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50화 (51/151)

#50화

라모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영지를?’

아이젠부르크의 영지.

바다를 낀 큰 항구가 위치한 그곳은 아이젠부르크 자작의 사업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미카엘라, 그게 무슨 말이야?”

손이 차갑게 식었다.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라모나의 부름에 미카엘라는 말실수라도 한 것처럼 손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흡, 라모나…….”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나도 최대한 아버지를 설득해 보려 했는데…….”

그녀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자 주르륵, 뺨을 타고 가련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페브룩 영식 일로 아버지가 화가 너무 많이 나신 바람에 도저히…… 흑…….”

영지 몰수라니. 듣도 보도 못한 충격적인 소식에 레이디들은 서로 재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미카엘라가 골탕 먹는 꼴을 볼 생각에 들떠 있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제국의 두 기둥. 벤트하임의 위세를 뼈저리게 실감한 탓이었다.

대화의 흐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소식의 충격이 워낙 큰 탓에 다들 그 사실을 생각할 새도 없었다.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앉은 멜리사만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카엘라를 관찰했다.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레이디 블레나가 혀를 차며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상에나. 어쩐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에게 공작 각하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더라니…… 그런 의도였을 줄이야.”

자칫 불똥이 튀면 곤란해질 자리. 레이디 블레나는 모든 책임을 레이디 오셀튼에게 떠넘기기 시작했다.

손수건으로 거짓 눈물을 훔친 미카엘라는 원망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레이디 오셀튼을 책망했다.

“레이디 오셀튼. 이제 좀 속이 시원하세요?”

“어머 어머 어머, 저, 저는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한 레이디 오셀튼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레이디께서 저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시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제 친구까지 이렇게 모욕하실 줄은 몰랐어요.”

미카엘라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정말이지 실망이에요.”

미카엘라의 심기를 거스를까 겁이 난 다른 소녀들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는 집안 행사가 있어서 이만.”

“어머, 저는 몸이 좀 안 좋아서요…….”

당황한 레이디 오셀튼이 허둥지둥 변명을 시작했다.

“오해, 오해예요. 네?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썰물처럼 손님들이 빠져나갔다.

이번 사교 시즌에 레이디 오셀튼이 외톨이가 되리라는 것이 뚜렷해지는 순간이었다.

라모나는 아직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레이디 오셀튼은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와 말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정말, 이건 정말 제 진심이 아니었어요. 오해하게 해 드려 죄송해요.”

“……네, 알아요.”

라모나는 굳은 입꼬리를 겨우 끌어 올렸다. 그 정도가 지금 그녀가 차릴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그때, 고고하게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던 레이디 바텐베르크, 멜리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멜리사는 레이디 오셀튼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자리가 파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즐거웠어요.”

“……네에.”

울상이 된 레이디 오셀튼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또각또각.

허리를 꼿꼿이 세운 멜리사의 구두 굽 소리가 정원의 대리석을 울렸다.

이내 라모나의 곁을 지나가며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만간 한번 따로 봐야겠네요, 우리.”

멜리사의 비단 같은 금빛 머리카락이 우아하게 흔들렸다.

* * *

탕!

날카로운 파열음이 공기를 찢음과 동시에 날아가던 새 한 마리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시종 한 명이 황급히 사냥감을 주우러 달려갔다.

요하네스는 태연한 얼굴로 새를 쐈던 총구를 시종의 뒤통수에 겨눴다.

그는 한쪽 눈을 감은 채 영점을 맞추고, 허공에 손가락을 한 번 당겨 보았다.

까딱.

이내 요하네스는 우아한 몸짓으로 총을 내려놓았다.

입가에는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제법 재미있는 소식이야.”

방금 전, 요하네스는 오셀튼 백작저에서 있었던 소란을 전해 들었다.

영지 몰수라니. 레이디 벤트하임이 나름대로 그 멍청한 머리를 굴린 모양이었다.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머리를 쓸 생각을 하는군.’

하지만 역시 이 정도가 그녀의 한계일 것이리라.

때로는 직접 사냥에 나서야 하는 법. 라모나를 떠올린 요하네스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내 그가 데미안에게 엽총을 건넸다.

더 몰아 봤자 나올 것도 없는 무능한 사냥개에게 이제 당근을 좀 챙겨 줄 차례였다.

“레이디 벤트하임과 식사라도 한번 같이 해야겠군. 그래, 물건은?”

“말씀하신 분량이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각성 효과가 있다 하였던가?”

“네.”

데미안의 대답에 요하네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요하네스는 그에게 서부 경계의 군사들에게 보급할 각성제를 준비해 두라 명했다.

먹으면 힘이 나고, 피로가 사라지고, 3일간 밤을 새워도 끄떡없는 약이라 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 책상 서랍에 넣어 둔 편지들을 떠올렸다.

하나는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또 하나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누군가에게 도착한 편지였다.

요하네스에게 각성제의 존재를 언급한 것은 후자의 편지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편지에는 세상의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라모나 아이젠부르크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녀가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가 되고, 벤트하임 공작이 아이젠부르크의 영지를 몰수하려 들다니.

이렇게 되면 편지의 이야기는 모두 허무맹랑한 소리가 된다.

‘역시 다 헛소리에 불과했나.’

재미있는 일이 좀 생기나 했더니. 쯧, 요하네스가 혀를 찼다.

“시시하군.”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눈에는 미묘한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먹이를 포착한 포식자의 광기였다.

이내 시종이 요하네스의 총에 맞은 사냥감을 주워 들고 달려왔다.

새는 총알이 뚫고 지나간 날개를 애처롭게 퍼드덕거리고 있었다.

피가 줄줄 흐르는 상처를 보며 요하네스가 혀를 찼다.

“쯧, 딱하기도 하군. 단번에 목숨을 잃었어야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칼로 그어서 죽일까요?”

시종의 말에 요하네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되었다. 치명상은 아닌 것 같으니 내 방으로 가져가 치료해 주도록 하지.”

살릴 수 있을 만한 상처가 아니었지만, 시종은 조심스레 천으로 새를 감쌌다.

요하네스는 시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거라.”

“예?”

“그 새 말이다. 내가 직접 들고 가도록 하지.”

“헉, 전하. 전하의 고귀한 손에 피를 묻힐 수는…….”

“주라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서늘해진 그의 분위기에 시종이 황급히 새를 건넸다.

요하네스의 입가에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황태자궁으로 돌아가는 길.

“오오, 황태자 전하.”

그를 발견한 바텐베르크 후작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요하네스도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후작. 폐하를 알현하고 돌아가는 길인가.”

“예,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그런데 그것은 무엇인지……?”

요하네스의 손에 들린 새를 발견한 후작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아, 사냥을 나갔는데 부족한 실력 탓에 아직 어린 새가 고통받게 되었네.”

요하네스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치료해 줄 생각이었네만…….”

파르르, 생명이 꺼져가는 새의 마지막 발작이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움직임을 느낀 요하네스의 얼굴에 언뜻 희열이 맴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임이 멎자 요하네스가 시종에게 새를 건네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이미 늦은 모양이군.”

“아이고, 저런. 그래도 전하의 손에 숨을 거두었으니 제국의 새로서는 영광 아니겠습니까.”

그가 상심한 것이라 생각한 후작이 과장스럽게 혀를 차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런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요하네스는 말끝을 흐리며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이내 그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제국의 천사라 칭하는, 바로 그 미소였다.

* * *

클라이스트 백작저, 짜증스럽게 장갑을 벗는 로지나를 보며 에드윈이 까딱 손을 흔들었다.

“늦었네.”

“황녀님 만나면 항상 그렇지 뭐.”

“오늘 오셀튼 백작가 간다고 하지 않았나?”

“갑자기 바네사 황녀님이 부르셨어. 덕분에 오늘 여덟 시간이나 마차 탔네.”

끔찍한 이야기에 에드윈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우, 황녀님은 항상 할 얘기가 많으신가 봐.”

“……뭐, 진짜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시겠어?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에 대해서 정보를 좀 떠 보려고 날 부르신 거였지.”

로지나의 말에 에드윈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흠…… 로지나.”

“왜 갑자기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 소름 끼쳐.”

“나라고 네 이름 부르고 싶은 줄 알아? 그리고 하나도 안 다정했거든?”

“아무튼 이름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

“아예 부르지 않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이게 진짜!”

욱한 에드윈이 짜증을 냈지만 로지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장갑을 다 벗어 던진 로지나가 허리에 손을 짚으며 에드윈에게 물었다.

“그래서 왜.”

“황녀 전하 말인데.”

“어.”

“당분간 연락을 좀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아, 또 뭔 헛소리야.”

로지나의 습관적인 구박에도 에드윈은 굴하지 않았다.

“차라리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뒤를 쫓아다니는 걸 추천한다.”

털썩. 소파에 주저앉은 로지나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미쳤어? 누구 인생 망칠 일 있니?”

에드윈은 침착하게 로지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로지나, 잘 생각해 봐. 저번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 각하를 좋아하는 척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니?”

“그건 맞지. 그렇긴 한데…….”

망설이듯 입술을 깨문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만약에 일이 틀어지면, 그때 바네사 황녀님이 날 가만두실 것 같아?”

“이런, 로지나. 나의 사랑하는 동생. 넌 겁쟁이로구나.”

“닥쳐, 네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마. 황녀님이 그런 부분에서 얼마나 철저한 분이신데.”

안 그래도 바네사를 상대하느라 진이 빠진 로지나가 으르렁거렸다. 에드윈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한 가지 알려 줄까?”

소파에 축 늘어진 로지나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를 살폈다.

“……뭔데?”

“각하가 이상해.”

“각하는 원래 이상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에드윈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각하께서 진짜로 사랑에 빠진 것 같아. 황녀님 눈치 볼 필요 없이…….”

길게 말을 늘인 에드윈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진짜 메닝엔 공작 부인이 될 수도 있다니까?”

그제야 로지나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어쩐지 각하가 그 여자를 못 만나게 막더라니. 흐으음.”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가 이내 결론을 내렸다.

“그럼…… 어디 한번 내가 직접 만나 보고 결정할래.”

“아!”

그녀의 말에 무언가가 떠오른 에드윈이 주먹을 내리쳤다.

“너 하던 거 그냥 계속해 볼래?”

“뭘?”

로지나의 되물음에 에드윈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