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로베르트와의 대화 이후 라모나는 침실에 틀어박혔다.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식사도 거절하고 온종일 이불을 말고 있던 그녀는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배고파.”
꼬르륵거리는 배를 느끼며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 남자가 뭐라고, 그리고 또 배고픔이 뭐라고.
요하네스의 손아귀에서 이미 별의별 일을 다 겪어 봤으면서, 겨우 이 정도로 힘들어할까.
‘……괜히 깊게 생각하지 말자.’
그녀는 로베르트에게 느낀 거리감에 왜 자신이 무너졌는지 어렴풋이 눈치챘다.
하지만 깊이 파고들어 가지는 않기로 했다.
세상엔 애매한 상태로 두는 게 훨씬 나은 일들이 있었고, 그녀의 감정 또한 그런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그냥 지금의 삶이 만족스러워서 그랬겠지.’
평화롭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세상.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던 회귀 전과는 다른 나날에 취해 마음이 말랑해진 모양이었다.
어쨌든, 로베르트에게 언질을 주었다.
미카엘라가 그의 영지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가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물론 그 남자만 믿고 있으면 안 되겠지만.’
결국 내가 움직여야겠지.
가슴이 답답한 기분에 깊게 숨을 들이마신 라모나가 창문을 열었다.
꽃향기가 실린 바람이 살랑이며 그녀의 뺨을 간지럽혔다.
회귀 전, 지금처럼 꽃바람이 불던 시기.
미카엘라는 어쩐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라모나에게 말했다.
<레헨트령에 전염병이 돈다더라.>
<레헨트? 메닝엔 공작의 영지?>
<응, 심각한 모양이던데. 매일 시체가 쌓이고 있대. 너무 끔찍하지?>
끔찍하다는 말과는 달리 미카엘라는 즐겁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랑스러워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라모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러게.>
라모나가 그 비밀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라모나! 큰일 났어!>
일이 어그러지자마자 라모나를 찾아온 미카엘라는 그녀가 저지른 일을 털어놓았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몇 달 전, 요하네스는 미카엘라에게 황제가 로베르트를 의심하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흘렸다.
당시 레헨트에는 이웃한 공화국에서 추방당한 정치범들이 밀입국해 있었는데, 황제는 로베르트가 그들을 이용해 황권을 실추하려 한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일이 요하네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미카엘라는 당장 사람을 보내 레헨트를 살폈다.
결과적으로 황제의 의심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치범이라기보다는 사기꾼에 가까웠다. 그들은 공화국에서 몰래 들여온 약품을 판매하고,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선동해 돈을 끌어 모으는 질 나쁜 작자들이었다.
하지만 미카엘라는 황제의 의심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치범들과 접촉한 그녀는 그들에게 로베르트와 내통한 척 증거를 흘리라며, 대신 그들의 사업을 키워 주겠다고 제안했다.
미카엘라의 계획은 단순했다.
‘레헨트에 전염병이 퍼지면 약이 잘 팔리겠지.’
그녀는 비밀리에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을 하나 손에 넣었고, 사람들을 시켜 레헨트의 우물가에 매장했다.
계획대로 전염병은 급격하게 퍼져 나갔고, 로베르트는 결국 레헨트의 빈민가를 통째로 격리했다.
이에 정치범들은 제국이 백성을 버렸다며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로베르트가 있으리라 의심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황제는 요하네스에게 로베르트를 조사하라 명했고, 벤트하임에게 메닝엔을 견제할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약혼을 서두르라 명했다.
더 굳건해진 요하네스의 위치와 당장 눈앞으로 다가온 약혼.
완벽히 미카엘라가 원하던 바였다.
하지만 일은 점점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레헨트의 전염병은 수도의 전염병과는 달리 너무나 강력했고, 병에 걸린 사람들은 증상이 나타난 지 채 3일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
점점 걷잡을 수없이 심각해지는 상황에 결국 황제는 빈민가를 불사르라 명했다.
겁을 먹은 정치범들은 자신들을 빼돌려 달라며 미카엘라를 협박하기 시작했고, 일을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그녀는 곧장 라모나를 찾아갔다.
<라모나, 제발. 제발 나 좀 살려줘. 나한텐 너밖에 없는 거 알잖아.>
결국 라모나는 제 손에 피를 묻혀 가며 그 일을 수습했다.
암살자를 고용해 정치범들을 암살하고, 시신을 불타는 마을에 던져두었다.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벤트하임의 병사들이 암살자를 처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이 일을 알아서는 안 되는 상황, 라모나는 그 모든 과정을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직접 레헨트로 향했고.
<……저 사람은?>
그 곳에서 하급 기사로 변장한 로베르트를 발견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라모나는 황급히 그를 피해 자리를 떴지만,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문 채 불타는 마을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만은 평생 잊지 못했다.
레헨트의 전염병은 그 이후로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국을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나중에야 그 이유가 밝혀졌다.
그것은 바로 레헨트의 전염병이 수도의 전염병과는 다른, 썩은 사체에서 비롯된 병이기 때문이었다.
원인을 빨리 알았다면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레헨트에서 입은 손목의 화상처럼, 그 사실은 마음의 흉터로 남아 라모나의 남은 평생을 괴롭게 만들었다.
과거의 기억에 머리가 아파진 라모나가 눈을 감았다. 그녀는 시장에서 마주쳤던 꼬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벤, 틀림없이 그 아이야.’
회귀 전, 레헨트의 빈민가에 살던 그 아이. 미카엘라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던, 그래서…….
죽일 수밖에 없었던 소년. 벤.
지금쯤 레헨트에 있어야 할 그 아이가 왜 수도에 있는지. 일단 거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 * *
다음날, 다이닝룸.
짹짹.
신나게 재잘대는 새들과 푸르른 하늘 덕에 라모나는 제법 상쾌한 아침을 만끽하고 있었다.
“라모나, 나의 사랑. 밤새 당신의 그이가 보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오늘따라 과장스러울 만큼 다정한 로베르트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취소다. 상쾌한 아침 다 취소야. 불길한 아침이야.’
라모나는 습관처럼 이마를 짚으려던 손을 겨우 참았다.
어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뻔뻔한 태도가 기가 찼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니까.’
그녀가 다섯 살만 더 어렸어도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로베르트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을 것이다.
저건 연기야, 나를 떠보는 거야. 하면서.
하지만.
‘땅굴 파고 들어가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지.’
어차피 그와 한배를 타야 하는 이상 그런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할 필요는 없었다.
‘내 역할에 충실하자.’
어차피 저 남자도 나도, 서로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서 벌이는 일은 아니니까.
‘일을 잘 마무리하고, 증거를 찾아서 주면…… 그럼 이런 사이도 마무리 되겠지.’
슬슬 그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씁쓸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주둥이를 계속 놀리게 둘 수는 없는 일.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그의 가슴을 콩콩, 아니 쾅쾅 내리쳤다.
“하, 하, 하. 물론 당신이 보고 싶었죠.”
“나는 당신이 보고 싶어서 죽어 버릴 뻔했는데.”
“그랬으면 좋았……. 아니 어떻게 그런 무서운 말을 할 수 있어요, 로베르트!”
억 소리가 절로 날 만한 강도였다.
과격한 애정 표현에 클레멘스가 헛기침을 했다.
“어흠.”
하지만 라모나의 속셈을 알아챈 로베르트도 질세라 예쁘게 웃으며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매일 아침 내게 직접 식사를 먹여 주더니 오늘은 왜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라모나.”
정도껏. 각하 제발 정도껏!
라모나가 이를 악물었다.
“르브르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먹여 주다니요.”
“오, 이런. 할아버님이 계시는 걸 잠시 깜빡했군요.”
그가 잔망스레 한쪽 눈을 찡긋했다.
도저히 이 분위기에 적응할 수 없었던 클레멘스는 말없이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로베르트에게서 이상함을 눈치챈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지?’
평소와 같은 듯하면서도 어색할 만큼 과장스러운 태도. 어제 일이 미안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그녀가 생각에 빠진 사이 하녀 하나가 살그머니 다이닝룸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클레멘스의 식사 시중을 들던 브리튼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큰마님께서 가주님을 찾으십니다.”
그와 동시에 클레멘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머쓱한 듯 헛기침을 했다.
“흠흠, 속이 좋지 않군. 아침 식사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어.”
황급히 자리를 뜨는 클레멘스를 바라보는 라모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저런 게 진짜 사랑이…… 잠깐만. 진짜 사랑?’
그 순간, 라모나는 로베르트의 연인 행세가 왜 그리 어색했는지 이유를 깨닫고 말았다.
‘아하.’
역시 그거였나. 그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각하?”
그녀의 속도 모르는 로베르트는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오, 나의 천사 라모나.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지겨울 만큼 들은 천사 타령에 라모나는 이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좋아요. 로베르트, 제가 깨달은 사실이 두 가지 있는데요.”
“무엇입니까? 내 사랑.”
“일단 첫 번째, 할아버님은 저희가 ‘정확하게’ 어떤 사이인지 알고 계시죠? 브리튼의 보고를 받으셨으니 말이에요. 그러니 할아버님 앞에서는 이 우습지도 않은 연극을 그만해도 될 테고 말이에요.”
“…….”
진실을 들킨 로베르트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코웃음을 친 라모나는 회심의 두 번째 일격을 날렸다.
“그리고 두 번째, 연애 한 번도 안 해 보셨죠?”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피식.
입을 꾹 다문 그를 보며 라모나가 예쁘게 웃어 보였다.
“어쩐지…… 연인 행세가 무슨 연극 같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네. 쯧쯧.”
대놓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가 로베르트에게 팔짱을 꼈다.
툭, 그녀가 그의 옆구리를 한 번 치며 말했다.
“오. 나의 사랑 나의 천사, 로베르트.”
로베르트의 목덜미가 벌게지기 시작했다.
통쾌한 웃음을 터뜨린 라모나가 말했다.
“오늘따라 연기가 과하시던데, 설마 어제 일 때문은 아니기를 바라요.”
“어제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일은 제가 정말 죄송하…….”
“그렇다고 사과하지는 마시고요.”
“……예?”
라모나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로베르트의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
어쩐지 얼굴이 굳은 듯한 그가 물었다.
“그건 무슨 의미이신지?”
“서로 감정이 상했는지를 신경 쓸 사이는 아니잖아요, 우리. 그렇게 추측하신 이유도 충분히 짐작이 가요. 납득도 가고요.”
그녀는 최대한 담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그렇게 일일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어렴풋이 자각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선긋기였다.
선을 긋는 이유는 너무나 명백했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없었으니까.
손목의 흉터가 사라졌다고 그녀가 저지른 일이 모두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럼 저도 이만, 실례할게요.”
라모나는 제법 홀가분한, 그리고 착잡한 기분으로 자리를 떴다.
로베르트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