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벤트하임 공작저. 화장대를 짚고 선 미카엘라가 입술을 짓이겼다.
수도는 온통 라모나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미카엘라가 원하던 그림이기는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카엘라가 원하던 내용은 아니었다.
“메닝엔 공작 각하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에게 푹 빠졌다던데요?”
“저도 들었어요. 페브룩 영식이 아주 우스운 꼴로 공작저에서 쫓겨났다면서요.”
아니야, 내가 그린 그림은 이게 아니야. 미카엘라가 분노로 부르르 손을 떨었다.
며칠 전, 황태자궁에서 돌아온 미카엘라에게 벤트하임 공작 부인이 말했다.
<왜 이리 빨리 돌아왔지, 미카엘라? 만찬은?>
<전하께서 매우 바쁘셔서요. 다음에 함께하기로 했어요.>
미카엘라의 대답에 공작 부인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바텐베르크 계집애 이야기를 이미 다 들었는데, 이 어미를 속이려 들다니. 버르장머리 없는 것.>
그녀는 손가락을 세워 미카엘라의 이마를 찔렀다.
<한심하게 남자 마음 하나 얻지 못해서는……. 눈치껏 아양 떨고 귀염받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못마땅해하는 얼굴의 공작 부인이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때 바꿔 왔을 텐데.>
라모나, 라모나, 라모나.
그깟 아이젠부르크 계집애가 뭐라고 어머니부터 요하네스까지 온통 그 계집애 이야기만 할까.
비참했다.
모자란 아이젠부르크 계집애의 이름이 사방에서 자신을 압박하는 기분이었다.
더 끔찍한 것은 그 이후로 정말 요하네스의 연락이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미카엘라는 직감했다.
이번 일을 무사히 넘기지 못하면 요하네스는 정말로 바텐베르크의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
……고작 그 모자란 계집애 하나 때문에.
‘라모나, 멍청한 너 따위가 내 앞길을 망치려 들어? 감히?’
사랑을 운운하던 라모나의 얼굴이 떠오르자, 분노가 끓어오른 미카엘라가 화장대를 걷어찼다.
“아아아아악!”
그때, 어린 하녀 하나가 눈치도 없이 미카엘라를 위로하려 들었다.
“아, 아가씨. 진정하셔요.”
지난번에 레이디 오셀튼의 서신을 전달한 바로 그 하녀였다.
미카엘라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머지 다 나가.”
다른 하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어린 하녀가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이윽고 모두 자리를 비우자, 미카엘라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하녀를 노려보았다.
“너.”
“죄,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난 너 같은 것들이 제일 같잖아.”
저벅, 미카엘라가 하녀에게로 다가갔다.
“덜떨어지고 모자란 것이 어떻게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을 하지?”
퍽!
“태생부터 천한 주제에. 주제도 모르고.”
그리고 힘껏 발길질했다.
“아악, 잘못했어요. 아가씨!”
“어쩜 목소리까지 이렇게 천할까. 응?”
미카엘라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하녀에게 한참 분풀이를 하던 그녀는 입술을 앙다문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진주를 개어 바른 듯 윤기 나는 피부, 오뚝한 코와 사랑스러운 강아지처럼 커다란 눈망울.
라모나에 비해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자신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고 나서야 미카엘라의 굳은 입가가 풀어졌다.
그녀는 하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결국 내 발밑에도 못 오는 버러지일 뿐이니까.”
이윽고 미카엘라는 차분히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그 손길이 어찌나 우아한지, 조금 전까지 하녀를 발로 걷어차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단정해진 모습으로 환한 미소를 지은 미카엘라는 이내.
쨍그랑!
화병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이를 어쩌면 좋아. 밖에 누구 있니?”
문밖에 대기 중이던 시녀장이 잽싸게 대답했다.
“아가씨,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미카엘라는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떠는 하녀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하녀가 내가 아끼던 화병을 깨뜨렸는데 말이지.”
“예, 아가씨.”
시녀장은 침착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어쩌면 좋을까.”
“창고에 가둬 두겠습니다.”
“흐으음, 너무 과한 건 아닐까?”
“다른 사용인들도 그 정도 선에서 징계를 받습니다.”
“알겠어. 그럼 그렇게 해.”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카엘라는 손을 내저었다.
미카엘라가 화병을 깬 것도, 하녀가 일부러 보이지 않는 부분만 맞은 것도, 멍 자국이 사라질 때까지 창고에 갇혀 있으리라는 것도.
모두 알지만 입을 다물었다.
하늘 같은 그들의 아가씨는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 영애였으니까.
미카엘라는 꿀을 바른 듯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신을 하나 보내려 하는데…… 서쪽 경계에 말이야.”
“심부름꾼을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깍듯이 허리를 굽히는 시녀장을 바라보는 미카엘라의 얼굴에 만족이 번졌다.
‘라모나, 네게 이런 권력이 주어진다 한들.’
너 따위가 제대로 쓸 수나 있겠니. 나와는 태생부터 다른 네가.
‘주제도 모르고 공작 부인 자리를 노리시겠다…….’
그렇다면 내가 네 자리를 똑똑히 알려 줄게. 미카엘라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 * *
탄탄한 소재의 프록코트를 입은 로베르트 메닝엔이 마차에서 내렸다.
훤칠한 키, 코트의 매력을 제대로 살려 줄 넓은 어깨. 들숨 날숨을 따라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고귀한 아우라.
자칭 타칭 제국 최고의 신랑감답게 길을 걷기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꺅!”
그를 곁눈질로 훔쳐보던 꼬마 레이디가 가로등에 머리를 박는 소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로베르트는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숨만 쉬어도 질색하는 라모나와 지내다 보니 이런 반응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하여간 눈은 높다니까.’
그가 라모나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어느새 온종일 그녀의 생각을 하는 것도 모른 채, 로베르트는 클라이스트 백작저의 문을 넘었다.
예상치 못한 공작의 방문에 외출 중이던 에드윈은 황급히 백작저로 귀환했다.
헐레벌떡 뛰어오느라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다.
“헉, 헉. 오셨습니까. 각하.”
“그 거친 숨소리는 내 방문에 대한 항의 표시인가?”
“그럴 리가요!”
에드윈이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이내 급히 숨을 고른 그가 은근슬쩍 덧붙였다.
“……부르셨으면 제가 어련히 공작저로 가기는 했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야릇한 항의 표시는 좀 곤란해.”
“어으, 억, 억. 네.”
오그라든 미더덕 같은 얼굴로 괴상한 소리를 낸 에드윈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로베르트는 길게 끌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최근 엘츠 자작의 동향이 어떻지?”
“평소와 크게 다를 바는 없습니다. 약간의 도박과 사치 정도? 특이한 점이 있다면 부인과 함께 요즘은 시가에 푹 빠져 있는 모양이더군요.”
“시가?”
“예. 요즘 크레모라 백작 부인의 모임에 함께 어울리고 있습니다.”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미 라모나에게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벌써 심상찮은 촉이 왔다.
하지만.
‘크레모라 백작 부인과 어울리는 것을 배신이라 할 수 있나?’
크레모라 백작 부인.
3황자 베르나딘의 어머니인 그녀는 엄밀히 말하면 로베르트의 아군에 가까웠다.
로베르트는 고민에 빠졌다.
이건 엘츠 자작과 자신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계략일까. 아니면 정말 자작의 배신일까.
하지만 생각의 추는 이미 기울어있었다.
<안타깝게도 제가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은 아니라서요.>
로베르트는 그렇게 말하던 라모나의 표정을 기억했다.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쓸쓸한 얼굴. 누군가를 속이려는 사람은 절대 그런 틈새를 보이지 않는다.
그가 습관처럼 마른세수를 하며 입을 열었다.
“그 무리를 조사해 오도록. 특히 자작 부인 쪽으로. 예산이 필요하면 일단 쓰고 청구해.”
“예. 저…… 각하 그런데…….”
에드윈이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외람되지만, 베르나딘 황자 전하께 연락을 한 번 드릴 때가 되지 않았는지……. 아무래도 걱정하고 계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는 슬쩍 베르나딘을 언급함으로 바네사 황녀와의 약혼 건을 상기시켰다.
사실 그랬다.
지금 이 상황이 가장 당혹스러울 사람을 한 명만 뽑자면, 역시 바네사 황녀일 것이다.
협조의 대가로 약혼을 약속한 사람이 갑자기 원수의 부하와 사랑에 빠졌다며 약혼했다. 당황하지 않으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로베르트는 제 좋을 대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정치적 협력이라는 게 다 그런 거지. 베르나딘에게는 다른 것을 약속하면 되니까.’
황녀와 그의 사이는 딱 그 정도 거리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약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하지만 그는 바네사 황녀가 그럴 리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분명 이후 상황을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한 계책이리라.
죄책감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일 뿐, 황녀가 받았을 상처가 걱정되는 건 아니었다.
대화 도중 라모나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쓸쓸함은 그렇게 잘 알아챈 주제에.
‘……미치겠군.’
덕분에 그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태인지를 실감했다.
이상하게 웃음이 헤픈 것도. 생각의 추가 줏대 없이 기울어 버린 것도.
……자꾸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예뻐 보이는 것도.
지난밤.
<내게 당신의 입술보다 맛있는 것은 없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 순간, 로베르트는 쥐고 있던 포크며 나이프를 다 집어 던지고 달려가 말할 뻔했다.
그럼 한번 먹어 보지 그러냐고.
이곳의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을 자신이 있으니까.
‘젠장, 꼴사납게.’
아주 덜떨어진 변태 같군. 실제로 라모나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는 로베르트가 혀를 찼다.
‘술이 많이 약해졌나?’
아무래도 어제 마신 와인이 과했던 모양이다.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 그리고 말인데. 로지나의 계획은 없던 거로 해. 폐기로.”
“예에? 아예 말입니까? 지금 황태자가 바텐베르크에 꾸준히 접촉 중인데 괜찮을까요?”
에드윈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각하, 혹시 레이디가 마음에 걸리십니까?”
라모나 때문이냐는 에드윈의 말에 로베르트가 같잖다는 듯 웃었다.
“그럴 리가. 대신 로지나가 해 줄 다른 일이 있어.”
그래, 그럴 리가.
천하의 로베르트 메닝엔이 그럴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