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날 저녁, 메닝엔 공작저의 다이닝룸.
“하, 하, 하.”
라모나는 영혼 없는 웃음을 연신 남발하고 있었다.
레이먼의 방문 소식을 들은 유디트는 귀한 손님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다며 레이먼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거였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의 클레멘스와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유디트. 이상하게 시무룩한 로베르트.
거기다가 뭔가 굳게 다짐한 듯한 레이먼까지.
아주 수상하기 짝이 없는 구성원이 둘러앉은 식탁.
미치겠네. 라모나는 생각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오셀튼 백작저의 티파티를 한 번 더 가는 게 낫겠다.’
그래, 그쪽이 훨씬 편할 것 같았다.
이내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예술품이라 할 만큼 섬세하게 조각된 당근이며, 흠잡을 데 없이 반질거리는 식기까지.
그래도 레이먼을 손님으로 인정하는 모양새에 라모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방장이 힘 좀 썼나 보네.’
오늘 주방에서 벌어진 소동을 알 리 없는 그녀로서는 당연한 추측이었다.
레이먼은 다행히도 제법 의젓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메닝엔 공작 각하, 그리고 공작 부인.”
“반갑네, 아이젠부르크 영식. 서부 군에 있다고 했던가?”
“예, 아이티아르에서 복무 중입니다.”
“훌륭한 일을 하고 있군.”
“과찬이십니다.”
레이먼을 향한 클레멘스의 칭찬과 함께 예상보다는 화기애애한 식사가 시작됐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아니, 시작될 뻔했다.
아까부터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로베르트의 훼방에 클레멘스가 눈썹을 까딱했다.
“로베르트?”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니까요. 서부 경계라 해서 ‘특별히’ 훌륭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로베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얘는 또 왜 이래?’
왜 서부 경계라는 말에 이렇게 과민 반응하는 걸까? 이상한 낌새에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라모나와 눈이 마주친 레이먼도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무언가를 눈치챈 레이먼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각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특히 서부 경계는 워낙 훌륭한 지휘관 하에 근무를 하기 때문에, 사실 크게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알폰조를 칭찬하는 레이먼의 말에 로베르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상관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니 아이젠부르크 영식은 훌륭한 군인이로군.”
“워낙 높이 평가받으실 만한 분이니까요. 좋은 분이십니다. 남자로서도요.”
파지직.
불꽃 튀는 두 사람의 신경전이 팽팽했다.
알폰조의 이야기가 계속 오가자 불편해진 라모나가 눈을 깜빡였다.
유디트는 우아하게 나이프로 고기를 썰며 화제를 전환했다.
“이런 이야기 자주 들었을 것 같긴 하다만,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와 아이젠부르크 영식이 참 많이 닮았어.”
라모나의 이야기에 레이먼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하하하,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아직 어린 사촌 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까지 셋이 함께 다닐 때면 모두들 정말 닮았다며 감탄하곤 했죠.”
“오, 그런가? 이 늙은이도 궁금한 광경이군.”
“아마 사교 시즌이 되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이젠부르크 자작저에 머무를 예정이거든요.”
“데뷔탕트를 치를 나이인가 보지?”
“아닙니다. 에밀리아라고, 이제 7살에 불과한 꼬마 레이디죠. 하지만 그 누구보다 예법에 능통한 레이디일 것이라 자부합니다.”
에밀리아의 이야기에 라모나의 입가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세상에나, 귀엽기도 하지.”
유디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꼬마 레이디를 공작저에도 초대해야겠구나. 그런 훌륭한 레이디는 꼭 한번 만나 봐야지.”
“에밀리아가 들으면 무척 기뻐할 소식이네요.”
라모나도 빙긋 웃었다.
라모나의 걱정과는 달리, 레이먼은 제법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마냥 애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제법 컸구나.’
로베르트가 자신의 무릎을 톡톡 두드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라모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라모나의 관심을 받지 못한 로베르트는 이내 요란하게 헛기침을 시작했다.
“흠흠.”
그제야 라모나가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속삭였다.
“또 왜요.”
“그냥 기침했을 뿐입니다.”
“거짓말. 이상한 말 하면 용서 안 해요.”
“오,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이상한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실례지만 혹시 아직 안 태어나셨나요?”
“맙소사, 오늘 제게 너무 매몰차신 것 아닙니까? 정말이지 속상합니다.”
속닥거리는 그들을 발견한 유디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따라 보기 좋구나.”
아차, 당황한 라모나가 눈을 깜빡였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한창 좋을 때지.”
이게 좋을 때면 나쁠 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죠. 라모나는 생각은 생각으로만 접어 두고 입꼬리를 기계처럼 끌어 올렸다.
그때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할머님.”
그의 입가에 유독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에 라모나가 얼른 물 잔을 들었다.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로베르트의 입에서 또다시 재앙 같은 말이 나오는 순간.
“잠시 자녀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그만.”
“풉.”
그건 굉장히 나쁜 선택이 되고 말았다.
“콜록, 콜록.”
사례 들린 라모나가 기침을 계속하자 로베르트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입을 틀어막은 라모나가 로베르트를 향해 눈빛으로 욕을 날렸다.
‘미쳤어요?’
자녀 계획이라니! 어떻게 그런 낯 뜨거운 말을!
그녀가 사납게 눈을 치켜떴으나, 로베르트는 오히려 안쓰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 내 사랑. 아까부터 피곤해 보이더라니 감기 기운이 있는 건 아닙니까? 쉬러 갈까요?”
“괘, 콜록, 괜찮아요.”
쉬러 가기는 무슨. 라모나는 불난 데 부채질을 하는 로베르트의 허벅지를 몰래 꼬집었다.
자녀 계획이라는 말에 고장 난 레이먼은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삐걱거리는 턱으로 중얼거렸다.
“누…… 님……?”
“아냐, 레이먼! 그런, 콜록 그런 거 아냐.”
평소에 로베르트가 자신에게 헛소리하는 것도 충분히 부끄러웠는데, 가족 앞에서 헛소리하니 두 배로 부끄러웠다.
게다가 대놓고 흐뭇해하는 유디트의 얼굴은 또 뭐란 말인가.
라모나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다행히 그 덕에 기침은 멎었다.
“호, 호. 로베르트.”
쾅쾅.
그녀가 분노를 담아 로베르트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건 너무 이른 이야기잖아요. 당황했어요.”
“내 사랑, 당신과 함께하는 날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이르지 않습니다. 특히나 자녀 계획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중요하니까요.”
이 자식이.
“으음? 그래도 우리 그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할까요?”
“아, 단둘이 있을 때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그가 은근한 눈빛으로 윙크를 날렸다.
‘돌았나 봐, 진짜.’
쉬지 않고 신나게 입을 놀리는 것을 보니 그냥 저 주둥이를 막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라모나는 이를 악물고 그의 입에 아스파라거스를 쑤셔 넣었다.
“오늘따라 아스파라거스가 참 맛있네요, 그렇죠?”
“라모나, 잠깐. 잠깐만요. 이제 충분 합…….”
“많이 먹어요. 몸에 좋은 거니까. 오래오래 츤츤흐.”
될 수 있으면 평생 먹도록 해요. 억지로 끌어 올린 라모나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누님?”
사정을 모르는 레이먼은 이제 아예 포크를 내려놓고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가 당혹스러운 듯 입을 틀어막고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진짜 사랑인가?”
아니야, 레이먼. 그거 아니야. 너 크게 오해 중이란다.
‘미치겠어, 정말.’
울고 싶은 기분이 된 라모나는 로베르트의 입에 더 쑤셔 넣으려고 준비 중이던 아스파라거스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때.
‘응? 이건……?’
그녀는 지난번, 술김에 본 헛것이라 생각한 푸른빛이 자신의 손목을 감도는 것을 발견했다.
라모나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그때 본 게 헛것이 아니었어?’
아니면 설마 오늘 술에 뭐가 들어갔나? 진짜 약을 탔나?
순식간에 그녀의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설마 로베르트가 그녀를 독살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아니면 혹시 공작저의 누군가가 로베르트를 독살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그도 아니면 메닝엔의 재산을 노리는 사용인이 몰래 약을 타고 도둑질이라도 하려는 건 아닌…….
‘정신 차려, 라모나.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애써 침착하게 제정신을 되찾은 라모나의 시선이 푸른빛을 좇았다.
가늘고 길게 이어진 푸른빛이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맙소사!’
로베르트의 손목이었다.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당황한 그녀가 중얼거렸다.
“……로베르트?”
“내 사랑? 무슨 일입니까?”
로베르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본능에 가까운 거짓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