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벤을 돌려보내고, 라모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창가를 서성였다.
그런 그녀를 걱정한 티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으응, 아냐 티아.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없어야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 라모나는 벤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도와주세요, 아가씨. 레헨트는 지금 그 자식들의 손아귀에 있어요!>
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공화국에서 추방당한 정치범들이 무기를 손에 넣어 빈민가를 완전히 점령했고,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그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소식.
그리고 그들이 정체불명의 약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까지.
역시 과거에는 없던 일이다.
젠장. 라모나가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무기까지 가지고 있다는 건 외부 세력이 개입했다는 뜻인데.’
자잘한 밀수로 먹고사는 레헨트의 정치범들에게 무기를 구매할 만한 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종류의 일은 미카엘라가 벌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시 짐작 가는 범인은…….
레이먼의 편지를 가로채고, 미카엘라의 행동을 쉽게 읽을 만한 권력자.
눈부시게 푸른 눈동자를 가진 제국의 천사.
그의 손이 레헨트에 닿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가 났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는데도 요하네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화였다.
이내 서서히, 뼛속 깊이 새겨진 두려움이 그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미래는 바뀌지 않을지도 몰라.’
레이먼은 서쪽 경계에서 실종되고, 아이젠부르크는 멸문당하고, 라모나는 또다시 요하네스의 장난감으로 살다 사형당하는 미래.
절망적인 상상에 라모나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침착해, 라모나. 침착해야 해.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티아.”
“네! 아가씨.”
“자작저에 좀 다녀올래? 부모님이 잘 계시나 확인 좀 해 줘, 레이먼 소식이 온 게 없는지도 같이.”
“네……?”
뜬금없는 이야기에 티아가 당황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내 라모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눈치챈 티아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장 다녀올게요! 하지만 아가씨, 너무 주제넘은 말이지만……….”
망설이던 티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댄버스 부인을 불러올까요?”
걱정시켰네. 라모나는 또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차마 괜찮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가족들이 모두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기 전에는 이 불안함이 가시지 않을 것 같은 탓이었다.
“……응. 네가 다녀와 주는 편이 한결 더 안심될 것 같아.”
“네! 그럼 얼른 다녀올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티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문밖으로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히고, 라모나는 허물어지듯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요하네스는 레헨트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일까.
미카엘라에게 정보를 흘렸던 과거의 일을 떠올려 본다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미카엘라는 라모나를 회유하지 못한 것으로 그에게 질책을 받고 있을 테니, 이번에는 그가 미카엘라에게 정보를 흘리는 대신 직접 움직이기를 택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두려운 기분이 드는 것일까.
요하네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온통 하얗게 물들고, 누가 목이라도 조르는 듯이 숨이 막혀 왔다.
“으으…….”
그녀는 저도 모르게 벽을 움켜쥐었다.
회귀 전, 레이먼이 사라진 그날. 라모나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요하네스는 태연하게 그 소식을 전했다.
<네 동생이 실종되었다더군.>
마치 식사 메뉴를 읊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라모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전하? 그게 무슨…… 무슨 말씀이신지……>
<그 말 그대로야, 라모나. 아무래도 들짐승에게 당한 것 같다는 보고도 함께 올라왔어. 시신도 찾지 못했다니 안타깝지.>
레이먼의 죽음을 암시하는 요하네스의 말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레이먼이 고작 들짐승에게……!>
달그락,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요하네스가 우아하게 턱을 닦았다.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유를 알려 줄까?>
<예?>
<훈련받은 정예 기사인 네 동생이 들짐승에게 당한 이유 말이야.>
<…….>
불길한 예감에 라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요하네스는 무감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감히 내 눈을 속이고 네 동생과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기 때문이지.>
<……전하?>
<라모나.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단다. 그건 귀찮은 일이거든.>
손을 덜덜 떠는 그녀를 향해 요하네스는 속삭였다.
<그런데 네가 자꾸 날 그렇게 만들지 않느냐, 응?>
과거의 기억에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흡.”
후두둑.
참아 내지 못한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울지 마, 라모나. 운다고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어. 그녀는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한번 터져 버린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울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라모나가 입을 틀어막던 그때였다.
쾅쾅.
평소와는 달리 제법 큰 노크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당황한 라모나가 목이 멘 소리로 물었다.
“티아?”
티아가 발이 빠르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자작저에 다녀올 수 있나? 그녀가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이내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라모나? 혹시 지금 들어가도 됩니까?”
“로베르트?”
그가 갑자기 무슨 일일까. 당황한 라모나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로베르트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모나? 당신의 그이입니다.”
여기서 저 ‘당신의 그이’ 타령이 여기서 나올 줄이야.
사방이 캄캄한 방 안에 새어 들어온 한 줄기 빛처럼, 그 한마디가 라모나를 감싸고 있던 불안함을 몰아냈다.
‘……아, 정말.’
한결같다니까.
어처구나 없는 말에 라모나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울다가 웃으면 안 된다는데. 저 방정맞은 주둥이를 두고 어떻게 안 웃을 수 있단 말인가.
옷소매로 눈가를 꾹꾹 눌러 닦은 라모나가 문을 열었다.
“라모나, 무슨 일…….”
그녀의 붉은 눈가를 알아챈 로베르트가 그 자리에 우뚝하고 멈춰 섰다.
갑자기 양손을 뻗은 로베르트는 이내 주춤하더니 라모나의 어깨를 잡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로베르트는 화가 난 것도 같고, 놀란 것 같기도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저 남자의 얼굴이 라모나를 안심시키다니.
라모나는 로베르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미카엘라 벤트하임입니까? 아니면…….”
여기서 바로 그 개자식을 떠올리다니, 눈치가 참 빠르기도 하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로베르트.”
“예.”
“저랑 술 한잔하지 않을래요?”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라모나가 봤던 그의 표정 중 가장 멍청한 모습이었다.
* * *
독한 술이 마시고 싶다는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흠, 마침 요즘 신기한 술이 유행하기는 하더군요. 그다지 좋은 술은 아닙니다만.”
“그럼 그걸로 하죠.”
“도수가 제법 높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오, 각하. 저는 아이젠부르크예요.”
라모나의 대답에 피식 웃은 로베르트가 브리튼에게 압생트를 가져오라 명했다.
이내 브리튼이 가지고 온 초록색 술병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건가요?”
“많이 마시면 안 되겠지만 한 잔쯤이야.”
로베르트의 대답에 라모나가 브리튼을 바라보았다.
브리튼은 제법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제게 의견을 구하시는 것이라면 한 잔도 안 마시는 걸 추천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또 마셔 보고 싶지. 라모나는 대답 없이 브리튼이 술과 함께 가져온 각설탕을 은근슬쩍 집어 들었다.
“이 설탕은 타서 마시는 건가요?”
“방법이 있습니다.”
로베르트는 연두색에 가까운 술을 잔에 따랐다. 향수처럼 진한 허브 향과 알코올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이윽고 그는 독특한 문양의 구멍이 잔뜩 뚫린 스푼을 잔 위에 올렸다.
호기심 가득한 라모나의 눈빛에 로베르트가 피식 웃더니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이 위에 각설탕을 올리고.”
“스푼 위에요?”
“예. 그리고 이렇게.”
주전자를 든 로베르트가 각설탕 위로 물을 조금씩 떨어뜨리자 초록색 술이 조금씩 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재밌는 광경에 라모나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런 술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에드윈이 알려 주더군요.”
에드윈의 이름에 로지나를 떠올린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무슨 의미입니까?”
“별것 아니에요.”
“그러면 더 궁금한데.”
“못된 짓은 다 그쪽이랑 같이할 것 같았거든요.”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얼굴의 브리튼이 작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고는 자리를 떴다.
달칵.
문이 닫히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술잔을 구경하던 라모나가 물었다.
“마시는 법도 따로 있나요?”
“예, 한입에 털어 넣는 겁니다.”
엄청 독해 보이는데 의외네? 라모나는 눈을 질끈 감고는 압생트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녀를 지켜보는 로베르트가 우아하게 술을 한 모금 들이켜며 말했다.
“오, 농담이었습니다만.”
“풉.”
어쩐지 너무 독하더라니.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술을 뿜어 버린 라모나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로베르트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빨리 취하기에는 그 방법이 좋을 테니까요.”
“……진짜 못됐다.”
“칭찬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러니까 사랑을 못 해 봤지.”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발끈한 라모나는 아니라고 해명하려 했으나 이내 멈칫하고 말았다.
요하네스 그 개자식과의 관계에 그런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급격히 어두워진 라모나의 얼굴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탁.
조용히 잔을 내려놓은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좀 괜찮습니까?”
깊고 검은 눈동자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