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공작저의 응접실.
“누님!”
오랜만에 보는 라모나의 모습에 레이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령관인 알폰조를 따라 짧게 깎은 갈색 머리, 단단한 심지가 담긴 곧은 눈동자.
라모나가 기억하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오랜만이야, 레이먼.”
이렇게 레이먼을 다시 만나게 되다니. 지난 생, 레이먼이 실종되고 난 후 얼마나 그리던 광경인지 모른다.
라모나는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삼켰다.
그 인사의 무게를 짐작하지 못한 레이먼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울어. 누님 혹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목이 멘 라모나가 애써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늘 워낙 소란스러운 하루잖아.”
그녀의 대답에 레이먼의 얼굴에 안쓰러워하는 기색이 맴돌았다.
“하여간 그 여자 전부터 맘에 안 들었어. 맨날 누님을 이용하기나 하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데도 누님은…… 아차, 미안.”
말해 놓고도 머쓱한지 레이먼이 머리를 긁었다.
“누님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걸 텐데. 내가 말실수를 했네.”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라모나가 덧붙였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았지.”
그녀의 자책에 레이먼은 화들짝 놀랐다.
“누님!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그런 말을 해? 메닝엔 공작이 그랬어?”
응? 여기서 왜 그 남자 이름이 나와? 당황한 라모나가 말을 더듬었다.
“각, 로베르트가……? 왜?”
그녀의 말에 레이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입을 틀어막은 레이먼이 상처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으응?”
“누님, 지금 그 남자 이름을 부른 거야? 그렇게 다정하게?”
“다, 다정했나?”
“말도 안 돼…….”
레이먼의 반응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지 라모나가 어색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 잠깐만. 잠깐만.’
회귀 전 라모나가 보았던 레이먼은 스물세 살, 하지만 지금은 7년 전.
그러니까……
‘맙소사, 열여섯 살이라고?’
경악한 라모나가 레이먼이 그랬듯 입을 틀어막았다.
레이먼을 다시 만났다는 기쁨에 잠시 잊었다. 이 나이 때 레이먼은 그야말로 철부지였다는 사실을.
가족 간의 깊은 대화와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갈 끈끈한 협동심에 대한 기대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후, 누님이 무사한 걸 보니까 안심이 된다. 많이 걱정했어.”
그래도 풀 죽은 얼굴로 안도하는 레이먼을 보니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다.
라모나가 다정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토닥였다.
“미안,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네.”
“미안하다는 말 그만해. 다 누님 탓도 아닌 일이잖아.”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레이먼은 이내 억울한 듯 속삭였다.
“근데 누님, 왜 그렇게 재수 없는 남자에게 넘어간 거야. 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건 사실이긴 했다. 라모나는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로베르트가 별로라 말하지 않는 그녀의 반응이 답답했는지 레이먼이 투덜거렸다.
“편지는 또 어떻게 된 건데. 설마 메닝엔 공작이 빼돌린 거야? 응?”
“음, 그건 아닌 것 같아. 아마도…….”
‘일단 요하네스의 이야기는 레이먼에게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말끝을 흐린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미카엘라?”
“젠장, 어쩐지 벤트하임 끄나풀이 자꾸 내 근처를 맴돌더라니.”
레이먼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냥 확 목검으로 두드려 패 버릴걸.”
혈기왕성한 동생의 모습에 라모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아, 진짜 이를 어쩌면 좋아.’
어엿한 성인 남성 로베르트와 함께 있다가 온 상황이라 그런지 레이먼이 더 철부지처럼 느껴졌다.
‘가만, 따지고 보면 둘이 정신 연령은 비슷해 보이는데.’
그럼 뭐 별다를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편지에 중요한 내용은 없었지?”
“응, 그냥 안부 인사였어. 그…….”
레이먼이 머쓱한지 머리를 긁었다.
“메닝엔 공작 욕을 조금 곁들인?”
“……그건 별문제 없겠다.”
“근데 왜 미카엘라 벤트하임이 누님의 편지를 빼돌린 건데?”
“사연이 좀 있어. 나중에 얘기해 줄게.”
라모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개를 갸웃한 레이먼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근데 누님……. 좀…….”
“응?”
“변한 것 같아.”
정곡을 찌르는 레이먼의 말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얼른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 하. 사랑에 빠져서 그런가?”
“아니, 이걸 뭐라고 하지.”
심각한 얼굴의 레이먼이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데.”
당황한 라모나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사이 레이먼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역시 휴가를 좀 자주 쓸 걸 그랬네. 아무튼 누님이 무사하니 다행이야. 걱정 많이 했어.”
꿀꺽.
긴장한 나머지 고인 침을 삼킨 라모나가 뻣뻣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레이먼.”
“나한테 사과할 일은 아니지. 설마 누가 편지를 빼돌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걸.”
“그래도 2황자 전하가 전해 주신 편지는 받았어. 답장을 부탁드리려던 차였는데, 네가 먼저 휴가 나왔네.”
“좋은 분이시지. 아, 누님. 근데 그건 뭐야?”
“응? 뭐가?”
“사령관님이랑 연인이라는 소문이 돌던데?”
알폰조의 이야기를 입에 담는 레이먼의 눈이 빛났다.
“아아, 그건…….”
알폰조의 이야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누군가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설마?’
범상치 않은 예감에 라모나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라모나? 나의 천사?”
애정이 듬뿍 담긴 로베르트의 목소리에 레이먼이 얼굴을 잔뜩 구겼다.
“천사?”
“오, 안 돼.”
얼굴이 하얗게 질린 라모나가 응접실 문 쪽으로 달려가려던 그때였다.
“내 사랑? 제국의 보물?”
유난히도 달콤한, 그리고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윽.”
다 구겨진 줄 알았던 레이먼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제발, 각하. 가족 앞에서 수치사하고 싶지는 않아요. 제발! 라모나가 황급히 대답했다.
“각, 로베르트?”
달칵.
대답과 동시에 응접실 문이 열렸다.
“내 사랑.”
로베르트의 얼굴에 눈부시게 예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신의 그이입니다.”
이 자리에서 그냥 죽어 버리고 싶다. 아니면 죽여 버리고 싶다.
라모나가 입술을 꽉 깨문 채 그를 노려보았지만, 로베르트는 굴하지 않았다.
“당신을 한시라도 못 보면 눈에 가시가 돋을 것 같아서.”
눈물점이 콕 박힌 눈이 야릇하게 휘어졌다.
“와…… 장난 아니다.”
뒤에서 감탄하는 레이먼의 목소리가 라모나를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게 만들었다.
* * *
슈타이덴 백작저.
마찬가지로 아이젠부르크의 소식을 전해 들은 레이디 슈타이덴이 미간을 찌푸렸다.
“미쳤네.”
그녀는 간단한 한 마디로 소식을 정리했다.
“벤트하임다운 결정이기도 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소파에 앉은 알폰조에게 레이디 슈타이덴이 물었다.
“이럴 줄 알고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초대해 달라 한 거니, 아들?”
그녀는 화려한 외모만큼이나 화려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타이트하게 몸에 붙는 원피스, 그리고 어깨에 두른 검은 곰의 털로 만든 숄.
그런 그녀의 목에 차림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로켓 목걸이가 달랑거렸다.
알폰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없는 아들의 반응에 혀를 끌끌 찬 레이디 슈타이덴이 와인 잔을 들었다.
“흐으음?”
와인보다 더 짙은 검붉은 빛으로 칠한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제국의 대부호 슈타이덴 백작의 딸. 레이디 슈타이덴은 매사에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술김에 황제와 하룻밤을 보내고 알폰조를 가지긴 했지만, 딱 그것뿐.
그녀는 누군가의 허울뿐인 아내가 되어 황제의 정부로 남는 것을 거부한 채 슈타이덴의 딸로 살기를 선택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아무튼 그녀는 아들을 황태자로 만드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대신.
“드디어 내 아들이 화려한 치정극의 주인공이 되는 건가?”
아들의 연애사에는 관심이 아주 많았다.
“그것도 마리안느의 아들이라니. 설마 네가 그 재수 없는 자식과 연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
건수를 잡은 레이디 슈타이덴의 붉은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불길함을 감지한 알폰조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흠?”
그녀가 전혀 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는 왜 불러 달라 한 건데?”
“그건…… 사유가 있습니다.”
“어머, 뜨거운 사유?”
“어머니!”
질색하는 알폰조를 보며 레이디 슈타이덴이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왜, 이 김에 로베르트 그 자식, 아니 메닝엔 공작을 한번 이겨 보지 그래? 그 빌어먹을 근육을 키운 보람은 있어야지.”
그녀의 말에 알폰조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 어머니. 제발.”
“흐응, 그런데 뻥 차여서 어쩐다아.”
짓궂은 레이디 슈타이덴의 말에 알폰조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요 며칠간 잠을 설친 탓에 눈에는 실핏줄이 올라온 채였다.
그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응?”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뭐가?”
“영지 몰수 말입니다.”
피식.
레이디 슈타이덴이 비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지. 당장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실지 의문이고.”
하지만 황태자 요하네스가 벤트하임의 뒤에 있는 이상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녀도 그것을 알기에 아이젠부르크와 거래하던 것들을 잠정 중단시켜 두고 오는 길이었다.
“그 자식들이 이번엔 무슨 속셈인지…….”
“어머니.”
“응?”
오늘따라 유독 무거운 알폰조의 목소리에 레이디 슈타이덴이 고개를 갸웃했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알폰조가 주먹을 꽉 쥐었다.
“만약 어머니의 시간이 되돌아간다면 무엇을 하실 것 같습니까.”
“세상에, 너 꿈꿨니?”
레이디 슈타이덴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웃음을 그친 그녀가 습관처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화려한 차림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로켓 목걸이였다.
“글쎄…… 시간이 되돌아간다, 라…….”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럼 역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마리안느와 메닝엔 공작의 결혼을 막을 것 같은데…….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거든.”
과거의 기억에 레이디 슈타이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