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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52화 (53/151)

#52화

“가, 각하?”

영문 모를 로베르트의 분노에 에드윈이 당황했다. 열심히 사유를 짐작해 보던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다음에는 오셀튼 백작저의 하인을 포섭하지 않겠습니다?”

로베르트는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드윈.”

“예?”

“요즘 좀 멍청해진 것 같은데. 책이라도 좀 읽어 보는 게 어때.”

에드윈이 입을 쩍 벌리고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제가 각하를 위해 지금 어떤 일까지 벌이고 있는데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로베르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옷소매를 걷었다. 그리고 손목에 대고 속삭였다.

“……나를 찾아온다?”

뭐야. 에드윈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각하?”

“아닌가? 그럼 나와 저녁을 먹는다?”

“각하? 제게 저녁 식사 의향을 물어보시는 거라면 저야 물론 환영입니다만.”

“이것도 아니야? 그럼 대체 뭐지?”

쉴 새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로베르트를 보며 에드윈은 로지나의 말을 떠올렸다.

<각하는 원래 이상해.>

로지나, 사랑하지 않는 내 동생. 아무래도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에드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이후로도 한참을 뭐라 뭐라 혼자 중얼거리던 로베르트는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영지 몰수라…….”

“조치를 좀 취해 둘까요?”

“됐어. 필요한 게 있다면 아이젠부르크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오겠지.”

“뭐, 그렇긴 합니다. 아 참. 각하, 레헨트의 일 말입니다.”

에드윈이 최근 알아낸 일에 대해 로베르트에게 보고하려던 그때였다.

똑똑.

“각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문밖에서 들려온 라모나의 목소리에 화색이 된 로베르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윈.”

“예?”

“나가.”

아니, 난 진짜 너무 속상하다니까? 에드윈이 입술을 있는 힘껏 삐죽였다.

* * *

메닝엔 공작저의 부엌, 하녀들은 신나게 버터를 만들고 있었다.

하룻밤 동안 재워 둔 우유의 윗부분만 떠서 버터를 만드는 나무통에 넣고, 버터 덩어리가 뭉쳐질 때까지 빙글빙글 돌려 주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다만 이 간단한 작업에는 많은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하녀들은 버터를 만들면서 실컷 수다를 떨곤 했다.

“너 그거 들었어?”

“뭐?”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라모나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부엌 하녀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왜? 왜?”

“아니, 내가 저번에 레이디의 하녀에게 직접 들은 건데.”

주변을 둘러본 하녀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2황자 전하가 레이디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나 봐.”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버터 기계를 돌리던 하녀의 손이 멈췄다.

“대박!”

“야, 너 은근슬쩍 요령 피운다?”

“……들켰네.”

“빨리 돌려라.”

“아, 알겠어.”

멈췄던 버터 기계가 다시 돌아가며 하녀들의 수다도 계속됐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은 댄버스 부인이 허브 버터도 만들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건 네가 해. 아무튼 2황자 전하 이야기는 뭔데? 응?”

“2황자 전하가 레이디를 보는 눈빛이 막 이렇게, 이렇게 화르륵 타오른다던데.”

“크으, 청춘이다.”

“그뿐만이 아냐, 걔가 각하도 분발하셔야 할 것 같다고 말끝을 흐렸어!”

“세상에, 그럼 레이디께서도 설마 2황자 전하에게 마음이…….”

신나게 맞장구를 치던 하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친구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수다쟁이 하녀는 신나게 재잘거렸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진짜 대단하시지 않니? 공작 각하도, 뭐야, 왜 찔러.”

격하게 자신의 옆구리를 찔러 대는 친구의 손길에 뒤돌아본 수다쟁이 하녀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대, 대, 댄버스 부인!”

팔짱을 낀 채 문간에서 두 명의 하녀들을 바라보던 댄버스 부인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너, 따라오거라.”

아, 망했다.

울상이 된 수다쟁이 하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댄버스 부인의 뒤를 따라나섰다.

* * *

에드윈이 쫓겨난 자리, 집무실에 들어선 라모나는 로베르트의 예상과는 달리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더 걱정스러웠던 로베르트가 물었다.

“괜찮습니까?”

“네. 솔직히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이지만, 미카엘라가 벌일 만한 일이기는 해서요. 생각해 보면 진작 대비를 하고 있었어야 하는 일이죠.”

“제 불찰입니다.”

“아니에요. 아이젠부르크의 일인 것을요. 제 불찰이죠.”

그의 책임이 아니라며 선을 긋는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단…… 영지 몰수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긴 합니다만.”

“요하네스가 돕는다면 가능성이 올라가는 일이기도 하죠.”

“폐하께서 그리 쉽게 허락하실 리 없습니다. 어쨌든 중앙 귀족의 힘을 키우는 일이니까요.”

“아무튼 아이젠부르크를 불안에 밀어 넣어 저를 압박하려 한 것이라면 꽤 성공한 작전인 거죠.”

냉소적인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가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왜 성공한 작전입니까?”

“……네?”

“완전히 실패한 작전 아닌가?”

고개를 갸웃한 그가 습관처럼 턱을 만지작거렸다.

공작가의 일원으로 자란 그가 영지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이라 짐작한 라모나가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각하, 이해가 잘 안 가시겠지만 저희 같은 위치의 귀족들에게 영지는 필수예요. 그게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기반이 흔들리는 큰 사건이라고요.”

“그건 저도 압니다.”

퍽이나 알겠네. 속이 탄 라모나가 찬물을 들이켰다.

탁, 소리가 나게 그녀가 잔을 내려놓자 로베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만, 확실히 좀 우습지 않습니까.”

“어떤 면이요?”

“아이젠부르크의 뒤에 메닝엔이 있는데 영지를 몰수하겠다는 쇼로 당신을 압박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는 것이.”

“……아.”

그제야 라모나는 로베르트의 말을 이해했다.

로베르트는 잔뜩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감히 제 존재를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는지. 이건 모욕이나 다름없군요.”

모욕일 건 또 뭐람. 오늘도 하늘을 찌르는 로베르트의 자존감을 십분 반영한 발언을 라모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아무튼 각하도 자세한 정황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저런 걸 다 듣고 있어 주기에 오늘은 너무 피곤했다.

그녀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빼앗아 죄송해요.”

그녀의 빠른 퇴장에 로베르트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다입니까?”

“물론이죠.”

“그럴 리가 없는데?”

“저 또라이, 또 왜 저래?”

‘정말 이게 전부인데요.‘

잠깐만.

나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베르트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당신 마음속의 저에 대한 평판은 아주 자알 알겠습니다.”

“그런 건 아니고…….”

“뭐가 그런 건 아닙니까. 저를 아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기에 변태나 재앙의 주둥이 같은 표현들도 추가되어야 하지만 라모나는 굳이 그 사실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으음, 그럼 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이만.”

어색하게 눈을 굴리던 라모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간 토라진 얼굴의 로베르트가 그녀에게 물었다.

“정정도 안 합니까?”

“그…… 엄…… 음…… 죄송해요. 생각만 한다는 것이 그만.”

“그럼 그게 진심이라는 소리잖아. 너무하네, 정말.”

로베르트의 혼잣말에 라모나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휴, 한숨을 삼킨 로베르트가 고개를 삐딱하게 치켜들고는 물었다.

“그래서 내게 부탁할 게 뭡니까?”

나는 마음이 아주 조금 상했지만 그래도 곤란한 자의 요청을 기꺼이 들어주는 관대한 사람이라는 듯한 자비로운 표정을 지은 채였다.

“네?”

“영지 문제 말입니다.”

“아아.”

라모나가 별거 아니란 듯이 피식 웃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아이젠부르크의 일이니까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알아서 잘 처리해 보겠습니다.”

라모나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로베르트와의 관계 재정립 프로젝트의 아주 굵직한 한방이었다.

* * *

달칵.

문이 닫히고 로베르트는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야?”

이런 건 또 처음이었다.

다들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해 안달인데, 도움을 주겠다는데도 필요 없다고 선을 긋다니.

심지어 그녀를 도와줄 가장 완벽한 스토리를 이미 구상해 놨는데!

“허, 참, 하.”

연신 각종 헛웃음을 내뱉던 로베르트가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주르륵 힘없이 늘어졌다.

누운 채로 천장을 보고 있노라니 지금까지 느껴 본 적 없는 어떤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뭔가 화가 나는 것 같으면서도, 패배감 같은 게 느껴지면서, 은근히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

‘그래도 약혼자잖아?’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자존심이 상했다.

라모나가 실수로 속마음을 내뱉어 버린 일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그 정도에 마음이 상할 만큼 배포가 작은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조금 상한 것 같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렇게 크고, 중대한 일이 벌어졌는데!

이 일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하고, 권력 있는 약혼자에게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다니.

자존심이 상해도 너무 상했다.

“너무하네, 거참.”

도움을 주겠다고 매달려 보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게다가 또 누구를 만나러 간다는 것인지. 이 중요한 순간에.

‘설마……’

2황자는 아니겠지?

“젠장.”

알폰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힌 로베르트가 애꿎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댄버스 부인의 목소리였다.

“들어와.”

댄버스 부인은 심각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뭔데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무섭게.”

삶의 의욕을 잃은 로베르트가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은 아닙니다만…….”

별일 아니라는 말과 달리 댄버스 부인은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하녀 아이들 사이에 도는 이야기가 있어서 말입니다.”

로베르트는 짜증이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신경 써야 하나?”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뭔데.”

“들어오게.”

의미심장한 표정의 댄버스 부인이 하녀 하나를 집무실 안으로 들였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하녀가 턱을 달달 떨면서 입을 열었다.

“가, 각하. 저어어 그,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잠시 뒤.

벌컥.

분노에 가득 찬 로베르트가 방문을 열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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