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2황자는 지금쯤 서쪽 경계에 있어야 하는데…… 어째서 수도에?’
또다시 미래가 바뀌었다는 생각에 라모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라모나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알폰조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싫은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라모나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이쪽에서 먼저 실수했으니 신경 쓰지 마.”
알폰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젓더니 대뜸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라모나에게 건네주었다.
“받아.”
“……예?”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잔뜩 구겨진 편지 봉투였다.
“전하, 이건……?”
얼떨떨한 라모나가 되묻자 알폰조는 귀찮은 듯 이마를 찡그렸다.
“레이먼, 그 자식이 목 빠지게 기다리는 꼴 못 봐주겠으니까 답장 좀 하고.”
대체 뭔 소리야?
설명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의 화법에 당황한 라모나가 편지와 알폰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그러니까 이게 레이먼의 편지라는 말씀이신가요? 사령부를 통해야 편지를 보낼 수 있을 텐데 어떻게…….”
사령부라는 말에 알폰조가 피식 웃었다.
“사령부를 통한 편지는 영영 못 받을 텐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그는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홀가분하게 자리를 떴다.
“저, 전하? 2황자 전하?”
라모나가 그의 뒷모습에 대고 애타게 외쳤지만 알폰조는 손을 한번 까딱할 뿐이었다.
라모나는 멍하니 거대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영영 못 받을 거라니.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순간 불현듯 떠오른 한 가지 가능성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설마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지.
애써 부인하지만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의심에 라모나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때.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알폰조의 요란한 등장 이후, 라모나는 발이 삔 것 같다며 약초를 사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호위는 졸도할 것 같은 표정으로 당장이라도 저택에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당장 아픈데 어떡하냐는 라모나의 억지에 결국 한숨을 쉬며 길을 앞장섰다.
티아는 울먹이며 라모나를 부축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많이 아프신 건 아니죠?”
“괜찮아, 그냥 살짝 접질렸을 뿐이야.”
사실 발목을 다친 건 아니었다. 약재상을 방문할 타당한 핑계가 필요했을 뿐.
‘마침 잘됐지.’
라모나는 회귀 전의 일을 떠올렸다.
다가올 봄, 따뜻해진 날씨와 함께 슬슬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다. 그 정도는 매년 있던 일.
하지만.
‘……미카엘라.’
너는 이번에도 그런 선택을 할까?
지난 생의 죄악을 떠올린 라모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 * *
발목을 삔 것 같다는 라모나의 말에 약재상이 고개를 갸웃했다.
“쓰으읍, 발목이 붓지는 않았는뎁쇼…….”
“나는 너무 아파서 못 걷겠는데.”
라모나는 뻔뻔한 얼굴로 되받아쳤다.
약재상 주인은 미심쩍어하는 눈길을 보내면서도 약재를 꺼내 주었다.
“흐으으으음, 뭐 아가씨께서 정 아프시다면야. 자작저에서 항상 가져가던 조합으로 준비해 드립죠.”
“아, 카밀레 차도 준비해 줘. 요즘 자꾸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아.”
“그러시면 혹시 모르니까 캐러웨이 씨앗이랑 같이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이맘때 항상 음식을 잘 못 먹고, 탈이 나는 사람이 많아서 조심해야 합니다.”
“하긴, 이제 봄이긴 하지.”
“그것도 있는데, 또 설사병이 돌까 봐 걱정이지요. 작년에 얼마나 난리였는지……. 어휴, 말도 마십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약재상 주인이 약초를 꺼내러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티아는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소화가 잘 안되세요? 그럼 나온 김에 저희 뒤스커도 사 가요.”
“뒤스커?”
“예. 소화 안 되면 먹는 빵이요. 카밀레 차에 찍어 먹으면 배탈 났을 때 최고예요.”
라모나가 티아의 말에 혹한 것 같자 얼굴이 더 어두워진 호위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빵 가게가 바로 옆이니 제가 사 오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
라모나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호위가 뛰어나갔다.
얼마 뒤, 약재상 주인이 곤란한 얼굴로 나왔다.
“아이고 아가씨. 발목에 쓸 약초는 있는데…… 캐러웨이 씨앗이 다 떨어졌습니다. 요즘 찾는 사람이 많았나 봅니다.”
심상치 않은 예감에 라모나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 그럼 카밀레 차라도 챙겨 줘.”
“예. 그런데 요즘 가격이 너무 올라서 어떻게…….”
“신경 쓰지 말고 넉넉히 넣어 줘. 가격은 상관없어.”
바로 옆이라는 빵집에 뛰어갔던 호위도 한참 만에 빈손으로 되돌아왔다.
“죄송합니다. 동네 빵집마다 뒤스커가 다 팔렸다고 하는 통에…….”
라모나는 확신했다.
‘이번 생에도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구나.’
미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바뀐 것일까.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손목을 바라보았다.
흉터 하나 없이 너무나 깨끗한 손목 위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시뻘겋게 불타오른 마을, 누더기를 걸치고 황급히 대피하는 사람들,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라모나! 잘 해결됐어? 응? 어떻게 된 거야?>
넋이 나간 라모나의 어깨를 붙들고 다그치던 미카엘라.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미카엘라. 지난 생의 내가 너를 도왔다면, 이번 생의 나는 너를 막을 거야.
푸른 눈이 비장하게 빛났다.
* * *
늦은 밤, 겨우 공작저로 돌아온 로베르트의 집무실.
로베르트는 낮에 있던 일을 보고받고 눈썹을 찡그렸다.
“2황자가 라모나에게 접근을?”
서쪽 경계에 있는 줄 알았던 알폰조가 수도에 나타날 줄이야.
그 사실도 의아했지만, 그가 라모나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이 더 불쾌했던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덕분에 바짝 긴장한 호위가 빠르게 대답했다.
“예, 레이디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듯했습니다.”
“의외군. 기다린 사유는?”
“동생분의 편지를 하나 전해 주었습니다.”
“굳이?”
“그게……. 답장 좀 하라는 말씀도 함께였습니다.”
흠, 로베르트가 습관처럼 마른세수를 했다.
‘2황자 알폰조와는 또 언제 그런 밀회를 나누는 사이가 된 건지.’
밀회라기엔 너무 공개적인 장소였지만, 로베르트는 은연중에 라모나와 알폰조의 은밀한 만남을 상상하고 말았다.
밀회, 밀회라. 그의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나 하나로는 만족을 못 하나? 그런 멍청한 근육이 취향인가?”
“……예?”
“아냐, 그럴 리 없지. 나가 봐.”
주인의 헛소리가 시작됐다는 걸 깨달은 기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귀찮아지기 전에 잽싸게 밖으로 나가려는 기사의 뒤통수를 향해 로베르트가 말했다.
“오늘 호위 제대로 못 한 데 대한 벌은 제대로 각오하고.”
“죄송합니다.”
냉랭한 목소리에 깃든 책망을 눈치챈 기사는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자리를 떴다.
달칵.
문이 닫힘과 동시에 로베르트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음험한 개자식도 모자라 이제는 근육 바보? 설마 이러다 베르나딘도 나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저러다 황실 남자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기라도 하겠다며 로베르트는 혀를 찼다.
덥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자꾸 목이 탔다.
또다시 벌컥 물을 들이켠 그가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냥 라모나를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너무 야심한 시각이었다.
고민 끝에 로베르트는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올린 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그런 타입을 좋아하나……?”
여자들은 울퉁불퉁한 근육 별로 안 좋아하지 않나? 게다가 알폰조는 너무 큰데?
물론 그런 거대한 타입을 좋아하는 여자들도 있기는 했다.
괜히 억울했다.
자신을 두고 나의 그이니, 맛있는 입술이니 그런 발칙한 말을 하고 다녔으면서 몰래 알폰조와 만나다니.
“설마, 나를 가지고 논 건가?”
제국 최고의 신랑감, 신이 빚은 최고의 피조물 나 로베르트 메닝엔을?
“하, 하, 하.”
그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지.’
관심을 사기 위한 질투 작전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매일 자신을 보면서 알폰조 같은 녀석이 눈에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그제야 마음이 좀 편해진 그가 눈을 감았다.
밀회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생각이 영 이상하게 흘러갔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그때 문밖에서 브리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똑똑.
“각하.”
“무슨 일이지?”
“선대 공작 각하께서 수도에 도착하셨습니다.”
오, 이런. 벌써?
오랜만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진심으로 일그러졌다.
“생각보다 빨리 올라오셨군.”
순간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맞다, 푸른빛.
“……그건 좀 큰일인데.”
심각한 얼굴의 로베르트 메닝엔이 턱을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