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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55화 (56/151)

#55화

저녁 식사 후, 로베르트는 오랜만에 자신의 침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오늘 낮, 댄버스 부인이 데려온 하녀는 말했다.

<그…… 알폰조 전하께서 레이디께 마음이 있으신 것 같다고…… 아! 레이디께서 황자 전하께 마음이 있으신 것은 절대, 절대 아니고요!>

그건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분노한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뭐에 분노한지도 잘 모른 채였다.

그러나 응접실 앞에 다다랐을 때.

<아, 누님 근데 그건 뭐야?>

<응? 뭐가?>

<사령관님이랑 연인이라는 소문이 돌던데?>

또다시 알폰조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무언가가 뚝, 하고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는 바로 로베르트의 이성이었다.

왜 자꾸 그 근육 바보의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자신을 두고, 잘난 거라고는 그 비열한 혈통과 조금 두꺼운 몸뿐인 2황자를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분노한 그는 그 즉시 문을 두드렸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라모나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유치했나 싶었던 로베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그는 대수롭지 않게 코웃음을 쳤다.

‘흠, 뭐.’

그러게 누가 ‘내’ 집에서 감히 ‘내’ 약혼녀에게 2황자 이야기를 입에 담으라 했나.

안 그래도 라모나가 아이젠부르크의 영지 문제를 도움받지 않는 것이 영 마음에 불편하게 남던 찰나였다.

아주 끝내주는 해결책을 마련해 두었는데.

“뭐,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떠밀 수는 없으니.”

아쉽군. 한숨을 내쉰 그가 창가를 바라보았다.

“음?”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정원을 하염없이 서성이는 라모나였다.

역시 내색은 안 했지만 영지 문제를 마음에 두고 있던 것일까?

쯧, 안타까운 마음에 로베르트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정원에 나가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그가 겉옷을 걸쳤다. 그리고 다시 힐끔,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뭐야.”

라모나는 머리를 움켜쥔 채로 나무에 이마를 박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괴로워한다고? 패닉에 빠진 로베르트가 황급히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 * *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저녁 식사가 끝나고, 라모나는 자작저로 돌아가는 레이먼을 배웅했다.

“잘 가, 레이먼.”

레이먼을 태운 마차가 사라지기 무섭게 라모나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체면이고 뭐고,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고 쪼그려 앉았다.

“아, 아, 아가씨?”

당황한 티아가 라모나를 불렀지만 라모나의 귓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진짜 미친 거 아냐? 정말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니라고?”

“주, 주치의를 좀 불러 드릴까요?”

“……어.”

“예, 예?”

“불러 줘, 주치의.”

라모나의 대답에 티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주먹을 불끈 쥔 티아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욧!”

대답과 동시에 그녀가 세렝게티 초원의 치타처럼 재빠르게 달려 나갔다.

티아가 바람과 같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라모나는 양손 사이로 고개를 푹 파묻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상하게 로베르트를 만나고 난 다음부터 자주 하게 된 말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진지하게 고민하던 라모나는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미쳐 버린 게 아닐까?’

‘그런 원인이라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라.’까지 생각한 라모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행이기는 뭐가 다행이야…….”

내가 미쳤으면 그게 제일 문제지. 긴 한숨을 내쉰 그녀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헛것이 아니었어! 술기운에 잘못 본 게 아니었다고.’

답답했던 라모나는 벌떡 일어나 발을 동동 굴렀다. 머리카락은 아직 움켜쥔 채였다.

‘죽은 영혼의 흔적 같은 걸 수도 있어. 사실 내가 한번 죽으면서 내 영혼의 성질이 바뀐 거지. 잠깐만, 이런 내용의 소설 예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멘탈이 무너져 버린 라모나가 하염없이 정원을 돌아다녔다.

미카엘라의 이야기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는 나름대로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는 마당에 까짓 빛 하나 손목에 나타난다고 큰일 날까, 생각하면서.

하지만.

“아니면 설마…… 꿈인가?”

도무지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었던 라모나가 정원 나무에 살짝 이마를 박아 보았다.

콩.

“윽.”

아픈 걸 보니까 꿈은 아닌데. 라모나가 울상이 되어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가 조금 더 세게 나무에 이마를 박아 보았다.

쿵.

“어흑. 너무 아픈데.”

진짜 꿈은 아닌가 봐. 라모나가 벌게진 이마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녀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애꿎은 돌멩이를 발로 툭 걷어차던 때였다.

“……라모나?”

헐레벌떡 뛰어온 듯 흐트러진 차림새의 로베르트가 숨을 헉헉대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 일도 아니, 꺅!”

당황한 라모나가 뒷걸음질 치다 또다시 나무에 머리를 콩, 하고 박았다.

로베르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그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라모나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럼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얼굴로 정원을 돌아다니고……. 또 머리를…….”

무슨 착각을 한 건지 로베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카엘라 벤트하임이군요.”

“진짜 그런 게 아니라…….”

라모나가 그를 진정시키려던 때였다.

“레이디!”

평소와는 달리 다급해 보이는 얼굴을 한 댄버스 부인이 달려왔다.

“티아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두통이 있으시다고요.”

댄버스 부인은 재빨리 라모나의 어깨에 이불만큼이나 커다란 숄을 둘러 주었다.

이건 또 뭐야. 숄에 칭칭 감긴 라모나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거세게 흔들렸다.

“그…… 게 결과적으로는 맞긴 한데…….”

“이마가 붉습니다. 열이 나는 모양입니다. 혹시 다른 증상도 있으신지요?”

“아니, 정말 나는 괜찮은데…….”

“일단 티아가 아이젠부르크 자작저의 주치의를 부르러 갔습니다만. 공작저의 주치의도 불러 두었습니다.”

두 명이나요? 라모나는 갑자기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로베르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많이 아픕니까? 말도 하기 어려울 만큼?”

저 지금 계속 말하고 있는데요. 라모나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음, 그 정도는 아니고 약간 몸살…….”

까지 라모나가 말했을 때.

“무슨 일이야. 많이 안 좋은 것이냐?”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인 유디트가 나타났다.

심지어 유디트의 뒤로 클레멘스가 따라오고 있었다.

신이시여. 왜 오늘 저를 두 번이나 죽이려 하시나요.

‘정말…… 정말 끔찍한 하루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진짜 환자가 되는 수밖에.

라모나는 체념하듯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네, 머리가 너무 아프네요.”

잠시 후, 라모나는 로베르트의 품에 무려 공주님 안기로 안겨 공작저로 실려 갔다.

댄버스 부인이 가져온 이불 같은 숄에 꽁꽁 싸인 채였다.

‘……인생.’

차마 사용인들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던 라모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 * *

아이젠부르크 자작저. 영지 문제로 거래처에게 하루 종일 정신없이 시달리느라 다크 서클이 광대까지 내려온 자작이 레이먼을 붙들었다.

“그래 공작저에서는 어땠냐, 라모나는 잘 지내고?”

머리를 긁적긁적 긁은 레이먼이 메닝엔 공작저에서의 일을 회상했다.

‘흠. 소문이 맞기는 맞지.’

그가 알폰조 이야기로 로베르트를 살살 자극했던 일은 굳이 아버지에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레이먼은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누님은 행복해 보였어요.”

아들의 대답에 자작의 얼굴에 의심이 떠올랐다.

“……라모나가 정말 행복해 보였다고?”

아이젠부르크 자작은 곤란한 듯 신음을 흘렸다.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던 자작이 물었다.

“흐음, 네가 보기엔 어땠냐. 레이먼.”

“예? 뭐가요?”

“그 두 사람 말이다. 정말 서로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이더냐?”

“음.”

레이먼은 다시 공작저에서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다정하게 이름도 부르고, 아이 이야기도 나누는 것 같았지? 음식도 입에 넣어 주고.’

그런 라모나의 모습은 정말이지 생전 처음 봤다.

‘뭐, 그럼 진짜 사랑하나 보다.’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 레이먼이 또다시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예.”

“정말? 이상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고?”

“계획이요? 아. 자녀 계획도 벌써 끝냈던데요.”

자녀 계획이라는 말에 아이젠부르크 자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 너에게 라모나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예, 각하랑 같이요. 선대 공작 각하와 부인도 같이 들으셨는데요?”

“……신이시여.”

아이젠부르크 자작이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레이먼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걱정을 많이 하긴 했는데, 둘이 워낙 사이가 좋더라고요. 전 그래도 사령관님을 응원하긴 하지만…….”

“2황자 전하 이야기 말이냐? 그건 헛소문 아니었나?”

“음, 근데 각하가 유독 사령관님을 견제하는 걸 보면 뭔가 있는 것 같던데요.”

“신이시여, 제발.”

레이먼의 입에서 파격적으로 재구성 된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은 자작이 스르르 허물어졌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레이먼은 그의 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때, 티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아이젠부르크 자작저를 울렸다.

“마님! 흐어억, 마님!”

“……티아?”

레이먼이 고개를 갸웃했다.

“허억, 주치의, 주치의 좀 불러 주세요!”

이내 이어진 티아의 말에 레이먼과 아이젠부르크 자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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