.’

나무에 머리를 박던 라모나의 모습을 떠올리니 또다시 목덜미가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로베르트야 최악의 상황에도 아이젠부르크의 기반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 줄 힘이 있었지만, 라모나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그녀가 로베르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을 감정 문제 정도로 가볍게 치부하면 안 됐다.

그건 그녀가 짊어진 무거운 짐이었다.

‘정말이지 멍청하군.’

자괴감에 로베르트가 머리를 쓸었다.

그는 습관처럼 당장에라도 벤트하임을 곤란하게 할 여러 방법을 떠올렸지만 전부 생각일 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라모나가 원하지 않아.’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서 비롯됐다.

편하고 빠른 길을 가려다 보니 그녀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후.”

한숨을 내쉰 로베르트가 습관처럼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일단 며칠이라도 수도를 좀 벗어나는 게 좋겠어. 그럼 스트레스도 좀 풀릴 테지.’

어느새 그녀에 대한 의심이 사라졌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속이 상했다. 아니 속이 쓰렸다.

누가 가슴을 콕콕 바늘로 쑤시다 못해 너덜너덜하게 찢는 기분이었다.

그는 라모나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어렴풋이 자각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녀를 볼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로베르트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였다.

“……응?”

갑자기 그의 손목에서 푸른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했지?’

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의아했던 로베르트가 푸른빛이 떠올랐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차라리 그때 입을 맞춰 버렸으면 더 확실해졌…….>

이건 아니고,

<앞으로도 그렇게 뺨이라도 내리치십시오. 어디 가서 지지 말고.>

이것도 아니고,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보던 그의 머릿속에 벼락같이 한마디가 떠올랐다.

<당신이 아픈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 탓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할 말을 잃어버린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한참 만에 욕설을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또다시 푸른빛의 마법이 이루어졌다.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로베르트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이건, 너무…….’

너무 위험한 능력인 것 같다고.

그가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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