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Chapter 7. 너무 위험한 능력
메닝엔 공작저로 돌아오는 마차 안,
“하.”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던 라모나가 신경질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영지 몰수라고?”
기가 막혀서 정말.
정말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야기다. 그 자리에서 멍청하게 당하고 돌아온 게 곱씹을수록 분했다.
정말 화가 나는 것은 아직도 미카엘라는 라모나를 자신의 시녀 정도로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사실 회귀 전에는 이런 상황이 자주 반복됐었다.
라모나를 압박하고 싶을 때면 항상 미카엘라는 아이젠부르크를 건들였다.
그럴 때면, 언제나 라모나는 잔뜩 굽힌 채 미카엘라의 뜻을 따라 주었다.
벤트하임의 시녀답게.
하지만 지금은 분명 상황이 달랐다.
로베르트 메닝엔이 버젓이 라모나의 뒤에 있는데도 이 방법이 또 먹힐 거라 생각하다니.
‘그 남자가 정말 나와 결혼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라모나는 다시 한번 헛웃음을 쳤다.
정말 영지가 몰수당한다면야 무척이나 상황이 곤란해지기는 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영지가 몰수된 것이 벌써 100년도 더 된 일.
‘중앙 귀족의 힘을 키워 주는 일을 황제 폐하께서 허가하실 리가 없어.’
게다가 그녀가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인 이상 더더욱.
라모나는 생각했다.
‘이제 슬슬 사교계로 복귀할 타이밍인가.’
“일단……. 함께 움직일 사람이 필요한데…….”
라모나의 손가락이 팔을 톡, 톡 하고 두드렸다.
라모나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 벤트하임 쪽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동지를 찾기보다 적의 적을 찾는 것이 빠를 터.
“지금 제국 사교계에서 미카엘라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꼽아 보자면 역시…….”
<조만간 한 번 따로 봐야겠네요, 우리.>
멜리사 바텐베르크.
“그쪽인가?”
그녀를 떠올린 라모나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감돌았다.
* * * 다x임x공x유x금x지
아이젠부르크의 영지 몰수 소식은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아 수도를 강타했다.
아이젠부르크 자작가에는 큰 소란이 일었다.
자작은 당장 거래를 끊겠다는 거래처들을 달래러 분주히 뛰어다녔고, 자작 부인은 이 소식이 전해지기 전 영지민들을 진정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자작저의 집사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영지와 관련된 서류를 찾아 두기 시작했다.
모두가 정신없는 와중, 연락 없이 찾아온 손님을 맞이한 사람이 말단 신입 하녀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벨 소리에 잔뜩 긴장한 신입 하녀가 문을 열었다.
자작저의 벨을 누른 것은 웬 남자였다.
짧은 머리와 단단한 몸, 햇볕에 그을린 피부.
옷차림을 보니 평민은 아닌 것 같은데, 귀족이라기에는 수행원도, 마차도 없었다.
알쏭달쏭한 손님의 정체에 하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세요?”
그녀의 질문에 손님은 황당해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나?”
“예에.”
그럼 여기 그쪽 말고 또 누가 있죠? 소란스러운 하루에 지친 하녀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손님은 다시 물었다.
“지금 내가 누구냐고 물은 거야?”
“으음, 네 맞는데요.”
역시 잡상인인가. 하녀가 남자를 내쫓을까 고민하는 사이 손님은 말했다.
“……이 집 아들?”
“……?”
“으음, 그러니까. 레이먼 아이젠부르크.”
“히이이익!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손님의 정체를 파악한 하녀가 기겁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하녀가 힘껏 외치며 뛰어 들어갔다.
“도련님! 도련님! 마님이 오셨, 아니 마님! 도련님이 오셨어요!”
아직 수도에 벌어진 소란을 모르는 레이먼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저렇게 놀랄 일인가.”
아무튼 잠시 뒤.
“오랜만이구나, 레이먼.”
무척이나 진이 빠져 보이는 자작 부인이 오랜만에 집을 찾은 아들을 끌어안았다.
“잘 지내셨어요?”
“그래.”
자작 부인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보다시피 지금은 좀 정신없다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아들의 질문에 자작 부인은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벤트하임이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나섰단다.”
“예에에?”
기막힌 소식에 레이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번, 그는 객기로 휴가 신청을 올렸다.
물론 정말 가슴이 아파서라는 사유로 내지는 못했다. 공식 사유는 개인사였다.
하지만 1주일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기에 당연히 반려되었겠거니 여기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며칠 전 허가가 떨어졌다.
그것도 무려 휴가를 나간 알폰조의 특별 허가가.
레이먼은 그 즉시 짐을 쌌고, 가족들을 놀라게 해 줄 생각에 편지도 한 통 넣지 않고 출발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
입을 쩍 벌린 레이먼이 되물었다.
“영지를요? 아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워낙 오래전의 전통이기는 하다만, 아직도 그런 법이 존재하기는 하다는구나.”
“세상에, 이게 무슨…… 아, 어머니 그러면 지금…….”
“그래, 좀 바쁘기는 해.”
자작 부인이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급한 일부터 하시죠.”
“이해해 주니 고맙다, 레이먼.”
자작 부인이 아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자리를 떴다.
잠시 고민하던 레이먼은 하인에게 짐을 맡기며 말했다.
“목욕물을 준비하고, 마차를 대기시켜.”
오랜만에 찾아온 집이 눈물 나게 반갑기는 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 * *
벤트하임 공작저,
힐끔 미카엘라의 눈치를 살핀 레이디 블레나가 호들갑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리였어요. 레이디 오셀튼이 워낙 다른 사람들을 골탕먹이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정말이지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니까요.”
‘정말이지’를 빼면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
미카엘라는 레이디 블레나를 향한 비웃음을 겨우 삼켰다.
“그런가요.”
그녀의 미지근한 태도에 아차 싶었던 레이디 블레나는 레이디 오셀튼을 향한 비난의 강도를 높였다.
“사실 좋게 포장해서 골탕이지, 너무 악의적이잖아요. 정말이지…… 으음…… 귀족답지 못해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에게 일부러 공작 각하 이야기를 할 때부터 알아봤어요!”
“어머, 그런 일이 있었나요?”
미카엘라가 깜짝 놀랐다는 듯 강아지같이 순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그녀는 하소연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라모나가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 같은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세상에, 레이디 벤트하임…… 어쩜 이리 마음이 고우실까! 분명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도 레이디의 진심을 이해할 거예요.”
레이디 블레나가 감격한 듯 미카엘라의 양손을 감싸 쥐었다.
그때 눈치 빠른 누군가가 재빨리 나섰다.
“솔직히 저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마냥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벤트하임의 또 다른 가신, 애커만 자작가의 영애였다.
“벤트하임의 가신인 아이젠부르크가 어쩜 그리 줏대도 없이…… 저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미카엘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살며시 레이디 블레나에게 붙잡힌 손을 빼낸 미카엘라가 레이디 애커만을 나무라듯 말했다.
“레이디 애커만, 그런 말 하지 마요. 권력과 부를 위해 노력하는 게 꼭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그 말의 속뜻을 읽은 레이디 블레나는 신나게 라모나의 험담을 하기 시작했고, 레이디 애커만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맹렬한 비난을 쏟아 냈다.
미카엘라는 진흙탕 같은 대화에 끼는 대신 사람들이 라모나를 욕하는 광경을 즐겁게 구경했다.
이만하면 됐다 싶었을 무렵, 미카엘라는 곤란한 듯 눈썹을 내려뜨리고 입을 열었다.
“으음, 아무튼 저는 라모나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은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세상에, 정말 마음이 넓으시기도 하지.”
“라모나는 제 절친한 친구인걸요. 소중한 친구를 고작 이런 일 때문에 잃고 싶지 않아요.”
홀짝.
미카엘라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메닝엔 공작의 마음은 지나가는 바람일 뿐인데…… 라모나는 왜 그걸 모를까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때였다.
“아가씨.”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 올린 벤트하임 공작저의 시녀장이 조심스레 미카엘라에게 다가왔다.
“이리 와. 무슨 일이지?”
“황태자 전하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역시.’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그깟 멍청한 계집애 따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고작 그 계집애의 존재가 황태자비 자리를 쥐고 흔들 리가 없지.’
맞아, 나는 고귀한 벤트하임이니까. 그 계집애는 내 발판에 불과하니까.
미카엘라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했다.
“어머, 황태자 전하께서 나를 부르신다고?”
자신만만한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 * *
메닝엔 공작저. 소식을 전해 들은 로베르트가 혀를 끌끌 찼다.
“그 고자 놈들이 무리수를 뒀군.”
‘가신들에게 배신에 대한 경고를 주기 위함인가 본데.’
당장은 경고가 되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충성심을 얻어 내기는 어려운 방법이다.
심지어 아이젠부르크가 벤트하임에게서 돌아선 것은 미카엘라 벤트하임이 라모나에게 황태자의 정부가 되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 아닌가.
‘뭐 정확히 말하면 아직 요구를 한 건 아니니…… 이야기를 꺼내기는 애매하군.’
설령 요구했다 한들 그 일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을 터였다.
평판은 물론이고 황실까지 등져야 하는 일이니까.
사교 시즌을 코앞에 두고 이런 일을 터뜨린 속내가 빤했다.
역시 치졸한 놈들. 로베르트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라모나는 귀가 이후 자신의 침실에 틀어박혔다. 그가 소식을 전해 들은 것도 라모나가 아닌 에드윈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 점이 묘하게 서운했던 로베르트가 괜히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에드윈.”
“예, 각하.”
“너는 이 소식을 어떻게 들었지? 로지나?”
“아, 아닙니다. 로지나는 바네사 황녀님을 뵙고 왔습니다. 미리 포섭해 둔 오셀튼 백작저의 하인이 전해 준 소식입니다.”
바네사의 이름을 언급하며 에드윈이 슬쩍 로베르트의 눈치를 봤지만, 로베르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쯧.”
로베르트는 못마땅함에 혀를 찼다.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꾸 라모나가 구설에 오르는 것도, 라모나가 별 방어 없이 그걸 그대로 두는 모습도.
그러고 보니 자신도 그녀가 구설에 오르는 것에 한몫했다.
‘젠장.’
로베르트는 괜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