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좋아서요. 너무 좋아서 비명을 지른 거예요.”
‘저 자의식 과잉 변태. 내가 올 줄 알고 저러고 있었던 거지?’
급히 집어 던진 게 분명한 그의 상의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휘말리지 말자, 휘말리지 말자. 라모나는 스스로를 세뇌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녀를 놀리듯 로베르트가 빙긋 웃었다.
“기쁜 소식이군요. 당신이 제 몸을 이리도 좋아하다니.”
순간 말문이 막힌 라모나가 입을 쩍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로베르트는 보란 듯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이런 몸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네.”
왠지 모르게 밀려오는 불길한 예감에 라모나가 뒤로 주춤하던 그때, 그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조각 같지 않습니까?”
“……예? 뭐가요?”
“저 말입니다.”
정말 미친 건가.
라모나가 그를 향해 눈빛으로 욕설을 날릴수록 로베르트의 미소는 짙어져 갔다.
툭툭.
그가 자신의 옆 자리를 두들기며 제안했다.
“이리 오시죠, 나의 천사.”
역시 한 소리를 하는 게 나으려나. 라모나는 고민 끝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양할게요. 저는 여기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네요.”
“어째서죠?”
“그…… 각하의 몰골 때문에?”
“설마 그럴 리가.”
“무슨 의미세요?”
“당신 취향이 이런 쪽 아닙니까?”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아닌데요.”
“그럼 그렇다고 하죠.”
“그렇다고 할 게 아니라 진짜로 아닌데요.”
“좋아요, 알겠습니다.”
‘하나도 안 알아들은 얼굴이잖아.’
라모나의 얼굴이 험악해질수록 로베르트의 눈이 곱게 휘었다.
기가 막혀. 그의 뻔뻔한 자존감이 어이없었던 라모나가 헛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녀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안 돼, 라모나. 더 이상 이 남자에게 휘둘리지 않기로 마음먹었잖아. 정신 차려.’
절대 안정, 절대 안정.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쭤볼 게 좀 있는데요.”
제법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흐음? 그녀의 미묘한 태도 변화를 눈치챘는지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내 그가 눈썹을 까딱했다.
“기꺼이.”
“약혼녀로서 제가 메닝엔의 이름을 어디까지 들먹일 수 있을까요?”
제법 당돌하고도 위험한 질문이었다. 라모나도 그 사실을 알기에 긴장했다.
하지만 로베르트의 입가는 기묘하게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변태같이 표정이 왜 저래?’
생각해 보니 정말 변태가 맞기는 했다.
‘그러니까 저런 몰골로 조각이니 뭐니 하겠지.’
하긴, 정상인은 그런 말 안 하지. 납득한 라모나가 묘하게 음흉한 로베르트의 얼굴을 외면했다.
그녀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로베르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흐음. 약혼녀로서, 라…….”
“제가 외부에서 그 사실을 들먹이는 건 아무래도 좀 곤란할까요?”
“뭐, 아닙니다. 계약서만 쓰지 않는다면 될 것 같습니다만.”
“반가운 소식이네요.”
활짝 웃은 라모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아침부터 방해해서 죄송했어요.”
당황한 기색의 로베르트가 그녀를 붙잡았다.
“라모나?”
“예?”
“벌써 갑니까?”
“네. 볼일은 이게 끝이에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싶어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저…….”
“듣고 있어요, 말씀하세요.”
그녀는 이제 웬만한 말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로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이지 라모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말이었다.
“이상한 의도는 정말 아닙니다만, 혹시 제게 입 맞추고 싶지는 않습니까?”
입을 막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있는데요. 라모나는 대답 대신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 *
해가 쨍쨍한 오후, 경쾌한 포니테일로 머리를 올려 묶은 라모나가 마차에서 내렸다.
지난번에 보았던 소매치기 소년, 벤을 찾기 위함이었다.
레헨트의 빈민가를 누비던 심부름꾼. 눈치가 빨라 라모나도 유용하게 부렸던 그 아이가 왜 수도에 있는 것인지, 이것도 바뀐 미래와 관련 있는 것인지.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로베르트가 새 호위를 붙였다. 바짝 기합이 든 새 호위를 힐끔 살핀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저번 호위는 못 미더웠던 모양이지?’
묘하게 이전 호위보다 몸이 날렵한 느낌의 기사였지만, 라모나는 미처 그 부분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 잘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또 아침의 일이 떠올랐다.
<이상한 의도는 정말 아닙니다만, 혹시 제게 입 맞추고 싶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그 질문이 이상한 의도가 아닐 수 있을까.
‘……진짜 제정신인가?’
정신 나간 또라이. 재앙의 주둥이.
‘얼굴 낭비다, 정말.’
라모나는 또다시 로베르트에 대한 욕을 속으로 퍼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라? 아가씨.”
그녀의 뒤를 쫓던 티아가 황급히 외쳤다.
“이쪽은 시장이 아니라…….”
“알아. 치안대로 갈 거야.”
“치안대요?”
지난번에 시장에서 벤을 만났다고, 오늘도 시장으로 가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응, 그쪽이 분명 더 빠를 거야.”
치안대로 향하는 라모나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수도 치안대.
힐끔, 라모나를 훑어본 치안대원이 입을 열었다.
“흐으음, 레이디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사람을 하나 찾으려 하는데.”
“사람을요?”
“중요한 물건을 소매치기당해서 그걸 찾으려 해.”
“에에…… 네. 찾아보겠습니다.”
머리를 벅벅 긁는 그에게서 귀찮다는 티가 팍팍 났다.
라모나는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수도 치안대가 워낙 악명 높기는 했다. 예의 악명이란 일은 깔려 죽을 만큼 많고, 인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뭐든지 대충대충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웬만한 귀족들의 말에는 꿈쩍도 안 한다는 그들은 뒷돈을 찔러주면 그제야 슬그머니 일을 처리한다고 했다.
하지만 라모나는 뒷돈을 찔러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뒤에 있는 것은 보통의 웬만한 귀족이 아니었으니까.
누군가 좀 이상한 사람이 말했다. 때로는 치졸한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라모나는 기꺼이 그 이상한 남자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든 그녀가 말했다.
“그래, 그럼 찾으면 메닝엔 공작저로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도록 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메닝엔이라는 이름에 치안대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예?”
그럼 그렇지. 라모나가 코웃음을 쳤다.
“못 들었어? 메닝엔 공작저로 사람을 보내라고.”
메닝엔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치안대 내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들의 대장이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서 있는 대원을 빠르게 밀어내고 라모나를 응대했다.
“그, 그…… 레이디. 혹시 성함이…….”
“아이젠부르크 라모나.”
라모나는 새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모르나?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쓸 데가 있었다. 설령 그게 정신 나간 재앙의 주둥이를 가진 남자라 할지라도.
“흐어어.”
치안대장은 너무 놀란 나머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급히 정신을 차린 치안대장이 눈에 띄게 공손해진 태도로 물었다.
“그, 그, 그러면 레이디께서 잃어버리신 물건은 호오옥시 어떤 것일지…… 요…….”
“우리 그! 이! 어머, 내가 말실수를 했네. 메닝엔 각하가 선물해 준 사파이어 반지를 도둑맞았는데 말이지.”
“히익!”
“히익!”
각자 다른 의미로 놀란 두 사람이 숨을 들이켰다.
치안대장은 ‘메닝엔 공작’이라는 말에, 티아는 ‘우리 그! 이!’라는 말에 놀란 것이었다.
혼란 속에서 라모나만 태연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차피 메닝엔 공작저에 들어오면서 다 말아먹은 사교계 평판. 요아힘에게 홍차를 끼얹고 뺨을 내리친 이상 돌이킬 방법도 없다.
사교계의 악녀, 아이젠부르크의 팜므파탈.
‘이미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은데.’
자신에게 따라붙는 호칭을 떠올린 라모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솔직히 남동생인 레이먼이나 사촌 동생의 혼삿길이 좀 걱정되기는 했다.
‘레이먼은 잘생겼으니까, 얼굴 뜯어먹고 살라고 하지 뭐. 에밀리아는…….’
다시 생각해 보면 사촌 동생인 에밀리아는 아직 결혼을 걱정하기엔 너무 어린 것 같았다.
이제 고작 일곱 살이니까.
‘문제 있으면 내가 소개해 주지 뭐, 메닝엔 공작의 약혼녀인데 그것도 못 하겠어?’
단순하지만 당연한 결론이었다.
라모나는 어쩌면 자신이 지금까지 너무 수단과 방법을 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하루라도 빨리 벤을 찾아야겠으니, 그녀는 가장 빠른 방법을 택했다.
“중요한 거라 꼭 찾고 싶어. 반지는 ‘사랑의 증표잖아? 그렇지?”
화사하게 웃는 라모나에게 반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남자의 쓸모를 한껏 이용하기.
이게 바로 로베르트와의 관계 재정립 프로젝트의 첫 번째 단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