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덕분에요.”
할 말이 가득인데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는 게 이렇게 민망한 일일 줄이야.
한참을 테이블을 바라보며 입술만 달싹이던 라모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그녀의 대답에 로베르트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저야말로.”
“예?”
“저야말로 지난번에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사과도 이렇게.”
로베르트가 희뿌연 술잔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술의 힘을 빌려서 하지 않습니까. 정말이지 꼴사납기 짝이 없는 남자죠.”
그의 말에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제야 로베르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내 틀에 갇혀 당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당신을 규정했습니다. 당신을 시험하기 바빴고, 심지어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했죠.”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라모나는 그의 사과에 대답하지 않았다.
서로 감정이 상했는지를 신경 쓸 사이가 아니라는 말도, 그렇게 추측한 이유가 납득이 간다는 말도 전부 진심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녀는 사과받을 이유가 없었다.
도수가 센 술은 그녀의 온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라모나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말을 돌렸다.
“술이 많이 세네요. 식도가 화끈거려요.”
“아마 한 30분 후면 기절하듯 잠들 수 있을 겁니다.”
두 번이나 말하는 걸 보니 진짜 그녀를 재우기 위해 압생트를 고른 모양이었다.
역시 우는 걸 들킨 걸까.
이런 배려가 익숙하지 않았던 라모나가 괜히 뜨거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로베르트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남은 술을 홀짝였다.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머리가 아플 만큼 진한 알코올 냄새가 방 안에 감돌았다. 잠자코 그 향기를 즐기던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제가 레헨트의 상수도를 점검하는 게 좋을 거라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물론입니다.”
“그건…… 요하네스가 미카엘라를 레헨트의 일에 뛰어들게 만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개자식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거에 아주 능숙하니까요.”
요하네스라는 호칭에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라모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더군요.”
“그렇습니까.”
“제 반지를 훔쳐간 줄 알았던 소매치기 소년이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레헨트 출신이더군요.”
꿀꺽.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독한 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유 때문인지. 갑자기 목이 탔다.
“레헨트의 사람이 왜 수도까지 와서 소매치기를 하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 소년이 뭐라 대답했는지 아세요?”
“무어라 대답했습니까.”
“공화국에서 추방된 정치범들이 레헨트를 손에 넣었다 말했어요.”
“……!”
심상치 않은 이야기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정확한 배후는 알지 못해요. 하지만 확실한 건.”
라모나는 잘근 입술을 씹었다.
“그건 미카엘라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이죠.”
“정치범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습니까.”
“빈민가의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고 있다고 해요. 아무래도 약물이 관련 있는 것 같다는데, 소매치기 소년도 자세히는 모르는 듯했어요.”
하아, 한숨을 삼킨 그녀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전염병을 이용할 거라 생각했는데 제 예상이 틀렸어요. 각하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네요.”
라모나는 바짝 긴장했다. 로베르트가 자신을 나무랄 것이라고 짐작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짐작과 달리 로베르트는 피식 웃었다.
“다시 각하입니까?”
“……예?”
“로베르트라 불러 주더니, 다시 각하가 되어 상당히 아쉽군요.”
그가 턱을 괸 채로 라모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깊은 검은 눈이 그녀를 한가득 담았다.
당황한 라모나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 그게 지금 중요한가요?”
양 뺨이 화끈거렸다. 이건 분명 술기운 때문일 거야. 라모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히고자 애썼다.
로베르트는 여전히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 그 정도는 예상하에 있던 일입니다. 미카엘라 벤트하임이 움직인다는 건 당연히 황태자가 개입했다는 뜻일 테니까요. 저야말로 이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습니다만…….”
“마, 말씀하세요!”
쩌렁쩌렁한 라모나의 목소리에 로베르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말씀 안 했다가는 큰일 나겠군요.”
아,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부끄러움에 라모나의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로베르트는 압생트 한 모금을 홀짝였다.
“황태자를 그렇게 두려워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로베르트는 담담하게 물었다.
“궁금했습니다. 하녀복까지 입고 저를 찾아와야 할 만큼, 당신이 황태자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있는 건지.”
질문을 던지는 그의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과장하지 않고, 떠보지도 않는 진솔한 물음. 덕분에 시뻘겋게 달아오르던 라모나의 얼굴이 한결 가라앉았다.
고민하던 그녀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건…… 제가 미카엘라의 곁에서 지금까지 지켜본 요하네스는 한 사람의 삶을 끔찍하게 망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이 누락된 진실. 이게 그녀가 로베르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이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부끄럽지만, 저는 그의 눈에 띈 첫 번째 여자고요.”
그가 또 비웃을까 싶어 라모나는 힐끔 로베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로베르트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하군요. 게다가 미카엘라 벤트하임 문제까지 얽혔으니.”
흐음, 라모나는 팔짱을 끼고 가느다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웬일이에요?”
“예?”
“제 이야기에 이렇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다니. 혹시 다른 사람이 각하의 탈을 쓰고 온 건 아닐까 의심이 되네요.”
로베르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그가 깍지를 낀 채로 몸을 깊숙이 숙였다. 그의 눈 아래에 박힌 눈물점이 훅 가까워졌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알싸한 술 냄새 사이로 익숙한 향기가 풍겼다. 라모나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뭐, 뭐, 뭘요?”
“진짜 저인지 아닌지.”
그걸 어떻게? 라모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눈을 감아 보시죠.”
그의 말에 라모나의 생각이 멈춰 버렸다.
‘이거…… 완전 그거잖아.’
여기서 눈을 감으라니!
야심한 밤, 술 취한 남녀. 그들이 눈까지 감고 할 게 뭐가 있겠는가.
‘안 돼. 그럴 순 없어.’
그녀가 입술을 꾹 다문 채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베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각하가 너무 수상하니까요!”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가 놀란 척을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수상하다니, 대체 무슨 음흉한 생각을 하는 겁니까.”
말문이 막힌 라모나가 입술만 벙긋거리자, 피식 웃은 로베르트가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흐음, 이상한 짓 안 할 건데.”
“거짓말.”
“진짠데?”
젠장,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이렇게 가까운 자존감 과잉 변태는 너무 치명적이었다.
결국 라모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피식.
눈을 꼭 감은 그녀의 귓가에 로베르트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내 그가 물었다.
“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됩니까?”
이 남자가 정말 오늘 왜 이러는 걸까. 라모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귀를 울리는 낮은 목소리가, 그의 숨결이 그녀의 솜털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쥐었다.
“뭐, 뭔데요.”
“저한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당신도 한 잔씩 했는데 술기운을 빌려 못다 한 말을 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각하 먼저 해 보시든가요.”
톡 쏘는 라모나의 목소리에 로베르트가 빙긋 웃었다.
눈을 감았지만 알 수 있었다. 분명 그는 웃었다.
이내 그는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남자가 취향입니까.”
맥이 탁 풀리는 질문이었다.
세상에. 라모나가 헛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저 정말 2황자 전하랑 아무 사이 아니라니까요.”
“압니다.”
“그럼 왜요?”
“그냥, 궁금해서?”
취향, 취향이라. 고개를 갸웃하던 라모나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뭐…… 잘생긴 남자 좋아해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하여간. 자신만만한 그의 대답에 라모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술기운 때문일까. 눈을 감고 있어서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점점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꼿꼿이 세우고 있던 라모나의 허리가 슬며시 풀어졌다.
“그래서 당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뭡니까.”
로베르트의 질문 또한 어둠 속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졸려.’
반쯤 잠이 든 상태로 그녀는 말했다.
“각하가 저를 믿을 수 없다는 건 제가 가장 잘…… 알아요…….”
로베르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한 번만 저를 믿어 달라고 말하는 건……. 지나친 부탁일까요?”
주룩.
라모나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서러운 눈물이 감긴 눈꺼풀 사이로 새어 나왔다.
이내, 툭.
옷자락을 꽉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새근새근한 숨소리만 감도는 라모나의 침실.
로베르트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전혀.”
쪽.
라모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가 그녀를 살며시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로베르트는 축 늘어진 손을 시트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고, 찬 공기가 새어 들어가지 않게 꼼꼼히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윽고, 달칵.
라모나의 침실 문이 열렸다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