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다시 침실로 돌아온 라모나는 침대 헤드에 기대 레이먼의 편지를 펼쳐 보았다.
<존경하는 누님께.>
첫머리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었다.
‘얘는 정말 한결같네.’
레이먼은 항상 존경하는 누님이라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라모나가 편지를 의젓하게 쓴다며 칭찬해 준 이후부터 고정된 인사말이었다.
‘하여간 아직 애라니까.’
새삼스레 라모나는 회귀를 실감했다.
레이먼이 살아 있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세상. 그녀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편지를 마저 읽었다.
<오랜만이야 누님. 먼저 나는 누님의 파혼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의사 표명을 할게.
요아힘 페브룩은 그냥 개새끼거든.
난 누님이 지금이라도 그 자식의 본모습을 알게 된 것이 기뻐.>
“풉.”
그건 맞지. 적나라한 표현에 라모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가벼운 시작과 달리 이어지는 내용은 영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누님, 누님이 내게 답장하지 않는 것은 내가 저번 편지에 누님의 새 약혼자 또한 개새끼라고 적었기 때문일까?
내가 메닝엔 공작을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메닝엔의 공주님이라고 표현해서 화가 많이 난 거야? 틀린 말은 아닌데.
차라리 누님이 내게 화가 난 거였으면 좋겠어. 그럼 잘못을 싹싹 빌면 될 테니까. ―물론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메닝엔 공작을 개새끼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렇지만 나는 누군가에 의해 내 편지가 전달되지 못했거나, 혹은 누님의 답장이 내게 전달되지 못한 상황에 대한 걱정을 저버릴 수 없어.
해서 고민하는 나를 본 2황자 전하께서 특별히 내 편지를 전해 주시기로 하셨어.
누님, 부디 이 편지에는 답장을 해 줘. 화가 난 것이라면 나를 책망해도 좋아.
누님의 안전을 기원하며, 제국의 서쪽 아이티아르에서.
레이먼.
추신: 암호는 알지?>
편지를 다 읽고도 라모나는 한동안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정말 누군가 레이먼의 편지를 빼돌린 것이라면, 그렇다면 누가 그런 짓을 벌인 것일까.
‘미카엘라?’
벤트하임 공작의 자녀는 미카엘라 한 명뿐이었다.
미카엘라에게 가문을 물려줄 생각이 없는 공작은 이미 양자 후보 몇몇을 추려 두었다.
그중 하나가 레이먼이 있는 서쪽 경계 아이티아르에 근무 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미카엘라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떠오르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라모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자 잠자리를 준비하던 티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걱정이 많이 되시는 거죠?”
“응? 뭐가?”
“선대 공작님과 공작 부인 말이에요.”
“……갑자기 그분들은 왜?”
“유명한 이야기잖아요. 위나트의 신데렐라.”
“위나트의 신데렐라?”
생소한 이야기에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차 싶었는지 티아가 자신의 입을 찰싹 때렸다.
“앗! 죄송해요. 하녀들끼리 하는 말인데, 제가 말을 못 가렸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신경을 안 쓸 수 있을까. 라모나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티아를 재촉했다.
“무슨 일인데, 티아. 말해 봐.”
“그게…….”
곤란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던 티아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그 잘난 공작 각하의 어머님 있잖아요. 이미 돌아가신.”
“응.”
“그분이 아무래도…… 음…… 친정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위치셨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공작저에서도 좀 버거우셨던 모양이더라고요.”
“아아, 그 이야기였구나.”
그제야 라모나는 티아가 하려던 이야기가 뭔지 알아챘다.
선대 공작, 클레멘스가 그렇게도 싫어했다는 로베르트의 어머니 이야기였다.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딱히 나를 싫어하신다고 느끼지는 못했는데. 싫어하시면 또 어쩌겠어. 어쩔 수 없는 거지.”
“아가씨…… 제가 조바심에 괜한 말씀을 드렸어요. 히잉. 신경 쓰지 마시고 푹 주무세요.”
“난 신경 안 쓰니까 너야말로 걱정하지 말고 좋은 밤 보내렴.”
그제야 장난스럽게 웃은 티아가 불을 껐다.
어둠이 찾아오자 순식간에 불안함이 솟아올랐다.
로베르트 메닝엔을 믿어도 되는 걸까.
‘정말 그 남자가 범인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티아를 불렀다.
“티아.”
“네?”
“자작저에 가서 레이먼의…….”
티아에게 아이젠부르크 자작가에 레이먼의 편지가 왔는지 물어보고 오라고 하려던 라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겠지. 설마 아무리 계약 관계라 한들 그 정도는 아닐 거야.
그녀는 커져 가는 의심을 애써 외면했다.
“……너도 잘 자라고.”
“역시 아가씨는 너무 상냥하시다니까요. 좋은 밤 보내세요.”
활짝 웃은 티아가 자리를 떴다.
보드라운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린 채로 라모나는 생각했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이라고.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자고.
사실은 그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 *
다음 날 아침, 메닝엔 공작저의 다이닝룸.
채도가 낮은 연두색 원피스에 깔끔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라모나가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가족 간의 친밀한 시간에 저를 초대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유디트는 라모나에게 아침 식사를 함께하자 청했다.
정말 라모나를 로베르트의 약혼녀로 인정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덧붙였다.
“할머님, 할아버님.”
할아버님이라는 호칭에 클레멘스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이내 그가 묵묵히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클레멘스와 달리 유디트는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그 광경을 지켜보던 로베르트가 어쩐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모나, 나의 사랑.”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뭐지? 이번에는 뭐지? 라모나는 바짝 긴장한 채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로베르트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작은 새.”
그 순간 클레멘스의 손이 움찔, 하고 떨렸다.
로베르트는 라모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척이나 속상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서 죽어 버릴 것 같았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평소처럼 멀쩡하고 어여쁘기만 하지?”
손자의 입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말에 유디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라모나도 마찬가지였다.
저 새X. 왜 진화했지? 그의 가공할 주둥이 앞에 라모나의 욕도 나날이 진화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클레멘스와 유디트의 앞, 라모나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나긋하게 대답했다.
“어머, 로베르트. 나도 당신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거짓말. 당신은 나 없이도 잘 지내지 않았습니까.”
사실이긴 했다. 아니, 사실 없는 게 더 좋았다.
거짓말에 취약한 라모나가 차마 아무런 대답도 못 하는 사이, 로베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나? 응? 나를 얼마나 생각했습니까? 숨 쉬는 순간마다?”
“하. 하. 하. 나의 스릉…….”
라모나가 이를 악물었다.
“어른들도 계시는데 부끄럽게 왜 그래요.”
“제가 잠시 철없게 굴었군요.”
로베르트가 얄밉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의 천사. 당신 앞에서만 서면 자꾸 어린아이가 되어 버리나 봅니다.”
아니, 그냥 재앙의 주둥이가 되는 거겠지. 라모나는 또다시 치솟는 욕설을 삼켰다.
당황한 듯 보였던 유디트는 이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젊음이란 보기 좋구나.”
아니요. 젊어서 저러는 게 아닙니다. 그건 젊음에 대한 모욕이에요.
라모나는 유디트의 말을 정정해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일단 한 번 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
애꿎은 날씨 이야기를 하면서.
‘저 자의식 과잉 변태 쪽은 쳐다보지도 말아야지.’
진짜, 저런 개소리는 못 하게 눈도 마주치지 말아야지. 그녀는 굳게 다짐하며 버터나이프를 들었다.
공작저의 아침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충실했다.
아침에 갓 만들어 낸 신선한 버터, 고소한 향기가 풍기는 빵, 얇게 썬 하몽과 치즈. 그리고 한입에 넣기 좋게 예쁘게 손질한 과일까지.
주방장이 세심하게 신경 쓴 흔적이 가득한 식탁이었다.
따뜻한 홍차로 입을 적신 라모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빵에 버터를 발랐다.
그때였다.
“아.”
‘……아?’
저건 또 무슨 소리야?
당황한 라모나가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얌전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라모나는 혼란에 빠졌다.
‘뭐지? 무슨 의식 같은 건가? 아니면 메닝엔 공작가만의 예의가 따로 있나?’
……나도 입을 벌려야 하나?
라모나가 엉겁결에 조심스레 입을 벌리려던 그때, 로베르트가 다시 소리를 냈다.
“아.”
그리고 친절하게 자신의 입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설마 저거…….’
먹여 달라는 거야?
로베르트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빨리 맛있는 당신 그이의 입술에 먹여 주시죠.”
이런 아동으로 퇴행한 미친 변태 또라이를 봤나. 라모나는 차라리 이대로 기절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댕그랑!
당황한 클레멘스의 포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제야 로베르트는 실수했다는 듯 눈을 찡긋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
“할아버님이 오신 걸 또 깜빡한 탓에…… 평소처럼 해 버렸군요.”
라모나는 생각했다.
혹시 깜빡한 건 네 정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