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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48화 (49/151)

#48화

어색한 기분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레헨트의 일 말이에요.”

“아.”

로베르트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내 그가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음, 그 이야기는 저택에서 마저 하는 거로 합시다.”

“……좋아요.”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너무 개방된 공간이었다. 납득한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 돌리기가 실패하고 나자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기분에 라모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묘하게 다른 로베르트의 태도가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요하네스의 앞에서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 실수가 생겼다.

바보같이 저 남자에게 또 말려든 것도, 갑자기 레헨트의 일을 이야기하려 한 것도 다 그런 맥락이었다.

‘영 어색하네.’

미묘해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 라모나가 찻잔을 들었다.

다행히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를 듣다 보니 마음이 한결 진정되었다.

그녀와는 다르게 로베르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레헨트에 가 본 적 있으십니까?”

“아뇨. 저희 영지와 가깝다 보니 더 안 가 보게 됐네요.”

사실은 벤트하임의 가신으로서 메닝엔의 영지에 휴가 가기가 조금 그래서였지만, 라모나는 노련하게 돌려서 대답했다.

“하긴 아이젠부르크의 영지도 바다를 끼고 있으니 그러겠군요. 아, 그럼 사교 시즌이 끝나면 레헨트에 한번 다녀오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마 그때쯤이면 레몬 축제 중일 겁니다.”

레헨트산 레몬이 유명하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레몬 축제가 열린다는 것은 처음 들어 봤다.

솔깃한 라모나가 되물었다.

“레몬 축제요?”

“예, 별 대단한 축제는 아니지만 제법 볼거리가 있습니다.”

“어머나, 그거 무척 기대되…….”

대답하던 라모나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로베르트의 손목에서 가느다랗게 피어난 푸른빛 때문이었다.

당황한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저게 뭐야?’

왜 사람 손목에 실이? 아니, 빛이?

어쩐지 낯익은 푸른빛에 라모나는 그제야 꿈속에서 로베르트 메닝엔이 딱 저렇게 빛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심상찮은 예감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모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로베르트의 목소리와 동시에 손목을 맴돌던 푸른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잘못 봤나?’

라모나가 놀란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아, 아니에요. 너무 기대된다고요. 빨리 가고 싶네요. 레헨트.”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접시 위로 돌렸다.

잔뜩 들뜬 로베르트 메닝엔이 레몬 축제에 대해 신나게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라모나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 * *

그날 저녁, 메닝엔 공작저.

“……아가씨?”

멍하니 쿠션을 끌어안고 있는 라모나를 티아가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스을쩍 라모나의 곁으로 다가온 티아가 큰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으으으음, 우리 아가씨가 무슨 일이 있으셨나 본데. 뭘까아.”

“아냐, 아무 일도.”

“어머나, 데이트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나.”

짓궂은 얼굴로 어깨를 배배 꼬는 티아를 보며 라모나가 피식하고 웃었다.

“내가 진짜 못 살아.”

“꺄악, 왜요? 왜요? 진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아무 일 없었대도.”

여전히 못 믿는 얼굴의 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의 티아가 천천히 라모나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한 번 두들긴 베개를 두 번, 세 번 두들기며 라모나의 주위를 뱅뱅 맴돌았다.

생각에 잠긴 나머지 그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라모나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근데, 있잖아 티아.”

“네! 뭐든지 말만 하세요!”

티아에게 의견을 좀 구해 보려던 라모나는 티아의 흐뭇한 미소를 발견하고는 생각을 바꿨다.

“……아냐, 나 물 좀 떠다 줄래?”

“어라? 제게 시키실 건 그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착각이야. 그럼 물 좀 부탁할게.”

“히이잉. 진짜 아닌 것 같았는데요.”

달칵.

끝까지 미련을 뚝뚝 떨어뜨리며 티아가 문밖으로 나섰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라모나는 다시 쿠션을 끌어안았다.

온통 푸른빛에 정신이 팔린 탓에 그 이후로 로베르트와의 대화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술이 아니라 약이었나? 환각제 뭐 이런 거?’

그게 가장 타당한 추측이었다.

삶이 고달픈 사람들이 먹는 술이라면 뭐가 들어갔을지 모를 노릇이니까.

‘브리튼이 괜히 말린 게 아니네.’

찝찝하지만 라모나는 일단 그 정도로 생각을 덮어 두었다.

아, 당분간 금주하기로 결심한 것은 물론이었다.

‘술…… 많이 약해졌나 봐.’

영원할 줄 알았던 내 주량이여.

우울하다. 아련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라모나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 *

쪼르륵.

큰 주전자에서 물을 옮겨 담으며 티아는 내심 안도했다.

어제와는 달리 한결 풀어진 라모나의 모습 덕분이었다.

‘역시 각하께 부탁드리기를 잘했어.’

불안에 떨던 아가씨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그런 모습은 난생처음 보았다.

“에효. 또 벤트하임 때문이겠지.”

티아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는 예전부터 그랬다.

벤트하임의 쓰레기, 아니, 아니, 미카엘라 아가씨를 만나고 올 때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한데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삭였다.

다만 그럴 때면 꼭 가족들의 안위를 확인했다.

자작님의 사업은 무사한지, 사교계에서 마님의 평판은 어떤지, 레이먼 도련님에게는 별일이 없는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는 그제야 안심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로 가족들을 찾으신 건 처음이네.’

라모나가 스스로의 뺨을 내리치던 그날을 떠올린 티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튼 다행히도 아가씨의 염려와는 달리 아이젠부르크 자작저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게다가 무슨 일이 아가씨를 두렵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오히려 그 덕에 각하와 아가씨의 사이가 더 돈독해진 것 같으니 다행이다.

‘역시 힘들 때 곁을 지켜 주는 사이에는 사랑이 싹트나 봐.’

이러면 나는 2황자 전하 말고 공작 각하에게 한 표를 던지겠어. 티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 채운 물병을 들었다.

“어머.”

메닝엔 공작저의 하녀 하나가 티아를 발견하고는 쪼르륵 달려왔다.

“레이디께서는 괜찮으셔?”

“응? 우리 아가씨?”

“어제 각하랑 엄청나게 독한 술을 드셨다던데.”

“아아, 난 또 뭐라고. 우리 아가씨는 술 잘 드셔.”

“그래도 각하에 비하지는 못하실 텐데…….”

왠지 모르게 발끈한 티아가 새침한 얼굴로 대꾸했다.

“각하야말로 우리 아가씨에 비하지 못하실걸?”

말하고 보니 이게 자랑인가 싶었던 티아가 눈을 깜빡였다.

‘나 말실수한 건가?’

하여간 이놈의 승부욕이란. 속으로 혀를 찬 티아가 부엌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부엌 하녀가 티아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에, 그거 진짜야?”

“뭐가?”

“아가씨께서 2황자 전하랑…….”

2황자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티아가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야! 너 말조심 안 해?”

“어머 얘. 나는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소문이 워낙 요란스럽게 나니까, 으음, 궁금해서 그러지.”

뜨끔한 공작저 하녀가 살가운 얼굴로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홱, 그녀의 손을 뿌리친 티아가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도…….”

‘잠깐, 잠깐만. 영리하게 행동하자, 티아. 우리 아가씨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공작저의 모두에게 일깨워 줄 필요가 있어.’

생각을 바꾼 티아가 입을 뾰족하게 모으고는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안 되는 소리야. 물론! 우리 아가씨는 그런 생각이 없으셔. 절대로. 하지만…….”

티아가 말끝을 흐리자 공작저의 하녀는 애가 타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응? 왜?”

“2황자 전하가 우리 아가씨를 바라보는 눈이 남다르긴 하더라. 각하도 참, 분발하셔야 할 텐데. 그치?”

“……대박.”

입이 떡 벌어진 하녀를 향해 싱긋 웃은 티아가 자리를 떴다.

‘크으, 티아. 너 완전 잘했어.’

뿌듯한 기분에 그녀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 * *

다음 날.

이번에는 꿈이 아닌 진짜 오셀튼 백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 오늘따라 유난히 로베르트의 샤워 코롱 향기가 코끝을 감돌았다.

‘괜히 어색하네.’

푸른빛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지만 생각해 보면 좋아할 만한 걸 같이하자느니, 레헨트에 같이 가자느니. 그가 남긴 말들이 전부 다 의미심장했다.

라모나는 한숨을 삼켰다.

‘또 무슨 속셈이기에 그런 말을 한 거지.’

로베르트가 그녀를 떠보기 위해 그랬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정신 차려, 라모나.’

싱숭생숭한 마음을 꾹꾹 밟아 누르며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다치겠습니다.”

그녀를 만류하는 목소리는 또 오늘따라 왜 이리 그윽한지.

젠장, 또 입술을 깨물려던 라모나가 황급히 이에 힘을 풀고 싱긋 웃어 보였다.

로베르트도 그녀를 따라 싱긋 웃었다.

“좋군요.”

뭐가 좋다는 건지. 되물어 볼까 싶었지만 라모나는 화제를 바꾸기를 선택했다.

“레헨트 말이에요.”

“일정을 바로 잡을까요?”

“아뇨 아뇨, 벤. 아, 그 소매치기 소년의 말이 정말이라면 여행 갈 만한 상황은 아니지 않나요?”

라모나는 그가 그 말을 할 때 푸른빛이 떠올랐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환각이라 해도 뭔가 찝찝하지.’

죽은 자신도 살아난 마당에, 무슨 일이 더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이었다.

‘지난 생에 없었던 괜한 변수는 차단하자.’

“특히나 우리가 예상하는 그 사람이 배후라면 좀 위험할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수긍하는 그의 태도가 오늘따라 얌전해서, 라모나의 기분은 더 복잡해졌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로베르트가 얄미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렇다고 레헨트에 평생 발도 붙이지 않는 건 겁쟁이나 하는 짓이죠.”

하, 헛웃음을 친 라모나가 그의 말에 대꾸했다.

“원래 미인은 의심이 많은 법이니까요.”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저는 처음 듣습니다만.”

“로베르트 메닝엔 공작 각하요.”

그제야 로베르트 메닝엔의 얼굴에서 예쁜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맞네.”

오랜만의 승리에 라모나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표정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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