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현재 수도의 가장 핫한 이슈였다.
귀부인들의 티타임에도, 생기발랄한 레이디들의 뱃놀이에도. 심지어는 도박꾼들의 은밀한 모임까지도.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인사처럼 말했다.
“그 소식 들으셨어요?”
그 뒤로 이어지는 대화는 뻔했다.
‘그’ 메닝엔 공작을 꼼짝 못 하게 할 만큼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매력적이던가?
혹은…… ‘그렇다면 나도 한번?’이었다.
후자를 생각하는 이들은 크게 두 부류였다.
로베르트 메닝엔을 호시탐탐 노리는 결혼 적령기의 레이디.
그리고 로베르트 메닝엔의 여자를 자신이 유혹할 수 있을 거라 헛된 망상을 품는 신사.
어느 쪽이든 라모나에게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정말…… 정말 귀찮다.’
로베르트가 자리를 비운 평화로운 오후. 수북하게 쌓인 초대장을 보며 라모나가 한숨을 삼켰다.
이 사태를 예견한 댄버스 부인은 오늘도 심혈을 기울여 찻잔을 골랐다.
다행히 터키석을 깎아 만든 듯 영롱한 푸른빛 찻잔은 보는 것만으로도 라모나의 마음을 사르르 녹여 버렸다.
‘오!’
감탄한 그녀의 코가 찡긋거리며 오뚝하게 솟았다.
달그락.
“댄버스 부인.”
찻잔을 내려놓은 라모나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예, 레이디.”
“이렇게 아름다운 컬렉션을 보유한 가문이 또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컬렉션을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아는 시녀장을 고용한 가문은 메닝엔 공작저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어.”
“과찬이십니다.”
댄버스 부인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귀중한 물건의 진가를 알아주시는 분을 모시는 것은 공작저의 일원으로서 매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두 사람의 흐뭇한 눈빛이 마주쳤다.
라모나의 곁에 선 티아도 괜히 흐뭇하게 웃었다.
아쉽게도 즐거운 찻잔 감상은 여기까지, 라모나는 한숨을 삼키며 별 영양가도 없을 초대장 더미에 손을 뻗었다.
‘이 병아리같이 샛노란 초대장은 안 봐도 레이디 오셀튼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란색으로 치장한 채 로베르트가 숨만 쉬어도 너무 멋있다며 꺅꺅거리던 그녀를 떠올리니 머리가 다 아픈 기분이었다.
……묘하게 불쾌하기도 했다.
‘좋아, 이건 패스하자.’
노란 초대장을 옆으로 미뤄 둔 라모나는 다른 초대장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의외인 것은 페브룩 백작가에서도 초대장을 보냈다는 사실이었다.
‘웬일이야? 그 자존심에?’
라모나는 호기심에 봉투를 뜯어봤고.
<친애하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에게.
영애가 내 아들에게 행한 무례는 잘 들었어요. 그래요, 영애가 들떠 있을 것은 충분히 이해해요.
아직 어린 나이이니 결혼 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게 뭔지 모를 수도 있겠죠.
지금이라도 정신 차린다면 내 특별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영애를 용서…….>
까지 읽고 우아한 손짓으로 종이를 구겨서 던져 버렸다.
눈이 휘둥그레진 티아가 물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별거 아냐.”
라모나는 굳이 편지의 내용을 읊어 주는 대신 입꼬리를 기계적으로 끌어 올렸고, 댄버스 부인은 아무 말 없이 따뜻한 차를 한잔 더 따라 주었다.
역시 공작저 시녀장다운 관록이었다.
“고마워.”
따끈한 찻잔을 손에 쥔 채 라모나는 생각에 빠졌다.
로베르트 메닝엔과의 약혼은 확실히 그녀의 미래, 아니 현재를 바꿔 놓았다.
‘그렇다면 그 일도…….’
이번 생에서는 없는 일이 되는 걸까?
‘일단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
시기를 가늠해 보는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라모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레이먼에게 소식을 전한 지 너무 오래됐네…….”
라모나의 동생 레이먼은 제국 서쪽 경계에서 근무 중인 기사였다.
종종 환수가 등장하는 서쪽 경계는 그 특성상 정보 보안이 필수였다.
귀족도 예외는 없었다. 서쪽 경계에 우편을 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본인이 수도 사령부를 통해 직접 부쳐야만 했다.
그야말로 타당한 외출 거리. 라모나의 의중을 눈치챈 티아가 잽싸게 말을 이었다.
“그러게요! 레이먼 도련님이 걱정하고 계시겠어요. 편지라도 쓰시는 건 어때요?”
공작저 시녀장 못지않은 관록이었다.
역시 티아. 뿌듯한 마음으로 라모나는 괜히 한번 망설이는 척해 보았다.
“으음, 굳이?”
“네! 도련님은 지금쯤 눈이 빠지게 아가씨의 편지를 기다리고 계실걸요?”
평소의 레이먼을 생각하면 그럴 만하긴 했다. 레이먼은 언제나 시간이 나는 대로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으니까.
순간 의아함에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공작저로는 한 번도 편지를 안 보냈지? 지금쯤이면 분명 내 소식을 들었을 텐데…….’
많이 바쁜가 보네. 라모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네.”
라모나의 동의에 댄버스 부인이 입을 열었다.
“편지지로 쓸 종이를 가져오라 일러두겠습니다.”
손수 찻잔을 정리한 댄버스 부인이 쟁반을 들고는 자리를 떴다.
라모나는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느다란 눈초리로 지켜보았다.
‘그 남자에게 소식을 전하려는 거겠지.’
이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로베르트와 자신의 관계를 되새기게 되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시험하는 사이.
그런데도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이.
이런 관계는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괜히 깊게 생각하지 말자.’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꿈틀거리며 돋아난 연두색의 새순이 오늘따라 유독 싱그러웠다.
* * *
그날 오후, 제국군 사령부.
살랑거리는 벚꽃 같은 연한 분홍색 보닛을 눌러쓴 라모나가 창구 앞에서 편지를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지난번에 메종 마뜨리모에서 구매했던 푸른 사파이어 반지가 반짝였다.
“서쪽 경계 아이티아르, 레이먼 아이젠부르크 앞으로 보내 주세요.”
“성함을 말씀해 주십시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라모나의 이름이 들리자 한 남자가 힐끔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라모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사령부로 직접 찾아오는 게 번거로워서 그렇지, 절차는 간단했다.
수월하게 레이먼에게 보낼 편지를 부친 라모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제국군 사령부를 빠져나왔다.
밖에서 라모나를 기다리던 티아가 쪼르르 그녀에게 달려왔다.
“아가씨! 별일 없으셨어요?”
“응, 편지 하나 부쳤을 뿐인데 뭐.”
요아힘 사건 이후로 티아는 라모나를 과보호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라모나가 작게 웃었다.
티아와 함께 라모나를 기다리던 메닝엔 공작가의 기사가 그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늘 오전, 편지지를 가져온다던 댄버스 부인이 데려온 기사였다.
“공작 각하께서 직접 골라 보내 주신 호위입니다. 실력이 좋은 이이니 안심하고 동행하라 하셨습니다.”
안심이라, 대체 누구를 위한 안심인 건지. 라모나는 재빠른 로베르트의 일 처리에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오랜만에 나오니까 좋기는 하네.’
마차들이 일으킨 흙먼지가 섞인 공기도, 길가에 제멋대로 피어난 하얀 아네모네도.
별거 아닌 길거리의 풍경이 그녀를 즐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외출의 즐거움은 여기까지.
해야 할 일을 떠올린 라모나가 티아를 향해 말했다.
“오랜만에 나온 김에 시장이나 구경하고 싶은데.”
시장이라는 말에 호위가 곤란한 얼굴이 되었지만, 라모나는 못 본 척 쾌활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번에 마셨던 석류 주스 있잖아, 티아. 그게 종종 생각나더라고.”
“맞아요, 맞아요. 그거 진짜 맛있죠. 희한해요. 대단한 걸 넣는 것도 아닌데, 직접 해 먹으면 그 맛이 안 나더라고요.”
“그러니까 말이야.”
눈치 빠른 티아가 재잘거리며 시장으로 앞장섰다. 결국, 호위도 쭈뼛쭈뼛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라모나와 티아가 막 시장에 들어서려던 그때였다.
“거기 서! 이놈 자식! 너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저 멀리서 잔뜩 화가 난 한 상인이 버럭 고함을 쳤다.
상인의 앞으로 체구가 자그마한 소년이 날다람쥐처럼 빠르게 도망쳤다.
“세상에, 소매치기인가 봐요. 쪼끄만 게 엄청 빠르네.”
눈이 휘둥그레진 티아가 중얼거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인은 험상궂게 팔을 휘저으며 소년의 뒤를 쫓았다.
“저, 저 도둑놈! 아주 감옥에 처넣어 버려야지!”
“칫.”
소매치기 소년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있는 힘껏 달렸다. 소년이 라모나와 티아의 앞을 쌩하니 지나가던 찰나.
‘……어?’
소년을 알아본 라모나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네가 왜 여기…….”
그때.
“쯧, 위험하게.”
한 은발의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란 라모나가 본능처럼 몸을 움츠렸다.
이상하게도 로베르트와의 접촉은 괜찮았지만, 그녀는 남자와 살이 닿는 것을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싫어한다기보다는 두려워했다.
공포에 질린 라모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그사이 소매치기 소년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괜찮나?”
그녀를 붙든 낯선 목소리가 물었다.
겁에 질린 라모나는 몸을 뒤로 돌려 남자의 손을 세게 쳐 냈다.
탁!
사파이어 반지가 남자의 손등을 긁어 생채기를 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죠?”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아마도 그쪽을 구해 주는 중?”
이내 남자를 알아본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짧은 은색 머리와 붉은 눈동자. 2미터에 가까운 큰 키. 한껏 흐트러진 군복.
“……2황자 전하?”
제국군 사령부에서 라모나를 눈여겨보던 남자, 2황자 알폰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