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Chapter 5. 넘어가고 싶은 선
“그 얘기 들으셨어요?”
파릇한 잔디가 잔뜩 펼쳐진 강변, 오늘도 샛노란 드레스를 차려입은 레이디 오셀튼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이야기 말이에요!”
아이젠부르크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레이디들은 산새처럼 자신이 아는 것을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아, 공작저 시녀장의 뺨을 때렸다면서요?”
“어머, 그건 대체 언제 이야기에요. 요아힘 페브룩 영식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홍차를 쫄딱 뒤집어쓰고 자작저에서 나왔다던데?”
“저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메닝엔 공작님을 완전히 홀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역시 다들 모르는구나? 레이디 오셀튼은 흐뭇한 표정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가 부채를 팔랑거리며 입을 열었다.
“후후후, 역시 다들 그 소식은 아직 못 들으셨나 보네요.”
곱슬거리는 붉은빛 머리카락과 주근깨가 콕콕 박힌 뺨. 악동 같은 이미지의 레이디 오셀튼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선대 메닝엔 공작 부인이 수도에 올라오셨어요.”
“아아, 전 또 뭐라고. 그 이야기는 들었어요. 뭐, 원래 종종 올라오시잖아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젓는 연두색 옷을 입은 소녀를 바라보며 레이디 오셀튼이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제 어머니께서 공작 부인의 최측근이신 클라이스트 백작 부인을 만나고 오셨는데 말이에요.”
솔깃한 이들이 레이디 오셀튼을 향해 귀를 쫑긋했다.
“공작 부인께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의 샤프롱을 맡으실 생각이시더라고요.”
샤프롱이라는 말에 소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네에? 샤프롱을요?”
“세상에, 공작 부인께서도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인정하신 모양이네요?”
그때, 아까의 그 연두색 옷을 입은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네요? 공작님의 어머니는 인정하지 않으셨잖아요. 뷔나우 백작가가 그래도 아이젠부르크보다는…….”
그녀의 경솔한 발언에 화들짝 놀란 다른 소녀가 얼른 그녀를 제지했다.
“레이디 블레나!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어떡해요.”
“우리끼리인데 뭐 어때요. 정말이지 걱정이 많으시다니까.”
‘정말이지’를 입에 달고 사는 탓에 레이디 정말이지로 불리는 레이디 블레나가 부채를 팔랑이며 중얼거렸다.
“또 모를 일이죠. 아이젠부르크의 신데렐라는 결혼까지 못 갈 수도 있는 거니까.”
의미심장한 그녀의 말에 소녀들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무튼.”
짝.
묘해진 분위기를 레이디 오셀튼이 박수와 함께 환기시켰다.
“제법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재미있는 건수를 잡은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벤트하임의 시녀였던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벤트하임의 경쟁자가 되다니! 꺄하하하!”
미카엘라 벤트하임, 네 시대는 이제 끝났어.
‘내 티파티 초대장을 무시하더니 꼴좋다.’
미카엘라를 망신 줄 생각에 신이 난 레이디 오셀튼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 * *
끔찍한 아침 식사 후, 로베르트의 침실.
눈 밑이 퀭해진 라모나가 이마를 짚었다.
“각하, 혹시 저를 수치스러움에 죽게 만들고 싶으신 건 아니죠?”
“내 사랑,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말을.”
“아니면 뭘 잘못 드신 걸까요?”
“그 말을 주방장이 들었다면 정말 슬퍼할 겁니다.”
한 마디도 안 지냐. 라모나가 로베르트를 향해 눈빛으로 욕을 날렸다.
로베르트는 한술 더 떠 마시던 와인 잔을 든 채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렇게 날 잡아먹을 듯 쳐다보면 조금 부끄럽습니다.”
“……미쳤나 봐.”
“당신에게?”
저 새X가.
‘라모나, 네가 참자. 저 남자는 사람이 아니야. 주둥이야. 네가 조금만 봐주자.’
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분노한 라모나가 그를 쏘아붙였다.
“아니면 뭐 원하는 거라도 있으세요?”
“당신의 사랑?”
진짜 정말 진심으로 죽여 버릴까. 라모나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봤다.
“하아, 그래서 어찌 된 영문인지 설명을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녀의 한숨에 로베르트가 드디어 말장난을 끝내고는 옅게 웃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할아버님이 연락 없이 오시는 통에 소란스러워졌군요.”
털썩, 소파에 주저앉은 로베르트가 라모나에게 눈짓했다. 라모나도 조심스레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사연을 이야기하자면 좀 길지만…… 좋습니다. 레이디께서도 공작가의 일원이 되실 테니 아셔야겠죠.”
생각에 잠긴 듯, 손깍지를 낀 채 잠시 천장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제 부모님께서 7년 전에 돌아가신 것은 기억하실 테죠.”
“예.”
“제게 공작위를 물려주시긴 했지만, 솔직히 가문을 이끌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고민 끝에 할아버님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셨습니다. 일종의 스파이 작전이죠.”
슬슬 감이 잡힌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그 조치가……?”
“예.”
로베르트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공작가의 인장을 사용할 경우, 브리튼에 의해 할아버님께 연락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라모나는 그제야 로베르트와 브리튼의 묘한 관계를 이해했다.
이제 보니 브리튼은 로베르트의 사람이 아닌 클레멘스의 사람인 모양이었다.
동시에 타당한 의문이 떠올랐다.
‘……잠깐만.’
“각하, 그러면 할아버님은 이미…….”
그때.
“아,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재앙의 주둥이가 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혹 제 가정사로 인해 모성애를 느끼거나, 저를 동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이…….”
“뭐, 그런 사연을 더하지 않아도 이미 제 매력에 푹 빠지신 듯하지만.”
무서울 정도의 자존감이었다.
더 무서운 것은 그의 주둥이에 자신이 적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세상에, 저런 거에 익숙해지면 절대 안 돼. 라모나가 스스로를 단속하는 사이, 로베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하지만 동정심 같은 건 절대 원치 않습니다.”
동정심이라는 단어를 또 입에 담는 그의 얼굴이 어쩐지 평소와는 달랐다.
외로움이라든가, 혹은 분노라든가.
마치 꼭 무언가를 마음에 쌓아 둔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역시 부모의 일 때문일까?
라모나는 차마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 후 로베르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예?”
“그게 궁금해서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저를 따라서 오실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 들켰다. 뜨끔한 기분에 라모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눈치는 진짜 빠르다니까.’
확실히 이 남자를 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감추지 않았다.
“전염병이 도는 것 같아서요.”
“흠, 그 정도는 매년 있는 일 아닙니까?”
“맞아요. 하지만 매년 있는 일이라고 손 놓고 있는 게 옳은가 싶어요.”
“의외군요.”
로베르트가 눈썹을 까딱했다.
이내 그가 찻잔을 들며 중얼거렸다.
“저는 당신이 알폰조의 일로 저를 찾아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그의 말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레이먼의 편지 이야기를 로베르트가 먼저 꺼낼 줄이야. 그녀는 말없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침 식사 내내 그런 헛소리를 하면서 속으로는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떠보고, 시험하고. 한층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그와의 거리가 훌쩍 멀어졌다.
라모나가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챘으면서도 로베르트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 동생의 편지를 빼돌렸는지 아닌지 확인하러 온 거 아닙니까?”
“제가 입에 담지도 않은 의혹으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
“이런, 비난이라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저 그게 타당한 수순이라 생각이 된 탓에.”
라모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한 탓이었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설령 그렇게 생각한다 한들, 증거도 없이 로베르트를 추궁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모나는 차분한, 그러나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제가 각하를 의심하는 일에 목을 매고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아니면 전염병에 관심을 가지는 게 이상하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결론적으로 보면 후자가 맞긴 합니다.”
“그야 저는 미카엘라를 위해서 일했었고, 미카엘라는 전염병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날 선 대답에 이번에는 로베르트가 입을 다물었다.
라모나는 그의 침묵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니면 또 저를 떠보는 중인가요?”
그제야 시종일관 여유롭던 로베르트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미안합니다. 실수했습니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묘하게 평소와는 달리 날카롭고, 여유 없는 모습이었다.
라모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대체 사람 속이 얼마나 꼬인 거야…….”
“……예?”
“아니에요. 아무튼, 제가 드리려던 말은 그거였어요. 지금은 제가 각하를 위해서 일하니까요. 각하께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 말에 로베르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를 위해서 일한다, 이 말입니까?”
“뭐가 잘못됐나요?”
“아닙니다. 계속 말씀해 보시죠.”
“레헨트령을 한번 돌아보시는 게 어떨까 해요. 특히 빈민가 쪽은 상수도 정비가 워낙 안 되어 있으니까요.”
의미심장한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의 깊은 눈이 가늘어졌다.
이내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제 실수도 있고……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고 싶었습니다만…….”
“메닝엔의 영지, 그것도 빈민가 사정에 대해 제가 어떻게 알고 있냐고요?”
질문을 빼앗긴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라모나는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미카엘라를 위해서 일했어요.”
이만하면 미카엘라가 레헨트를 두고 수상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말을 알아들었을 거다. 저 남자는 워낙 눈치가 빠르니까.
전달할 내용은 모두 전달했다. 더 이상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은 라모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뺏어서 죄송해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라모나?”
당황한 로베르트가 그녀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담긴 떨림에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그녀는 로베르트에게서 등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각하께 레이먼의 편지 이야기를 드리지 않은 건 각하를 의심해서가 아니에요.”
“…….”
“각하를 믿고 싶었기 때문이죠. 그럼 이만, 실례할게요.”
라모나는 뒤돌아 로베르트의 표정을 확인하지 않고 침실 문을 열었다.
달칵.
레헨트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이거면 되었다.
목적을 달성한 라모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어쩐지 욱신거리는 가슴을 모른 척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