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이 하늘이 잿빛으로 물든 날, 한 여인이 창백한 얼굴로 메닝엔 공작저 로비에 서 있었다.
여인, 마리안느는 간신히 한마디를 꺼냈다.
“친정의 일은 죄송합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에…….”
유디트는 한숨을 삼키며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녀의 외면에 마리안느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가느다란 갈색 머리카락이 겁을 먹은 듯 파르르 떨렸다.
어린 로베르트는 물끄러미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는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손자의 무덤덤한 눈빛을 눈치챈 클레멘스는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조심히 다녀오너라. 마리안느, 리안드로.”
“……네, 각하.”
두 손을 공손히 모은 마리안느의 대답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덕분에 이미 싸늘했던 로비의 공기가 한층 더 매섭게 가라앉았다.
마리안느의 친정, 뷔나우 백작가의 사람들이 메닝엔의 이름을 들먹이며 투자를 받아 내고 파산하기를 벌써 수차례.
보다 못한 클레멘스는 직접 나서서 그들은 메닝엔과 관계없는 자들이라 선언해야 했다.
그쯤에서 뷔나우 백작가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면 참 좋았겠건만, 그들은 참 끈질기기도 했다.
며칠 전, 로베르트를 데리고 새로 생긴 커피 하우스를 방문하려던 유디트의 앞에 뷔나우 백작 부인이 나타났다.
<공작 부인, 제 딸이 아무리 밉다 한들 이런 식으로 저희를 망신 주시다니요. 정말 차가운 분이십니다.>
메마른 눈가를 연신 손수건으로 훔치던 뷔나우 백작 부인은 이내 로베르트를 붙들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찌 어미와 자식을 이리 떼어 놓고…….>
그날의 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치가 떨렸던 유디트는 말없이 눈을 감아 버렸다.
점점 가라앉는 싸늘한 분위기를 좀 풀어 보고자 마리안느의 남편, 리안드로가 황급히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로베르트, 정말 너는 수도에…….”
“예, 저는 할머님과 있을래요.”
그러나 로베르트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대답했다. 부모를 경계하듯 유디트의 곁에 바짝 붙은 채였다.
순간 멈칫한 리안드로가 복잡한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버지.”
어색한 미소를 지은 리안드로가 마리안느의 팔을 꼭 붙들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마리안느는 그제야 물기 어린 눈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소년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여전히 유디트의 곁에 바짝 붙어선 채였다.
“……어머니.”
마리안느는 아들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대답한 그녀는 남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소년은 덜컹거리는 마차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잠자코 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클레멘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쯧, 친정의 부족함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저렇게 심신이 유약해서야 어떻게 메닝엔의 안주인이 될 수 있을까.”
황급히 로베르트의 안색을 살핀 유디트가 그를 제지했다.
“그만하세요, 클레멘스.”
“틀린 말은 아니잖소, 리안드로는 대체 어쩌자고…….”
“클레멘스?”
유디트의 목소리가 커지고 나서야 그는 입을 다물었다.
로베르트는 애써 클레멘스의 말이 들리지 않는 척 뒤를 돌았다.
그때였다.
쿠우웅.
땅이 거세게 흔들리며 사방이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
당황한 로베르트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 메닝엔 공작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유디트와 클레멘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둠 속에는 어느새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버린 로베르트만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할머님? ……할아버님?”
모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캄캄한 암흑 속에서 로베르트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거기 아무도 없습니까!”
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큰 소리로 울려 퍼졌다.
끼이익.
동시에 로베르트가 딛고 선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윽.”
중심을 잃은 그는 딱딱한 바닥 위를 마구 굴렀고, 그 순간.
쿠와아앙.
매서운 기세의 흙더미가 그를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 * *
우지끈, 나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로베르트는 눈을 떴다.
낯익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메닝엔 공작저의 집무실이었다.
늦은 밤 귀가해 새벽까지 레헨트의 일을 고민하다 와인을 한잔했더니,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젠장.”
자꾸 술을 마시고 잠이 드는 건 분명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게다가 또 이 꿈이라니.
역시 클레멘스와 유디트가 수도로 올라온 영향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부모의 마지막 모습은 시도 때도 없이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꿈의 마지막은 항상 그를 향해 매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흙더미였다.
정작 마차 사고로 죽은 것은 그의 부모인데, 우스운 일이었다.
“후.”
식은땀이 맺힌 등이 영 찝찝했다.
하지만 그는 땀을 씻어 버리는 대신 소파에 축 늘어진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두근거리는 심장도, 축축한 등 뒤도. 이대로 조금만 기다리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진정될 것이다.
7년간 항상 그랬듯이.
그는 고요히 누워서 언젠가 되돌아올 평안을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그때.
똑똑.
“각, 로베르트!”
불청객의 목소리가 그를 구원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였다. 로베르트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라모나?”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어머니의 물기 어린 눈빛이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졌다.
설마 그녀가 먼저 자신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만 실례하겠다며 홀가분하게 자리를 뜨던 라모나의 모습은, 마치 그를 영영 떠나려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그제야 로베르트의 얼굴이 슬그머니 풀어졌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시간은 언제나와 같았다. 5시를 지나 6시가 되어 가는 시각, 시계를 살핀 로베르트가 기운 없이 웃었다.
‘정말 한결같군. 저 정도면 시간 강박 변태 이런 거 아냐?’
라모나가 알았다면 너 같은 변태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사양이라 말할 만한 생각이었다.
대답이 없자 조바심이 났는지 그녀는 다시 방 안을 향해 물었다.
“로베르트? 여기 있어요?”
흐음, 팔짱을 낀 그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녀가 자신을 찾는 이 상황이 흡족해서 그런 건 절대로 아니었다.
그녀는 발칙하게도 그런 질문을 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연애 한 번도 안 해 보셨죠?>
그 당시야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 했다만, 솔직히 그도 묻고 싶었다.
그러는 그쪽은 대체 뭐가 다르기에?
“흐음…….”
로베르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기왕 변태 쓰레기가 된 거.’
까짓것 제대로 하는 게 낫지.
이내 상의를 훌훌 벗어 던진 그가 한껏 기지개를 켜며 밤새 굳은 몸을 풀었다.
절대 2황자 알폰조를 의식한 행동은 아니었다. 절대. 로베르트 메닝엔은 그렇게 꼴사나운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거울을 살피니 역시나 등이 참 완벽했다.
“좋군.”
흡족한 미소를 지은 로베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팔을 괴고 비스듬히 누웠다. 그리고 문밖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내 사랑?”
“……느에.”
뭘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저렇게 싫은 티를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라니.
풉, 그의 얼굴에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로베르트는 시치미를 떼고 천연덕스럽게 문밖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일단 들어오시죠.”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라모나가 문을 열고 들어…….
벌컥.
“로베르…… 꺅!”
……오다 멈춰 섰다.
상의를 탈의한 로베르트의 모습에 라모나의 동공이 어쩔 줄을 모르고 흔들렸다.
“나의 천사? 무슨 일입니까?”
천사라는 말에 라모나의 얼굴이 여과 없이 일그러졌다.
로베르트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미쳤어요?’
‘전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라모나의 얼굴에 로베르트는 또 한 번 웃음을 삼켜야 했다.
이내 무슨 결심을 한 건지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좋아서요. 너무 좋아서 비명을 지른 거예요.”
이번에는 천하의 로베르트 메닝엔도 소리 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풉.”
‘절대 한마디도 안 지지.’
이래서 짜릿하다니까.
결연한 라모나의 눈동자를 마주한 로베르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이상했다.
그녀가 칼같이 선을 긋는다 생각하니 자꾸만 그 선을 넘어가고 싶어졌다.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그녀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에게 허락한 선이 어디까지일지, 그게 너무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기쁜 소식이군요. 당신이 제 몸을 이리도 좋아하다니.”
이건 단순히 예쁜 것을 볼 때와는 분명히 다른 기분이었다.
“이런 몸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네.”
그의 눈이 야살스레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