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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34화 (35/151)

#34화

잠시 후, 소식을 전해 들은 라모나가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종종걸음으로 로비로 향하며 그녀가 물었다.

“각하,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선대 공작 각하라뇨?”

“할아버님이 오신 모양입니다.”

“할아버님요?”

“제 아버지께서 할아버님 생전에 공작위를 물려받은 건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죠.”

“그렇다면 제 아버지가 마차 사고로 할아버님보다 일찍 세상을 뜬 것도 알고 계실 테고요. 그 일의 연장선입니다.”

그가 태연하게 부모의 죽음을 입에 담자 라모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 되었다.

자신이 그들의 죽음을 놓고 로베르트와 협상했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불현듯 눈앞의 남자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믿었던 가신에게도 배신당하고.

끝내 곧 죽게 될 남자.

쿵.

낮의 일 때문일까? 이상하게 기분이 내려앉았다.

동시에 묘한 죄책감이 마음을 점령한 탓에 라모나는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를 써야 했다.

로베르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따 마저 설명드리도록 하죠.”

“예.”

흐음? 한층 가라앉은 라모나의 태도에 로베르트가 눈썹을 까딱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오랜만에 듣는 풀네임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었던 라모나가 습관처럼 허리를 펴며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혹시 저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중입니까?”

“……!”

정곡을 찔린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그, 그럴 리…….”

“어쭙잖은 동정심은 가지지 마시죠.”

로베르트가 피식 웃었다.

평소에 짓던 예쁜 미소는 아니었다.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그리고 지쳐 보이는 얼굴.

찰나에 스쳐 간 그의 또 다른 모습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태연스레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딴 걸 받기에 전 너무 완벽하지 않습니까.”

“……역시 각하의 자존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네요.”

“칭찬은 감사히 받도록 하죠, 아.”

무언가 떠오른 듯 갑자기 로베르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갑자기 그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라모나.”

“예, 예?”

훅,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또다시 시원한 향기가 풍겼다.

당황한 라모나가 허둥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목덜미는 어느새 달아오른 채였다.

그러나 로베르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할아버님 뺨은 때리면 안 됩니다.”

……뺨?

……뺘암?

이건 또 무슨 의식의 흐름일까. 어처구니가 없었던 라모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물론 그녀가 요아힘의 뺨을 때리긴 했다.

생각해 보니 댄버스 부인의 뺨을 때린 적도 있다. 명백히 실수였지만.

아무튼.

‘내가 무슨 사람들 줄 세워서 뺨 때리고 다니는 깡패도 아니고…….’

억울해.

팔짱을 낀 라모나가 뾰족한 말투로 되물었다.

“할아버님 뺨을요? 제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녀의 질문을 뭐라고 이해한 건지 로베르트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할머님은 더 안 됩니다.”

“……설마 제가 할머님을 대신 때리려고 물어봤을까요.”

“아무튼, 저는 말했습니다. 절대 안 된다고.”

이게 진짜?

라모나는 생각했다.

저 잘난 남자 뺨이야말로 한 대만, 진짜 딱 한 대만 때려 보고 싶다고.

살벌한 라모나의 눈빛에 로베르트가 피식 웃었다.

재수 없지만 치명적인 미모에 라모나가 멈칫한 사이,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어울립니다.”

“……예?”

“그 반지요. 사파이어는 탁월한 선택입니다.”

갑자기 웬 반지 칭찬?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로베르트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올라갔다.

“당신이 나를 노려볼 때면 꼭 그 사파이어처럼 눈이 빛나거든요.”

저건 칭찬이야, 욕이야? 라모나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지만, 로베르트는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약혼녀님.”

약혼녀라는 단어에 묘하게 힘이 들어갔다.

사파이어 반지가 알폰조의 손등을 긁었다는 사실에 로베르트가 뿌듯해한다는 걸 알 리가 없는 라모나는 혼란에 빠진 채 그를 쫓아갔다.

* * *

메닝엔 공작저의 로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능숙하게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네는 로베르트를 보자마자 그의 할아버지, 클레멘스가 혀를 찼다.

“쯧.”

“쯧이라뇨. 오랜만에 보는 손자에게 하는 인사치고는 너무 성의 없으신 거 아닙니까?”

“그 입은 여전하군.”

클레멘스가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그의 아내, 유디트 메닝엔이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네 할아버지는 걱정했다는 이야기를 꼭 이런 식으로 하지.”

우아하고도 나긋한 목소리와 곧게 편 허리. 오랜 세월도 그녀의 품위 앞에서는 한 수 접은 모양이었다.

유디트가 입을 열자 마법처럼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로베르트도 특유의 예쁜 미소가 아닌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할머님도 무탈하게 지내신 듯하여 다행입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디서 괜한 소식을 들은 모양이구나. 몸이야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지. 너야말로 무리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뭐, 젊은데 어떻습니까.”

“설마 그 젊음이 평생 가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통상적인 안부 인사를 시작으로 친밀한 대화가 제법 길게 이어졌다.

손자와 할머니라기보다는 어머니와 아들 같은 느낌이랄까.

덕분에 라모나의 입이 더욱 바짝 말라 들어갔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다짜고짜 메닝엔 공작저에 눌러앉은 벤트하임의 가신이었다.

유디트의 입장에서는 라모나가 마땅찮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로베르트를 아들처럼 각별히 여긴다면 더더욱.

‘선대 공작 부인이 저 주둥이의 어머니도 되게 싫어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나…… 앞으로 괜찮을까?

뺨이라도 한두 대 정도 맞고, 홍차 세례를 받은 다음에, 엄청난 모욕이라도 받는 건 아닐지.

라모나는 겁에 질리고 말았다.

‘잠깐 이거 좀 익숙한데.’

재수 없지만 향긋한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무튼 지레 겁을 먹은 그녀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사이, 유디트가 로베르트를 향해 물었다.

“이쪽이 네 약혼녀인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예. 라모나, 이쪽은 제 할머님이십니다.”

예상외로 유디트는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메닝엔 공작 부인.”

“그리 딱딱하게 부를 필요 없네. 가족이 될 사이에.”

유디트는 라모나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누군가를 떠올린 그녀의 눈빛이 안타까이 허공을 헤맸다.

클레멘스는 복잡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때,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할아버님께도 소개를 드렸어야 하는데 늦었군요.”

정정하자면.

“이쪽은 제국의 보물 라모나입니다.”

입이 아니라 주둥이를 열었다.

로베르트는 싱글싱글 웃으며 라모나를 향해 말했다.

“오늘도 어여쁜 나의 천사, 이쪽은 제 할아버님이십니다.”

‘각하, 제발. 진짜 좀 제발.’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역할인 것을.

젠장, 젠장. 라모나는 겨우 스스로를 다독이며 로베르트의 뺨을 어루만졌다.

“하, 하하. 로베르트,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당황하시잖아요.”

“하지만 사실인 것을.”

그의 눈이 얄미우리만큼 곱게 휘어졌다.

이 새X가 진짜. 로베르트를 향해 눈을 부릅뜬 라모나가 억지로 웃었다.

“호. 호. 호.”

그녀는 바들거리는 입꼬리를 겨우겨우 끌어 올리고는 클레멘스와 유디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젠부르크의 라모나입니다.”

“……반갑네.”

분위기에 휩싸인 클레멘스가 얼떨결에 라모나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이내 그가 못마땅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쯧, 꼭 제 아비처럼 굴기는.”

순간.

‘……응?’

라모나를 끌어안은 로베르트의 손에 움찔 힘이 들어갔다.

당황한 라모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로베르트?”

“오, 라모나.”

하지만 로베르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긋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의 입가에 감도는 미소가 유달리 예뻤다.

‘뭐지?’

뭔가 이상한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라모나가 본능처럼 뒷걸음질 치려는 그때.

“내 사랑, 나의 천사. 당신 혹시 추운 건 아닙니까? 손이 너무 차가운데요.”

그가 다정하게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불길하다 불길해. 라모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어머, 아니에요. 그냥 바깥에 있어 그런 모양이에요.”

“그래도 혹시 불편한 곳이 있다면 꼭 말해야 합니다.”

“그럼요. 걱정하지 말아요.”

다행히 무사히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발걸음을 떼려던 그때였다.

“윽.”

갑자기 로베르트가 짧은 신음과 함께 가슴을 움켜쥐었다.

잘생긴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놀란 라모나가 얼른 그를 부축했다.

“로베르트?”

“으윽, 가슴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로베르트! 괜찮아요? 숨 쉴 수 있겠어요?”

“그냥…….”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는 고통으로 가득 찬 가련한 눈망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아픈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 탓에…….”

경악한 라모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용기만 있다면 눈앞의 노부부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뭘 잘못 먹여 키웠기에 애가 이렇게 자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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