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저벅.
어두운 복도에 로베르트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라모나의 방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후우.”
많은 의미가 담긴 한숨이었다.
“……정말 미치겠군.”
로베르트는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라모나의 뺨에 닿았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이내 꼴사나운 자신의 행동에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변태도 아니고.”
쯧, 혀를 찬 그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공작저로 복귀하는 마차 안.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낮에 나눈 유디트와의 대화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 탓이었다.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였어. 그 아이는 확신이 있었단다. 마리안느의 모든 점을 알았고, 모든 점을 사랑했지. 그 애의 결핍까지도.>
그 말이 유독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로베르트는 난생처음으로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사랑으로 문제를 극복할 의지를 가졌지만, 사랑만으로는 문제를 극복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 사람.
그는 정말 유디트의 말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익숙한 사람을 발견한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하녀?>
로베르트는 즉시 마차를 멈춰 세웠다.
역시나, 그가 발견한 사람은 바로 라모나의 하녀 티아였다.
불길한 예감에 그가 저도 모르게 티아를 추궁했다.
<왜 네 주인과 떨어져 있지.>
<아이젠부르크 자작저로 아가씨의 심부름을 가는 길입니다, 각하.>
티아는 무릎을 짚은 채 숨을 헉헉댔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덜컹, 가슴이 내려앉은 로베르트가 물었다.
<급한 일인가?>
<그런 것은 아닌데…….>
말끝을 흐리던 티아가 이내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각하, 주제넘은 말씀입니다만 아가씨와 함께 있어 주세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똑바로 말하도록.>
<자작님과 자작 부인의 안전을 놓고 아가씨께서 많이 불안해하십니다. 혼자 계시면 안 될 것 같아요.>
그제야 로베르트는 티아가 무슨 심부름을 가는 것인지 이해했다.
<……그래.>
그 뒤로는 기억이 희미했다.
로베르트를 발견한 클레멘스가 무어라 잔소리를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심장이 너무 크게 두근거려 들리지 않았다.
저벅거리던 발걸음은 점차 뜀박질에 가까워졌고, 마침내 그가 라모나의 침실 앞에 도착했을 때.
<흡.>
그는 억눌린 울음소리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노크하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쾅쾅.
<라모나? 혹시 지금 들어가도 됩니까?>
<로베르트?>
되묻는 라모나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방 안에서 혼자 숨죽여 울고 있는 라모나의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점점 다급해졌다.
‘……젠장.’
그는 애써, 침착하게 억지로 쾌활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라모나? 당신의 그이입니다.>
마치 마법처럼, 그 말에 문이 열렸다.
라모나의 붉은 눈가를 발견한 로베르트는 그 자리에 우뚝하고 멈춰 섰다.
그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와락 끌어안을 뻔했다.
마지막 이성을 겨우겨우 끌어모은 로베르트는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유독 낯설었다.
말하고 나서야 로베르트는 자신이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수상한 몰골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도, 로지나를 이용한 계획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말했다는 사실도, 그의 손목에 자꾸 나타나는 푸른빛도.
그 순간에는 그 어느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입이 바짝 말랐다.
<미카엘라 벤트하임입니까? 아니면…….>
요하네스의 얼굴을 떠올린 로베르트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역시 그 개자식을 가만두면 안 됐다고 로베르트가 생각하는 순간,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베르트.>
<예.>
<저랑 술 한잔하지 않을래요?>
그는 그 순간 또다시 실감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마리안느 메닝엔과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흠, 마침 요즘 신기한 술이 유행하기는 하더군요. 그다지 좋은 술은 아닙니다만.>
<그럼 그걸로 하죠.>
<도수가 제법 높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오, 각하. 저는 아이젠부르크예요.>
라모나의 너스레에 로베르트는 웃음을 흘렸다.
‘안 괜찮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는 독한 술을 찾는 라모나의 속내가 술의 힘이라도 빌려 잠들고 싶은 것이리라 짐작했다.
이해했다.
잠 못 드는 밤은 너무나 길고 괴로웠으니까.
하지만 로베르트는 그녀의 속내를 모르는 척 태연하게 술을 따랐다.
그게 그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 그녀에 대한 예의였다.
잔에 스푼을 올리고, 각설탕에 물을 붓고. 로베르트는 그 모든 과정에서 유쾌한 태도를 유지했다.
다행히도 안정을 찾은 듯한 라모나는 그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고, 이내 생각에 잠긴 듯 쓸쓸한 눈빛이 되었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그가 물었다.
<이제 좀 괜찮습니까?>
그 질문에 짙푸른 눈동자가 로베르트를 향했다.
<……덕분에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깊은 바다 같은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로베르트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저야말로.>
<예?>
<저야말로 지난번에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사과도 이렇게.>
로베르트가 희뿌연 술잔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술의 힘을 빌려서 하지 않습니까. 정말이지 꼴사납기 짝이 없는 남자죠.>
그의 말에 라모나가 웃고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미소 짓고 말았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내 틀에 갇혀 당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당신을 규정했습니다. 당신을 시험하기 바빴고, 심지어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던 척했죠.>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라모나는 그의 사과에 대답하지 않았다. 또다시 그녀가 그어 둔 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내 라모나는 레헨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털어놓았고,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사과했다.
그녀의 사과는 로베르트의 귀에 꽂혔다.
<죄송해요, 전염병을 이용할 거라 생각했는데 제 예상이 틀렸어요. 각하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네요.>
그는 생각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에게 로베르트 메닝엔이 어떤 존재인지를.
그렇다면 로베르트 메닝엔에게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어떤 존재일까.
‘이런.’
로베르트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다시 각하입니까?>
<……예?>
<로베르트라 불러 주더니, 다시 각하가 되어 아쉽군요.>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나는 당신이 내게 그어 둔 그 선을 넘고 싶다.
로베르트는 압생트 한 모금을 홀짝이고는 입을 열었다.
<황태자를 그렇게 두려워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겁니까?>
그 어떤 계산도 속셈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질문이었다.
“후우.”
다시 한숨을 내쉰 로베르트가 발걸음을 멈춘 채 뒤를 돌았다.
그는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굳게 닫힌 라모나의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자신의 손목을 향했다.
마법처럼 그의 삶에 나타난 푸른빛.
라모나의 뺨에 입을 맞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가 푸른빛이 떠오르기라도 한다면.
그렇다면 이 마법 같은 일들이 전부 푸른빛에 의한 것이 되어 버릴까 봐.
“……진짜 미치겠군.”
한숨과 함께 중얼거린 로베르트가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는 다시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을 담아 속삭였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깊은 잠이 들어 좋은 꿈을 꾼다.”
안타깝게도 손목은 잠잠했다.
쯧, 미간을 찌푸린 로베르트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내 꿈을 꾼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손목에서 푸른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가늘게 피어난 푸른빛은 허공을 넘실넘실 가르며 날아갔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뛰노는 장난스러운 요정 같은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 빛은 라모나의 침실 문을 뚫고 살며시 스며들어 갔다.
“……!”
빛의 궤적을 쫓던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정말…… 연결된 것이었나?’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당장에라도 저 문을 열고 푸른빛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로베르트가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각하?”
마침 저택을 점검 중이던 집사 브리튼이 그를 발견했다.
당황한 로베르트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브리튼?”
“그 몹쓸 술은 다 드셨습니까?”
다행히도 브리튼의 눈에는 푸른빛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게만 보이는 건가?’
“물론 남김없이.”
어깨를 으쓱한 로베르트가 다시 자신의 침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손목에 감도는 푸른빛은 아직도 여전했다.
코너를 돌아 브리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로베르트는 충동적으로 자신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촉.
부드러운 위로와도 같은 입맞춤이었다.
한숨을 삼키며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는 길, 로베르트는 유디트의 말을 떠올렸다.
너도 상대에게 숨기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 그는 저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그의 생각은 동일했다.
메닝엔 공작으로서, 라모나에게 푸른빛에 대해 발설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말로는 그 자신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저벅, 저벅.
로베르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윽고 자신의 침실에 도착한 그가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젠장.”
오늘 밤은 유독 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