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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38화 (39/151)

#38화

대외적으로는 클라이스트 백작가의 소유인 고급 클럽. 이 클럽의 실질적 소유주 로베르트 메닝엔은 대낮부터 위스키를 한 잔 따라 둔 채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황궁에 다녀오셨다더니 무슨 일 있으셨나?’

승마를 하러 나가다 얼떨결에 끌려온 에드윈이 힐끔 그의 안색을 살폈다.

은근슬쩍 로베르트의 건너편에 엉덩이를 붙인 에드윈이 물었다.

“그 고자 놈들 때문이십니까?”

고자 놈들, 메닝엔이 벤트하임을 낮잡아 부르는 호칭이었다.

로베르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고조할아버지가 메닝엔 공작이던 시절.

그때까지만 해도 메닝엔과 벤트하임의 사이가 이 정도로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황태자는 황태자비로 내정된 메닝엔 공작 영애를 두고 벤트하임의 사생아와 놀아났고, 이에 벤트하임 공작 영식은 더러운 뒷공작을 펼쳐 메닝엔 공작 영애를 음해해 사생아를 황태자비로 만들려 했다.

동생의 명예를 실추한 헛소문에 분노한 메닝엔 공작 영식은 결투를 신청했고, 결투가 시작하자마자 벤트하임 영식의 소중한 그곳을 총으로 쏴 버렸다.

후계자를 잃은 것도 모자라 웃음거리가 된 벤트하임은 메닝엔 영식을 사형시켜야 한다며 길길이 날뛰었고, 메닝엔은 그들을 결투의 명예도 모르는 자들이라 비웃었다.

그때부터 메닝엔과 벤트하임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둘이 서로 경쟁하는 사이 바텐베르크 후작가가 부쩍 힘을 키우게 된 것은 덤이었다.

아무튼, 그 고자 놈들. 벤트하임의 일 때문에 로베르트가 심난해하고 있을 것이라는 에드윈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에드윈.”

“예?”

“서로 감정이 상했는지 신경 쓸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무슨 뜻이지?”

갑자기 이건 무슨 질문이지? 고개를 갸웃한 에드윈이 대답했다.

“음, 나에게 신경 꺼라?”

“……그럴 리가.”

로베르트는 말도 안 되는 말 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듣지도 않을 거면 왜 물어봤는지, 에드윈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걸 티 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뻔하지, 레이디께서 하신 말씀인가 보네.’

그러게 좀 잘하지. 에드윈이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남자가 했다면야 뭐 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숙녀분이 하신 말씀이라면 이 이상 집적거리지 말라는 경고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물론 각하께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실 리는 없겠지만요.”

순간 하얗게 질리는 로베르트의 안색에 에드윈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어울리지 않게 한층 풀이 죽은 로베르트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드윈.”

“예?”

“그럼 믿고 싶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 같지?”

“어음…… 그건 상황에 따라서 다르긴 하겠습니다만,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뜻 아닐까요?”

“믿을 수 없다, 라…….”

심각한 얼굴로 다시 생각에 잠겨있던 로베르트는 말했다.

“나가.”

“예? 갑자기요?”

“헛소리만 자꾸 할 거면 방해되니까 나가라고.”

“헛소리 아닌데요!”

“정신 사납군.”

승마 가려다 붙잡혀 온 것도 모자라 졸지에 쫓겨나게 된 에드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지금 다시 출발하면 약속은 늦지 않을 듯하다는 건 기쁜 소식이었다.

“그럼, 뭐,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슬그머니 겉옷을 챙겨 든 에드윈이 빠르게 자리를 떴다.

달칵.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로베르트는 단숨에 위스키 한 잔을 털어 버렸다.

목이 타는 듯한 뜨거움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주제넘는 말씀이지만 레헨트 령을 한번 돌아보시는 게 어떨까 해요. 특히 빈민가 쪽은 상수도 정비가 워낙 안 되어 있으니까요.>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역시나 라모나와의 대화였다.

“레헨트, 라…….”

로베르트는 습관처럼 턱을 만지작거렸다.

원래 레헨트는 눈부신 바닷가로 유명한 평화로운 휴양지였다.

그러나 몇 년 전, 이웃한 튜토네스 공화국에서 추방당한 정치범들이 레헨트의 빈민가로 숨어들며 레헨트의 평화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래 봤자 피라미에 불과하니 그냥 내버려 뒀다만, 벤트하임이 레헨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마침 엘츠 백작의 자금 일부가 요하네스에게 흘러간 정황이 포착되었다.

상세한 루트를 파악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지금 저는 각하를 위해서 일하니까요.>

이만하면 그를 위해 일한다는 그 말이 틀리지는 않은 듯했다.

<서로 감정이 상했는지를 신경 쓸 사이는 아니잖아요, 우리. 그렇게 추측하신 이유도 충분히 짐작이 가요. 납득도 가고요.>

칼 같이 선을 긋던 말도 분명 그를 위해 일한다는 말의 연장선이리라.

안도와 동시에 묘한 불쾌감이 스멀스멀 퍼져 나갔다.

왜일까.

믿을 만한 수족이 생겼다는 건 분명 좋은 소식일 텐데, 왜 그 말이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걸까.

마치 무슨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독한 술 때문일까. 갑자기 가슴이 찌르르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 그녀가 자신을 떠보는 중이냐고 묻던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얼렁뚱땅 농담으로 아침을 넘기긴 했지만 그 또한 후회를 더 쌓는 행동일 뿐이었다.

그뿐일까.

<오늘따라 연기가 과하시던데, 설마 어제 일 때문은 아니기를 바라요.>

꼴사납게 들키기까지 했다.

최악,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저택에서 느껴지는 클레멘스와 유디트의 존재감은 자꾸만 그에게 부모가 살아 있던 시절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라모나가 당연히 자신을 의심한다는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간 것은 아마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마리안느 메닝엔, 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젠장.’

인정해야 했다. 꼴사나운 짓을 했다.

부모의 일로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고 말했으면서, 정작 자신은 부모의 일에 갇혀 있었다.

로베르트가 저도 모르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는 말했다.

<각하를 믿고 싶었기 때문이죠. 그럼 이만, 실례할게요.>

……라고.

매사에 모든 것을 의심하고, 경계하던 로베르트의 어머니라면 절대 하지 못할 말이었다.

그 한마디에 그는 확실히 깨달았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자신의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후.”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로베르트가 턱을 괴었다.

결국 결론은 그거였다. 자신은 아직도 어린 시절에 갇힌 꼴사나운 멍청이고,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그녀는 무엇일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다다른 로베르트의 얼굴이 멍해졌다.

“윽.”

때마침 삐끗한 손 덕분에 멍청하게 혀를 씹은 것은 덤이었다.

찌릿한 통증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별거 아닌 통증이지만 미미하게 계속 신경이 거슬렸다. 그래, 마치 그 여자처럼.

로베르트는 마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어떤 사람일까.

미카엘라의 심복, 수상한 등장, 푸른빛.

여러 단어를 떠올리던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예쁘긴 해.”

그건 인정.

그녀가 고양이 같은 새침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괜히 한번 불러서 자신을 보게 만들고 싶기는 했다.

무언가에 잔뜩 집중한 입술도, 입술…….

‘젠장.’

갑자기 그날 밤의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빨리해요.>

새하얀 목덜미며, 앙증맞게 움직이던 작은 입술. 알싸한 알콜 냄새 사이로 풍기던 달큰한 체향까지.

가슴이 간질거리기 시작한 로베르트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미치겠군.”

자칭 타칭 제국 최고의 신랑감은 차가운 창문에 얼굴을 식히며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가 아니라. ‘그에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볼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질문을 던진다 해서 답이 바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로베르트 메닝엔에게 물음표 그 자체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2황자 문제도 있지.’

그런 근육 바보가 정말 취향인가? 알폰조 생각에 욱한 로베르트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젠장.”

로베르트는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치근거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쳐내야 할지, 청혼을 어떻게 부드럽게 거절하는지에 대해서라면 책을 한 세 권 정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정말이지 생전 처음인지라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후우, 차라리 그 때 입을 맞춰 버렸으면 더 확실해졌…….”

아, 맞다. 푸른빛.

경솔하게 재앙 같은 주둥이를 놀리던 그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정말, 정말 의도치 않게도.

“……젠장.”

그의 손목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사색이 된 로베르트가 자괴감에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건 마치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 안달 난 파렴치한 변태 같지 않은가.

눈치도 없는 푸른빛은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이며 손목 주위를 맴돌았다.

정말 미칠 노릇은…….

푸른빛을 본 순간부터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고 있다는 점이었다.

‘젠장, 빌어먹을.’

로베르트 메닝엔은 생각했다.

어쩌면, 설마, 만에 하나. 자신은 정말 변태 쓰레기일지도 모르겠다고. 21년 그의 인생 중 스스로에 대한 가장 박한 평가였다.

* * *

라모나의 침실.

오늘따라 잔뜩 신이 난 티아가 콧노래를 부르며 종이봉투를 한가득 내밀었다.

“아가씨 앞으로 초대장이 이렇게나 많이 왔어요!”

“또?”

‘다들 참 부지런하네.’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찬찬히 초대장을 훑어보았다.

“보자. 이 노란색은 안 봐도 레이디 오셀튼일 거고, 이건…… 응?”

예상치 못한 발신인에 라모나의 손이 멈췄다.

“……레이디 슈타이덴?”

레이디 슈타이덴. 황제의 정부, 2황자 알폰조의 어머니.

접점 하나 없는 그녀가 초대장을 보내다니. 이 또한 회귀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며칠 전 일 때문인가?’

레이먼에게 답장 좀 보내라며 미련 없이 손을 한번 까딱하던 알폰조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흐음, 로베르트 메닝엔이 정말 레이먼의 편지를 빼돌린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누굴까. 레이먼과 자신의 연락을 막는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하지? 무엇을 위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에 빠진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티아, 이 초대장들을 누가 네게 전해 줬니.”

“시녀장 댄버스 부인이요!”

그럼 이미 로베르트에게도 소식이 들어갔을 터. 생각에 빠진 라모나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두드렸다.

그 잘난 얼굴로 예쁘게 웃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라모나, 나의 사랑. 밤새 당신의 그이가 보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불과 하루 전에 알폰조의 일을 논한 주제에, 아침에는 또 내 사랑이니 뭐니 하는 꼴이라니.

심지어 그 미모로, 그런 눈웃음을 치면서.

자꾸 나이 타령을 하는 게 좀 그렇긴 했지만 정말 자신이 다섯 살만 더 어렸어도 그에게 속절없이 휘둘렸을 게 분명했다.

‘정말 가증스럽다, 가증스러워.’

생각해 보면 그는 처음부터 약혼 같은 말들로 그녀를 휘두르며 계속 떠봤다.

이해는 했다.

라모나가 생각하기에도 그녀의 등장은 너무 수상하고 이상했으니까.

하지만 이해와는 별개로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런 식의 관계에는 감정 소모가 너무 크다.

차라리 일정한 선을 지켜 주던가. 이런 식으로 매일매일 거리감을 좁혔다 넓히기를 반복하는 건 좀 너무한 일이었다.

……길들이기 당하는 것은 지난 생으로 이미 충분했으니까.

고민 끝에 라모나는 결심했다.

‘신뢰는 어느 정도 준 것 같고……. 흐음 그렇다면…….’

로베르트 메닝엔. 그와의 관계를 좀 재정립해 보기로.

며칠간의 사건으로 그녀는 로베르트를 믿고 의지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깨달았다.

시간을 되돌아온 것도, 미래를 바꾸려는 것도 그녀 자신.

라모나는 결국 로베르트는 보조 장치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레이디 슈타이덴의 초대는 일단 거절해야겠지만…… 여지는 남겨 두자.’

어떻게 보면 잘 된 일이었다.

왜 2황자 알폰조가 과거와는 달리 수도에 나타난 것인지도 알아봐야 했고…….

‘그것도 잘 있나 확인을 해 봐야 하니.’

먼저 나를 초대해 주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 라모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펜을 좀 가져올래, 티아? 답장을 보내야겠구나.”

그 제 잘난 맛에 사는 남자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휘둘리면서 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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