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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43화 (44/151)

#43화

Chapter 6. 오셀튼 백작저의 티파티

라모나가 벤과 대화하는 사이, 로베르트는 밀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를 보며 로베르트가 혀를 찼다.

‘쯧. 오늘 내로 끝내지는 못하겠군.’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엘츠 백작의 일까지 쳐 내려다 보니 일거리가 더 많아졌다.

여전히 엘츠 백작과 요하네스와의 연결 고리는 오리무중이었다.

수상한 쪽은 역시 시가 모임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베르나딘의 어머니,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 호스트인 모임에서 엘츠 백작과 요하네스와의 연결 고리가 생겼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분명 뭔가를 놓치고 있는 모양인데……’

그게 뭘까. 생각에 잠긴 로베르트가 이마를 찌푸렸다.

오늘 아침 들었던 라모나와 하녀의 대화도 영 수상쩍었다.

<저번에 그 두 사람이 공작 각하를 놓고 서로 머리채 잡고 싸웠잖아.>

로지나와 레이디 바텐베르크의 대립. 그건 로베르트가 계획했던 일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 아니라.

“확실히 이상하단 말이지.”

그가 지금까지 파악한 라모나에게는 기묘한 습관이 있었다.

바네사 황녀와의 약혼도 그렇고, 로지나의 일도 그렇고. 가끔씩 그녀는 로베르트와는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왜 자꾸 이미 일어난 일처럼 말을 하는 거지?’

습관처럼 턱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물끄러미 손목을 바라보았다.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는 두 남녀 사이의 인연을 끈을 손목의 실이라고 표현한다는 말이 들은 적이 있다.

신이 인연인 두 사람의 손목에 푸른 실과 붉은 실을 하나씩 꺼내어 묶어 준다는 미신. 로베르트는 그 미신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신이 자신에게 준 것이 푸른빛의 능력이라면, 그녀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

“흐음.”

그는 손목을 계속해서 바라보았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로베르트는 결국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야겠군.”

어차피 오늘 내로 처리하지 못할 서류, 잠깐 미룬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었다.

* * *

커피 향이 물씬 풍기는 커피 하우스.

은은한 광택이 도는 짙은 녹색 숄을 두른 유디트 메닝엔이 의자에 앉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작년에 새로 생긴 커피 하우스입니다. 혼자 오기는 아쉬운 곳이라서요.”

맞은편에 앉은 로베르트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할머님 입맛에도 맞을 겁니다.”

그의 안목, 취향, 식습관까지. 모든 것은 유디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로베르트의 마음에 든 곳은 유디트의 마음에도 들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커피 잔을 든 유디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수도가 좋기는 좋아.”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따뜻한 커피 잔을 손에 쥔 유디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가 커피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예?”

“고민거리가 있을 때 커피 하우스를 찾는 것은 내 버릇이지.”

“…….”

“네 버릇이기도 하고.”

대답하지 못하는 손자의 모습에 유디트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내가 맞춰 볼까?”

“그러지 않아 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로베르트가 질색하자 유디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그녀는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원래 사람 마음이 제일 어려운 법이지.”

그녀의 말의 의미를 파악한 로베르트가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렸다.

“비가 올 것 같군요.”

유디트는 짓궂게 손자를 놀리는 대신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회색 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은 정말 언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던 유디트가 손자의 이름을 불렀다.

“……로베르트.”

“예.”

“그날도 비가 왔었지. 기억하느냐.”

기억할 수밖에 없다. 로베르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예.”

길거리 한복판에서 뷔나우 백작 부인이 유디트의 길을 막아선 그날.

<공작 부인, 제 딸이 아무리 밉다 한들 이런 식으로 저희를 망신 주시다니요. 정말 차가운 분이십니다.>

그렇게 말하며 힐끔힐끔 로베르트의 얼굴을 살피던 뷔나우 백작 부인의 표정을 그는 생생하게 기억했다.

<세상에 어찌 어미와 자식을 이리 떼어 놓고…….>

뷔나우 백작 부인이 억지로 대성통곡을 하던 그날은 마침 비가 내렸다.

그녀가 로베르트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난동을 부린 탓에 로베르트는 비를 쫄딱 맞았고, 결국 감기에 걸려 앓아눕고 말았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마리안느가 달려간 곳은 로베르트의 곁이 아니었다.

<리안드로…… 큰일 났어.>

그녀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찾아간 곳은 남편 리안드로가 일하고 있던 상단이었다.

<마리안느? 무슨 일이야.>

<이번에야말로 각하께서 화가 많이 나셨을 거야. 흑, 이대로 날 내치기라도 하시면 어떡해!>

부랴부랴 마리안느를 쫓아온 공작가의 하녀들이 그녀를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전까지 유디트는 마리안느를 안쓰럽게 여겼다.

그녀의 결핍을 이해했고, 아들의 사랑을 존중했다. 항상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마리안느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그날, 열이 펄펄 끓는 로베르트의 곁을 지키며, 유디트는 마리안느를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았다.

지나간 기억에 유디트의 눈이 아득하게 가라앉았다.

“몇 번이고 생각했단다. 그날, 외출을 하지 않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네가 아프지 않았다면 나도 그렇게까지 그 아이를 외면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야.”

“그건 단순한 사고였을 뿐입니다.”

로베르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아버지가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것도 사고기는 하군요.”

그의 말에 유디트가 소년처럼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그리고 네가 사랑에 빠진 것처럼?”

“……예?”

당황한 로베르트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오해십니다.”

“이런, 난 네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에게 첫눈에 반해 약혼을 서두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더냐?”

이런.

그제야 로베르트는 유디트의 유도 신문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어붙어 있던 로베르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정말 할머님은 제가 당해 낼 수 없군요.”

“백 년은 이르지.”

노련한 유디트의 대답에 로베르트는 결국 슬그머니 고민을 털어놓았다.

“만약에 말입니다. 신뢰할 수 없는 상대와 아주 중요한 일을 같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할머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보통 그런 상대와 웬만한 일을 같이하지 않겠지만, 네가 고민하는 것을 보면 그 상대와 꼭 함께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

“역시 현명하십니다.”

“그럴 때 나는 반대로 생각한단다.”

유디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어제는 분명 신뢰할 수 있었던 상대도 오늘은 나를 배신하기 마련이거든. 어차피 모든 인간관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선택의 폭이 좀 넓어지지.”

맞는 말이지만 그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생각에 잠긴 로베르트가 입을 다물었다.

피식 웃은 유디트가 마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내 손자라면 상대에게 숨기는 것 하나쯤은 당연히 있겠지. 그렇다면 결국 서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은 똑같지 않겠느냐. 하지만 말이다, 로베르트.”

“예.”

“그게 예외인 관계가 딱 하나 있단다.”

“……무엇입니까.”

왠지 대답을 알 것 같은 기분에 로베르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랑하는 사이.”

유디트의 입에서 떨어진 대답이 오늘따라 왜 이리 가슴에 쿡, 하고 박히는 것일까.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킨 로베르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할머님께서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그래? 이 늙은이도 이제 감이 떨어진 모양이야.”

달그락.

유디트는 그를 추궁하는 대신 여유롭게 다시 커피 잔을 들었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은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쯧, 그새 식어 버렸어. 하여간 뭐든지 때를 놓치면 후회할 일뿐이라니까.”

로베르트는 유디트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새로 주문할까요?”

“됐다, 그러고 보니 곧 사교 시즌이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는 아직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다고?”

“예, 그렇다 하더군요.”

“조금 늦었구나. 벤트하임 때문인가?”

“그런 모양입니다.”

“그래, 그럼 역시 괜찮은 샤프롱이 필요하겠어.”

“할머님?”

유디트의 말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달그락.

그러나 유디트는 대답 없이 잔을 내려놓고는 숄을 고쳐 둘렀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이만하면 단서는 다 줬다는 듯한 태도였다. 결국 로베르트도 유디트를 따라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로베르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커피 하우스를 나서는 길, 유디트가 물었다.

“너는 볼일을 보러 간다고?”

“예, 조금 늦게 귀가할 듯합니다.”

“고생이 많구나.”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에 오르기 전, 유디트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베르트.”

“네.”

“아까 하던 네 아버지 이야기 말이다.”

“아, 네.”

“네 아버지가 유달리 잘하던 게 뭔 줄 아니?”

“음, 글쎄요. 딱히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부모에게 박하기는.”

가볍게 눈을 흘긴 유디트가 말을 이었다.

“리안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기가 막히게 제가 원하는 것을 잘 알아차렸지. 그 나이 때 애들은 자기가 졸린 줄도 모르고 짜증을 부리기 마련인데, 리안드로는 좀 상태가 안 좋다 싶으면 쪼르르 달려와 졸린 것 같다고 내 귀에 속삭이곤 했어.”

“그렇습니까.”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였어. 그 아이는 확신이 있었단다. 마리안느의 모든 점을 알았고, 모든 점을 사랑했지. 그 애의 결핍까지도.”

세상을 떠난 아들의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내 유디트가 은근한 눈빛으로 로베르트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너는…… 뭐 됐다. 너는 리안드로보다는 클레멘스를 닮았으니까.”

“그거 칭찬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무렴 내가 내 남편을 욕할까 보냐.”

로베르트의 대답에 유디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할머님.”

“오냐.”

“혹시 제 부모님의 결혼을 허락한 일을 후회한 적은 없으십니까?”

아픈 질문에 유디트의 얼굴에 감돌던 미소가 사라졌다.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들이 죽었는데 없다면 거짓이겠지, 다만.”

유디트는 로베르트의 한 손을 붙잡고 마차에 올랐다.

“리안드로는 한 번도 결혼을 후회한 적이 없단다. 그 아이는 죽는 순간에도 그랬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다.”

마차에 앉아 꼿꼿하게 허리를 편 유디트의 눈빛에 긴 세월이 묻어 있었다.

히이잉.

이내 요란한 말 소리와 함께 마차는 공작저를 향해 출발했다.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쯧.”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생각이 더 늘어나고 말았다.

역시 오늘 내로 일을 다 처리하기는 그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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