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응? 내가 왜 여기에?’
전날 과음을 하긴 했다만, 이렇게까지 기억이 없다니.
‘이상하다? 오셀튼 백작저의 티파티는 내일 아니었나? 내가 착각했나?’
아침에 뭘 먹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오셀튼 백작저에 도착한 라모나가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에서는 눈부신 빛이 내리쬐고, 달콤한 꽃향기와 함께 벚꽃 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어쩐지 분홍색으로 가득 피어난 것 같은 공간,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나의 천사, 나는 정말 당신과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만.>
동시에 따뜻한 온기가 그녀의 손에 닿았다.
<……로베르트?>
미모의 20대 남성, 로베르트 메닝엔이 활짝 웃으며 라모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어머.>
<꺅, 로맨틱하기도 해라.>
연극에서 그대로 가져온 듯한 말도 안 되는 대사에도 주변에서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다 로베르트의 잘생긴 얼굴 덕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잘생김에 면역이 생긴 라모나는 흐린 눈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로맨틱은 무슨, 얼어 죽을.’
어쩐지 오셀튼 백작저까지 데려다주겠다더니, 이런 그림을 위해서였나 보다.
역시 가증스러운 자존감 과잉 변태 또라이.
심기가 불편했던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라모나는 한숨을 삼키며 로베르트에게 살며시 속삭였다.
<각하,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취미 생활?>
<미쳤나 봐.>
<오, 난 당신이 욕하는 게 정말 짜릿해.>
진짜 미쳤나 봐! 라모나는 경악했다.
‘말을 말자. 주둥이랑 말해 봤자 내 손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녀가 오셀튼 백작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내 사랑.>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예?>
라모나는 얼떨결에 뒤를 돌았고, 환한 미소를 지은 로베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안타깝게도 이번만은 라모나도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니, 왜 이렇게까지…….’
잘생겼지?
이상했다. 오늘의 로베르트 메닝엔은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눈이 부셨다.
떡 벌어진 넓은 어깨, 종이라도 벨 듯 날렵한 턱선. 거기에 거장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듯한 미소까지.
심지어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마저 그를 도왔는지, 로베르트 메닝엔은 오늘따라 유달리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저거 햇빛이라기엔 좀 푸르스름한데……’
이상한 술수라도 부린 거 아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튼 그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겼지?’
촤르르르, 윈드 차임 소리가 저절로 귓가에 울렸다.
라모나가 홀린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사이 로베르트가 긴 다리를 뻗어 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쪽.
부드러운 입술이 라모나의 입술에 천천히 닿았다 떨어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라모나를 바라보며 그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일어나세요. 아가씨.>
뭐라고?
<……예?>
<벌써 해가 중천이에요.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각하랑 데이트를 하러 간다고 하셨잖아요.>
아니 왜? 어째서 저 남자 입에서 티아 목소리가 나오지?
게다가 저 해괴한 3인칭은 뭐야? 왜 자기가 자기를 각하라 불러?
‘진짜 미쳐 버린 거야?’
잠깐, 데이트는 또 무슨 말이야?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 로베르트의 정체에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다시 힘껏 외쳤다.
<아가씨이! 네?>
그 순간 라모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응?’
어안이 벙벙했던 그녀가 티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로베르트?”
티아 목소리에 티아 얼굴을 한 로베르트라니.
‘잠깐만, 그건 그냥 티아 아냐?’
잠이 덜 깬 라모나가 눈을 깜빡이자 마음이 다급한 티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요! 예쁘게 하고 나가셔야죠. 데이트잖아요!”
그제야 로베르트의 입맞춤이 꿈이라는 걸 깨달은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게 대체 무슨 꿈이야? 내가? 왜? 대체 왜 그 가증스러운 남자랑 키, 키, 키…….’
맙소사.
라모나는 굳이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단어를 상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꺄아아아악! 나 진짜 미쳤나 봐!”
퍽, 퍼벅, 퍽!
그녀가 있는 힘껏 이불을 걷어찼다.
깜짝 놀란 티아가 물었다.
“아, 아, 아가씨? 주치의를 불러올까요? 아, 맞다. 여기는 공작저구나.”
“그놈의 주치의 좀 그만 찾아!”
상쾌한 아침의 시작이었다.
* * *
싱그러운 푸른 식물들로 가득한 티 하우스, 라모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채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웬 애프터눈 티예요?”
“오랜만에 데이트 한번 할 때 되지 않았습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 각하의 입에서 나오니 틀린 말 같네요.”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홍차에 우유를 부어 넣으며 물었다.
“잠은 좀 잤습니까?”
그의 질문에서 어제의 일을 떠올린 라모나가 멈칫했다. 이내 그녀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덕분에요.”
“제 덕분입니까, 압생트 덕분입니까.”
“아무래도 후자인 듯한데요.”
“안타깝군요.”
“뭐, 각하는 잘 주무셨어요?”
“물론입니다. 아, 저는 술이 아니라 당신…….”
로베르트의 주둥이가 열심히 일 할 기미가 보이자 라모나가 황급히 그의 말을 잘랐다.
“술이 정말 독하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니 속이 다 쓰리던데요.”
“아마 좋은 술이 아니라 더 그럴 겁니다.”
로베르트는 마치 꿈에서 그랬듯이 살랑살랑 웃으며 눈꼬리를 야릇하게 접었다.
‘윽.’
안 돼. 또다시 뜨거워지는 귓불을 느낀 라모나가 황급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저 주둥이가 뭐가 예뻐서?
‘잠깐만, 압생트인가 뭔가 그거. 사실 술이 아니라 약이었던 거 아냐?’
그럴듯한데?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로베르트는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흐음, 좋은 꿈도 꾸셨는지?”
꿈이라는 말에 라모나의 미소에 균열이 일었다. 그녀는 황급히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다, 당연하죠.”
귀가 뜨거워지는 기분에 라모나가 황급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마침 때맞게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왜 그런 꿈을 꿔서.’
정신 차리자 라모나. 진짜 정신 차리자. 라모나는 애써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사이 주문한 애프터눈 티 세트가 나왔다.
1층에는 오이 샌드위치를 비롯한 가벼운 식사류의 티 푸드, 2층에는 특제 스콘과 라즈베리 잼, 클로티드 크림.
그리고 시선을 사로잡는 온갖 달콤한 디저트들로 가득한 3층까지.
화려한 트레이에 라모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오! 여기 생각보다 괜찮네?’
감탄한 그녀의 코가 찡긋거리며 오뚝하게 솟았다.
진작 와 볼 걸 그랬다. 라모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포크를 들었다.
그때였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네, 네?”
갑자기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 떨었다.
‘나 오늘 왜 이렇게 바보 같지?’
그녀는 속으로 아침에 차던 이불을 마저 차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어제 당신이 말했잖습니까.”
“뭘요?”
“잘생긴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이상하리만큼 당당한 얼굴의 로베르트가 한쪽 눈썹을 까딱해 보였다.
왠지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던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행여나 누가 들을까 싶어 그녀가 개미처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각하.”
“예?”
“각하가 이상형이라는 뜻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하하하, 이런.”
전혀 안심하지 않은 표정의 로베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번에 저한테 하신 말씀은 벌써 잊으신 겁니까?”
“네? 무슨 말이요?”
순간 지난번에 술을 마시며 했던 이야기가 라모나의 머릿속에 벼락처럼 떠올랐다.
<솔직히 각하 정말 잘생기긴 했어요. 능력도 있고, 몸도 좋고…… 다 인정해요.>
오, 술이시여. 아니, 신이시여. 제가 무슨 짓을 한 거죠.
미치겠다. 라모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네요?”
“제가 정말 너무나 잘생겼다고, 그것도 모자라 능력도 있고, 게다가 몸도 좋다며 극찬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언제?
경악한 라모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아니, 어떻게 그 말이 그렇게 변질될 수 있어요? 그 입 좀 다물라는 말 아니었어요?”
라모나의 대답에 로베르트가 씨익 웃었다.
“역시 기억하시는군요.”
아.
‘또 말려들었어.’
젠장, 젠장. 라모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라모나?”
로베르트는 신이 나서 그녀를 불렀다.
“라모나? 당신의 그이입니다?”
“……그런 사람 없어요.”
“오, 이렇게 뻔히 당신의 앞에 있는데? 나 상처받습니다.”
“각하는 좀 받으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왜 갈수록 저에게 박해집니까? 섭섭하게.”
로베르트가 진심으로 서운하다는 듯 눈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하지만 그 정도에 꿈쩍할 라모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연스레 접시 위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로베르트의 주둥이와는 별개로 음식은 맛있었다.
특히 주방장의 특제 레시피를 사용해 만든 스콘에는 고소한 버터 향이 가득해 클로티드 크림과 함께 먹으면 환상적인 조화를 이뤄냈다.
스콘 맛에 감탄하며 라모나는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가 봐.’
이 남자랑 같이 있는데도 음식이 맛있게 느껴지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녀는 로베르트가 또 입을 열기 전 열심히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과 잼을 발랐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로베르트의 입꼬리가 풀어졌다.
“라모나.”
“예?”
“여기 제법 괜찮지 않습니까?”
“으음, 네 훌륭하네요. 차도 좋고, 음식은 더 좋아요.”
“다행이군요.”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한 로베르트가 덧붙였다.
“보기 좋습니다.”
“네? 뭐가요?”
“역시 당신은 술을 마실 때보다 차를 마실 때 더 행복해 보여서요.”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라모나가 잠시 멈칫했다.
로베르트는 태연하게 에클레어를 나이프로 가르며 말했다.
“좋군요. 다음에도 당신이 좋아할 만한 걸 같이합시다.”
순간 목이 막힌 라모나가 찻잔을 들었다.
이상했다.
뜨거운 차 때문일까. 아니면 이상한 꿈 때문일까. 덥지도 않은데 귓불이 빨갛게 달아오른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