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오셀튼 백작저 앞, 다행히 로베르트는 꿈에서처럼 요란하게 라모나를 배웅하지 않았다.
“다녀오시죠.”
대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은 빼놓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를 향하던 검은 눈동자를 떠올린 라모나가 황급히 찻잔을 들었다.
‘뭐, 뭐야. 왜 이런 생각이.’
라모나가 찻잔을 들건 말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랗게 치장한 레이디 오셀튼은 쉴 새 없이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그거예요. 평소에 ‘아, 역시 이마를 드러낸 공작님은 정말 빛이 난다.’라고 생각하다가도, 또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이 앞머리를 내린 공작님을 보면 ‘세상에 저렇게 우수에 젖은 앞머리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니까요!”
무려 두 시간째,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로베르트를 찬양 중인 레이디 오셀튼에게 라모나는 감탄했다.
‘저렇게 길게 말하려면 숨은 언제 쉬는 거야? 저 정도면 재능이네.’
기립 박수라도 치고 싶은 라모나에게 레이디 오셀튼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그래서 레이디께서는 앞머리를 내린 파인가요, 아니면 올린 파인가요. 네?”
‘그냥 그 남자가 입 좀 다물었으면 좋겠다, 파인데요.’라고 말할 뻔한 라모나가 황급히 입을 단속했다.
“뭐, 상황에 따라 어울리는 차림이 있겠지요.”
“어머나 어머나. 역시 레이디께서는 공작님의 모든 면을 사랑하시는군요. 꺄아아! 로맨틱해라.”
왜 저런 결론이 나는 거야?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을 뻔했다.
좀 들을 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싶어서 참석했는데, 로베르트를 향한 찬사를 두 시간 동안 들을 줄이야.
‘피곤해.’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던 레이디 바텐베르크, 멜리사가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저쪽이랑 이야기하고 싶은데.’
의외로 레이디 클라이스트는 참석하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바네사 황녀의 부름을 받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기분이 불쾌해졌다.
로지나라며 레이디 클라이스트의 이름을 거침없이 부르는 로베르트도, 그런 그의 전 약혼녀 바네사 황녀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달그락.
찻잔을 들며 라모나가 속으로 혀를 찼다.
‘괜히 왔나.’
오늘따라 유달리 차도 맛이 없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라모나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마음먹었다.
“저, 레이디 오셀튼 저는 이만…….”
“어머! 늦으셨네요.”
그때 문 쪽에서 누군가를 발견한 레이디 오셀튼이 호들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올 사람이 있던가? 레이디 클라이스트?’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라모나가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내 뒤늦은 손님을 발견한 그녀의 얼굴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레이디 오셀튼은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연락이 없으시기에 참석을 못 하시는 줄 알았지 뭐예요.”
“일이 좀 있었거든요.”
나긋하게 대답한 손님은 우아하게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라모나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라모나! 여기서 볼 줄이야. 얼굴을 다 잊어버릴 뻔했잖아.”
어쩐지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오랜만이야, 미카엘라.”
라모나를 꼭 붙들고 있던 레이디 오셀튼의 진짜 속내를 알아차리는 순간이었다.
미카엘라의 등장 이후 오셀튼 백작저의 정원에는 묘한 공기가 흘렀다.
멜리사는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그녀는 가끔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레이디 오셀튼을 바라보긴 했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미카엘라는 활짝 웃으며 친분이 있던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중간에 낀 애매한 이들은 힐끔힐끔 라모나의 눈치를 살폈지만, 라모나 또한 잠자코 차를 마실 뿐이었다.
이 사태의 주범, 레이디 오셀튼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양 신나는 얼굴로 박수를 쳤다.
“레이디 벤트하임께서 이렇게 저희 정원에 발걸음 해 주시다니 너무 기뻐요!”
하지만 이 자리에 그녀의 속내를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미카엘라, 멜리사, 라모나를 한 자리에 불러 모은 저의가 무엇이겠는가.
뻔했다.
말하자면 곧 열릴 사교 시즌을 티스푼으로 살짝 떠먹어 보는 자리랄까.
‘구성원을 보니 타깃은 미카엘라인가 본데……’
레이디 오셀튼, 생각보다 엄청 호전적이네. 라모나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 의도를 모를 리가 없는데 티파티에 참석한 미카엘라의 꿍꿍이가 영 수상했다.
‘일단 지켜보자.’
라모나는 차분하게 상황을 관전했다.
레이디 오셀튼의 호들갑에 미카엘라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에 초대받은 제가 더 기쁜걸요.”
“겸손하시기도 해라.”
“오셀튼 백작가의 튤립이 아름답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확실히 소문은 실제만 못하네요. 너무 아름다워요.”
“꺄아아! 과찬이세요. 벤트하임의 정원이야말로 아름답기로 유명한걸요.”
미카엘라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당연하다는 의미의 미소였다.
그 사실을 눈치챈 레이디 오셀튼의 얼굴이 순간 굳었지만, 그녀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반가운 마음에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 뒀네요. 이리로 오세요, 레이디 벤트하임.”
“감사해요.”
고개를 까딱한 미카엘라가 자리에 앉자,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이번 사교 시즌에는 마담 제르니의 드레스를 맞추려고요. 공화국에서 괜찮은 실크가 들어왔다기에 예약해 뒀는데, 정말이지 아름답더라고요!”
“요즘 실크 구하기가 정말 어렵던데! 역시 빠르시네요, 부러워요. 레이디 블레나.”
“맞아요, 무역선 때문인지 참 실크…….”
생각 없이 수다를 떨다가 벤트하임이 아이젠부르크의 무역선을 막고 있다는 소식을 떠올린 레이디 블레나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실크는 정말이지 아름답죠. 정말…… 정말이지…… 으음, 아름다워요.”
그녀가 황급히 실크 예찬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레이디 정말이지다운 마무리였다.
그 이후로도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다들 화제의 인물들을 훔쳐보기 바쁜 탓에 대화는 겉핥기식으로 싱겁게 끝나곤 했다.
미카엘라는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대화를 경청했다.
우아하게 내려뜨린 긴 머리카락과 강아지처럼 사랑스러운 그녀의 눈매는 오늘도 아름다웠다.
일부러 맞추고 오기라도 한 듯 오셀튼 백작저의 정원과 어우러진 탓에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레이디 블레나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미카엘라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오늘 정말 아름다우세요. 레이디 벤트하임. 어쩜 그렇게 고운 머릿결을 가지셨을까요.”
“감사해요, 레이디 블레나의 드레스도 정말 아름답네요.”
미카엘라는 입을 가리며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분위기에 레이디 오셀튼의 눈이 가늘어졌다.
결국 그녀가 슬그머니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레이디 벤트하임, 며칠 전에 황후 폐하를 뵙고 오셨다면서요?”
“아아. 네, 정원을 함께 산책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요하네스 전하와 함께 산책하시다가 제 생각이 나셨대요.”
“어머! 황궁의 정원이라니 너무 멋진데요?”
미카엘라는 요하네스와 자신의 관계를 과시할 기회를 쉽게 놓치지 않았다.
“여름에는 수국이 그렇게 예쁘다네요. 그때는 요하네스 전하와 함께 산책하기로 했어요.”
“세상에, 너무 멋진 일이네요.”
그때, 피식.
입가에 잔뜩 비웃음을 머금은 멜리사가 각설탕을 꺼내 들며 중얼거렸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레이디 벤트하임과 식사할 시간도 없으신 듯한데…….”
그녀가 눈썹을 한번 까딱하고는 티스푼을 저었다.
“다행히 산책할 시간은 있으신 모양이네요?”
지난번, 황태자궁에서 쫓겨났던 미카엘라를 비꼬는 말이었다.
탁.
티스푼을 내려놓은 멜리사가 싱긋 웃어 보였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정도 도발에 당황할 미카엘라가 아니었다.
“뭐, 정 요하네스 전하께서 시간이 안 나시면 황후 폐하께서 함께 산책을 해 주시겠죠. 사실 그편이 더 기대되기도 하네요. 워낙 배울 점이 많은 분이시니까요.”
환히 웃으며 황후에게 팽 당한 바텐베르크의 신세를 일깨워 주는 미카엘라의 말에 멜리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이내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아, 하긴 레이디 벤트하임의 이모 되시는 레베니 남작 부인께서도 황후 폐하의 시녀로 계시니, 레이디 벤트하임께서 이모님과 함께 지내는 것도 괜찮겠네요.”
“어머, 물론이죠. 황후 폐하의 시녀로 일할 수 있는 것은 무궁한 영광이에요.”
“그럼요, 특히 레베니 남작 부인께는 더더욱 그러겠죠.”
벤트하임 공작 부인의 덕에 겨우 황후의 시녀가 된 레베니 남작 부인의 신세를 멜리사가 비웃었다.
표정 관리에 실패한 미카엘라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이거지! 불꽃 튀는 신경전에 레이디 오셀튼의 눈이 신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소녀들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이제 진짜 벤트하임의 시녀 노릇을 때려치운 건가?’
평소의 라모나라면 미카엘라가 직접 나설 일 없이 슬쩍 멜리사의 치부를 흘려 입을 다물게 만들었을 텐데.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차를 홀짝이는 라모나의 태도가 범상치 않았다.
레이디 오셀튼도 그 사실을 단번에 눈치챘다.
‘흐으음, 조금만 더 해 볼까? 더 재밌는 일이 생길 것도 같은데.’
미카엘라를 망신 줄 생각에 신이 난 레이디 오셀튼이 생글생글 웃으며 라모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너무 부러워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네?”
갑자기 자신에게 쏠린 이목에 당황한 라모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레이디 오셀튼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모른 척하실 거예요?”
“네? 그게 무슨 이야기…….”
“에이. 이미 이야기를 다 들었으니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꺄하하하.”
잔뜩 신이 난 레이디 오셀튼이 특유의 독특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달그락.
“레이디 오셀튼. 그건 좀 예의가 아닌 것 같네요.”
찻잔을 내려놓은 미카엘라가 엄격한 얼굴로 그녀를 나무랐다. 당황한 레이디 오셀튼이 얼떨결에 되물었다.
“……예?”
“지금 바깥의 소문을 듣고 라모나를 가십거리로 만들려고 하는 거잖아요.”
미카엘라가 2황자 알폰조와 라모나의 염문설을 이야기한다고 착각한 레이디 오셀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어머, 아니에요. 그건 정말 오해세요. 저는 각하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의 사이가 정말 좋아 보여서 농담을 하려던 건데……. 제가 너무 짓궂었다면 죄송해요.”
“농담이요? 하.”
미카엘라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지.’
라모나는 미카엘라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씰룩거리는 입가가 눈에 띄었다.
저건 미카엘라가 자기 뜻대로 될 때 짓는 표정이었다.
이상한데. 싸늘한 예감에 라모나가 얼굴을 굳혔다.
미카엘라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레이디 오셀튼을 추궁했다.
“어떻게 그런 질 나쁜 농담을 할 수 있어요?”
“레이디 벤트하임! 대체 왜 그러세요?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요? 정말 무례하시네요.”
“세상에, 그걸 굳이 제 입으로 말해야겠나요?”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보다 못한 라모나가 나섰다.
“미카엘라, 진정해. 괜찮아요, 레이디 오셀튼.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아요.”
그러나.
“아이젠부르크가 영지를 몰수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금 이러는 거잖아요. 아닌가요?”
미카엘라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라모나의 사고가 멈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