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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42화 (43/151)

#42화

잠시 후, 라모나의 건너편에 앉은 로베르트가 여유롭게 팔짱을 꼈다.

“머리채라니 그런 자극적이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녀에게 정보를 캐 보려는 의도가 다분한 질문이었다.

젠장,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라모나는 일단 그를 향해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꿈을 좀 꿔서요.”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잠자리가 바뀌다 보니까 꿈자리가 뒤숭숭해졌나 봐요.”

화제를 바꾸려는 라모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베르트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습관처럼 턱을 만지작거렸다.

“흐음? 레이디 클라이스트라면…… 로지나?”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로베르트가 친근하게 로지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라모나의 신경을 긁을 줄이야.

‘둘이 많이 친한가 보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사실이었다.

클라이스트 백작가는 메닝엔의 가신이니까.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라모나와 미카엘라의 사이가 가까웠던 것처럼, 클라이스트 남매와 로베르트의 사이도 가까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실에 왜 기분이 상하는 건지.

라모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저 꿈일 뿐이에요. 그래서 아침부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거죠?

“엄청난 소문이 돌기에 말입니다.”

“아아. 그거요?”

그제야 로베르트의 방문 의도를 알아챈 라모나가 코웃음을 쳤다.

역시 알폰조의 이야기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다 헛소문일 뿐이에요. 2황자 전하와 저는 친분이랄 것도 없어요. 며칠 전 우연히 마주친 게 전부인걸요.”

“그렇다 믿고 싶은데, 레이디 슈타이덴과도 친분이 있으신 듯하다.”

라모나는 그녀와는 전혀 친분이 없다고 해명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내가 왜 굳이 변명해야 해?’

저 주둥이도 약혼녀 앞에서 로지나니 뭐니 친한 척 다른 레이디의 이름을 입에 담는데, 굳이? 나만?

고작 티타임 초대장 가지고?

‘난 잘못한 것도 없잖아.’

흐음, 라모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차향을 음미했다.

은근히 대답을 기다리는 로베르트의 기색을 보니 속이 시원하다.

달그락.

라모나는 우아하게 손을 뻗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저 남자에게 휘둘리면서 살지 말자.’

다시 한번 결심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구와 차를 마실지도 각하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 미처 몰랐네요.”

“그럴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뭐, 계약은 잊지 않으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로베르트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정부 말입니다.”

난 또 뭐라고. 그의 걱정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네. 이해했어요.”

그러나 로베르트의 얼굴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이내 그가 라모나를 향해 몸을 살짝 숙이고는 엄숙하게 선언하듯 말했다.

“죽음으로 사죄, 잊지 않으셨겠죠?”

저건 또 무슨 개소리야?

로베르트의 망언에 라모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저보고 죽으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커흠, 흠. 그건 아니고 그냥 정부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어처구니가 없었던 라모나가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과라도 할 줄 알았던 로베르트의 입에서는 영 엉뚱한 말이 나왔다.

“몸 좋은 남자가 취향입니까?”

“…….”

저 새X 또 왜 저래? 대답 없는 라모나에게 로베르트는 머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흐음…… 과한 건 좀 별로지 않습니까? 적당한 게 낫지 않나?”

“저기요, 각하.”

“예?”

“저 진짜 2황자 전하랑 아무 사이도 아니거든요?”

“…….”

자신이 보기에도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로베르트가 입을 다물었다.

라모나는 삐딱하게 팔짱을 낀 채 되물었다.

“아니면 혹시 제가 2황자 전하와 그런 사이이기를 바라세요?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디 한번 제가 힘써 볼까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벌게진 로베르트의 목덜미를 눈치채지 못한 라모나가 끌끌 혀를 찼다.

‘하여간 저 남자는 항상 어디로 튈지 예측이 안 된다니까.’

역시 괜히 메닝엔의 공주님이 아니야.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때였다.

똑똑.

“레이디.”

시녀장, 댄버스 부인이 문을 두드렸다.

“수도 치안대에서 레이디를 찾아왔습니다.”

소년을 1주일 내로 찾아오겠다던 치안대장의 장담이 허언은 아닌 모양이었다.

* * *

“안녕.”

라모나는 그녀를 잔뜩 경계하는 소년에게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저 아이는 오랜만이라는 인사에 담긴 의미를 아마 평생 모르겠지.’

라모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이내 상냥한 미소를 입가에 띤 그녀가 소년에게 버터 쿠키를 건넸다.

“이것 좀 먹을래? 배고프지 않니?”

하지만 소년, 벤은 대답 대신 어깨를 웅크렸다.

눈덩이가 시퍼렇게 멍든 것을 보니 치안대장이 벤을 험하게 다룬 모양이었다.

‘쯧.’

속으로 혀를 찬 라모나는 다시 한번 소년에게 버터 쿠키를 건넸다.

“너 버터 쿠키 좋아하잖아.”

“…….”

들켰다는 듯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소년의 경계는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결국 버터 쿠키를 내려놓은 라모나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름은 벤, 성은 없음. 13세. 레헨트 출신에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배를 탔다가 행방불명. 동생이 셋, 그중 하나는 폐병에 걸려 치료 중.”

“그, 그걸 어떻게…….”

그녀의 입에서 동생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벤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내 그것을 협박으로 받아들인 벤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아가씨의 반지를 훔친 적이 없어요. 오해하신 게 분명해요.”

“알아.”

“예?”

당황한 소년에게 라모나가 손을 펴 보였다. 그녀의 왼쪽 손에서 푸른 사파이어가 고아하게 빛났다.

“그 반지는 여기 있거든.”

“……!”

순간 분노한 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모나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눈빛으로 소년에게 명했다.

“앉아.”

“지금 제가 그 반지 때문에 무슨 일을……!”

“앉으라고 했어.”

벤이 입술을 꽉 깨물며 라모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먹을 올리거나 주제넘은 욕설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벤의 나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자제력이었다.

지난 생에도 그랬다.

영리하고 재빠른 레헨트의 심부름꾼 벤은 제 주제를 잘 파악하고, 분에 넘치는 것을 탐하지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건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본능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라모나는 벤을 잘 이용했고…….

‘그 덕에 벤은 죽어야 했지.’

벤을 죽이라 명령한 것은 미카엘라지만, 라모나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소년의 최후가 그렇게 될 줄 몰랐다는 것은 거짓말일 테니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라모나는 가라앉은 눈이 되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벤을 바라보았다.

양 뺨에 가득한 주근깨며, 햇볕에 그을린 얼굴, 빛이 바랜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전부 라모나가 기억하던 그 벤의 모습이었다.

외면하고 싶던 과거의 기억에 속이 울렁거렸다.

토할 것 같은 기분에 라모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레헨트 사람이 왜 수도에 올라와 있지?”

라모나의 질문에 벤이 빈정대듯 대답했다.

“다 먹고 살기 힘든 탓이죠.”

“네가 동생들을 두고 수도까지 올만큼 레헨트가 먹고 살기 힘든 곳은 아닐 텐데?”

“……아가씨께서 흥미를 가지실 만한 이야기는 아닌데요.”

“버릇없는 대답이구나. 메닝엔의 안주인이 될 사람으로서 다시 묻지. 레헨트의 사정이 지금 그렇게 어려운가?”

메닝엔의 안주인이라는 말에 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소년은 무언가를 갈등하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귀하게 자란 아가씨의 눈에는 당연히 레헨트가 그렇게 보이겠죠.”

“무례하구나. 내가 귀하게 자란 것과 상관없이 레헨트는 풍족한 땅이지.”

“관광지만 보았을 때는 그렇죠.”

“빈민가의 이야기를 하는 거니? 하지만 이 시기라면 빈민가의 사람들은 레몬 농가를 도울 텐데, 대가도 부족할 정도는 아닐 테고.”

수도 귀족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라모나가 생각보다 레헨트의 생리를 잘 알고 있자 벤의 눈이 커졌다.

라모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무례를 용서하는 것은 한 번뿐이야. 이번에는 네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라는 뜻이란다.”

꿀꺽.

긴장한 벤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라모나는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짙은 남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다시 한번 묻지. 네가 소매치기를 하러 수도에 올라올 만큼 지금 레헨트가 먹고살기 어려운 곳이니?”

이내, 털썩.

벤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지?”

당황한 라모나가 벤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도와주세요, 아가씨. 레헨트는 지금…….”

벤은 절박한 얼굴로 외쳤다.

“그 자식들의 손아귀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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