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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30화 (31/151)

#30화

다음 날 아침.

퍽! 퍽!

라모나는 상쾌한 이불 차기로 하루를 시작했다. 당연히 지난밤의 일 때문이었다.

<내게 당신의 입술보다 맛있는 것은 없답니다.>

‘이게 정말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맞나?’

내가 저렇게 끔찍한 말을 했다니. 라모나는 참담함에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혹시 나…… 저주라도 걸렸나?’

하지만 저주는 무슨 얼어 죽을. 현실 도피를 시도했으나 얻은 것은 자괴감뿐.

퍽! 퍼벅!

밀려오는 수치심에 라모나가 다시 이불을 걷어찼다.

세숫물을 들고 오던 티아가 그 광경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달려왔다.

“아, 아가씨! 왜 그러세요? 주치의를 불러올까요?”

“티아…….”

너 정말 주치의랑 사귀니? 응? 왜 이렇게 매일 불러오고 싶어 해?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하소연하듯 입을 열었다.

“아니 글쎄, 내가 미카엘라 그 쓰…….”

……레기에게 배신을 당해서 죽었다 깨어났거든?

그래서 복수를 하려고 메닝엔 공작을 찾아왔는데, 이럴 수가!

재수만 조금 없는 줄 알았던 메닝엔 공작은 사실 메닝엔의 공주님, 공포의 주둥이였단다.

‘……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라모나는 체념한 채 손을 내저었다.

“별일 아니야, 잘 잤어?”

“아가씨, 혹시 그 쓰레기. 아니, 티아 너까지 왜 이래!”

찰싹찰싹 자신의 입을 때린 티아가 험상궂은 얼굴로 콧김을 내뿜었다.

“미카엘라 아가씨가 또 뭔 짓을 하셨어요? 요아힘 님 일로도 부족해서!”

그녀의 일에 자신의 일처럼 화를 내는 티아를 보니, 라모나의 마음도 슬그머니 풀어졌다.

“……티아.”

“예, 아가씨.”

“난 네가 있어서 너무 좋아.”

“세상에…… 저 지금 감동받았어요.”

티아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히잉…… 하녀복을 입고 나가셨는데 메닝엔 공작저에 계신다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이제 절대 그러시면 안 돼요.”

“그건 진짜 미안해.”

라모나의 사과에 티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다고 저한테 사과하시면 어떡해요. 공작저에서도 다른 사용인들에게 그러시는 거 아니죠? 그러면 사람들이 다 얕본다고요.”

“안 그래. 그냥…… 내가 너라도 너무 놀랐을 것 같아서.”

“우리 아가씨는 정말 마음씨도 너무 고우시다니까.”

티아는 감격한 듯 눈가를 훔쳤다. 그러더니 이내 눈을 반짝 빛내며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일이 이렇게 된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해요.”

“응? 다행이라니? 뭐가?”

라모나의 되물음에 티아가 조심스레 귓속말을 했다.

“페브룩 영식 말이에요.”

“아아, 그렇지. 아무래도 백작 영식보다는 공작이 낫지.”

티아가 로베르트의 지위나 권력을 이야기한다 생각한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티아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여자 밝히는 거에 비해서 딱 봐도 좀 작더라고요.”

“…….”

“얼굴만 봐도 그래요. 주방장님이 옹졸하게 생긴 게, 작을 관상이랬어요.”

세상에 그런 관상도 있니? 라모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나.

‘뭐…… 그럴 것 같기는 해.’

이내 그녀는 티아의 말을 이해했다. 얼핏 보기에도 조금 그렇기는 했으니까.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자, 자, 잠깐만 티아. 그러면 네 얘기는 지금 요아힘보다…….”

“네! 메닝엔 각…….”

“꺄아악! 세상에, 신이시여.”

제가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죠. 망측함을 이기지 못한 라모나가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잘난 척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음을 터뜨리는 로베르트의 모습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젠장, 또다시 자괴감이 밀려왔다.

상쾌한 아침부터 이 무슨 끔찍한 대화 주제란 말인가.

세상에는 분명 그 자식의 하체 사정 같은 음습한 화제보다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화제가 잔뜩 존재할 텐데!

‘다른 생각! 라모나, 다른 생각을 하자. 착하고 좋은 생각.’

라모나의 마음도 모르고, 티아는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아가씨, 연애면 몰라도 결혼 생활에 그건 정말 중요한 요소라고요.”

“연애도 중요할 것 같, 어머!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티아에게 동의한 라모나가 황급히 손을 내젓던 그때.

똑똑.

“라모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얘기하는 건 정말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남자였다.

* * *

차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던 라모나는 찻잔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녀장 댄버스 부인은 오늘도 예쁜 찻잔을 올려 보냈다.

정원에 갓 돋아난 푸르른 새싹 같은 연두색 문양과 곳곳에 섞여 있는 노란 꽃들이 싱그러운 찻잔이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기분에 라모나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녀가 살며시 차를 한 모금 머금은 그때,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계셨던 것 같던데 말입니다.”

“풉!”

안타깝게도 라모나의 침실 카펫이 한층 향긋해졌다.

손수건으로 황급히 입가를 닦는 라모나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가 문을 두드리기 직전까지 티아와 나누던, 상쾌한 아침에 언급하기엔 조금 음습한 화제 때문이었다.

‘제발, 신이시여.’

기껏 살린 저를 수치사 시키시지는 않을 거죠? 그렇죠?

라모나는 동공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뭐, 저도 레이디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예?”

“물론 연애에도 중요한 요소죠.”

다 들었네, 다 들었어. 라모나는 참담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그 와중에도 로베르트 메닝엔은 굉장히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그 부분에 자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무튼, 그 문제로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마무리 짓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지난번 저를 찾아오셨을 때, 엘츠 자작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셨죠. 맞습니까?”

손깍지를 낀 로베르트가 상체를 살짝 숙였다.

진지한 깊은 눈빛에 라모나도 정신을 차렸다.

“맞아요.”

“지금도 유효합니까?”

라모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엘츠 자작은 그녀가 로베르트와의 내기에 걸었던 스파이였다.

하지만 요하네스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였으니 내기는 라모나의 승리.

즉, 라모나가 그에게 엘츠 자작이 스파이라는 사실을 밝힐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굳이 이야기를 해야 할까?’

출처도 밝힐 수 없는, 말해 봤자 의심만 살 정보였다.

‘하지만…….’

그새 정이라도 든 걸까. 왠지 그에게라면 말해도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그녀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그때, 로베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그가 요하네스의 스파이인 모양이군요.”

라모나가 대답을 망설이는 이유를 단번에 알아챈 모양이었다.

역시 눈치는 빨라. 라모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맞아요. 하지만 내기에 이긴 제가 굳이 말씀을 드릴 필요는 없겠죠.”

“이 정도면 이미 말씀을 다 해 주신 것 같습니다만.”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이런, 레이디께서는 비밀이 많으시군요.”

“원래 미인은 비밀이 많은 편이죠.”

“그런 당당한 태도 아주 좋아합니다.”

농담인 듯 농담 같지 않은 말 사이로 아슬아슬한 기운이 팽팽하게 흘렀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라모나가 힐끔 손목을 살폈다. 살짝 입술을 깨문 그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겠죠. 나중에 제 부탁이라도 하나 들어주세요.”

“좋습니다.”

로베르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이 요하네스와 내통 중이에요. 메닝엔의 정보를 몰래 내어 주고 있죠.”

“증거는 있습니까?”

“패자가 원하는 게 많으시네요.”

“승자의 자비를 바라는 중입니다.”

능글맞은 그의 대답에 피식 웃은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제가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은 아니라서요.”

생각에 빠진 듯 턱을 만지작거리던 로베르트는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증거는 오래 걸릴 예정입니까?”

그들의 협상을 떠올리게 하는 말에 라모나의 얼굴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다시 한번 약속드리죠. 무슨 일이 있어도 1년 내에 그 증거를 찾아 드릴게요.”

“좋습니다. 그럼 다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만.”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기꺼이요.”

“제게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엘츠 자작의 배신을 일러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라모나는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그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탓이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저는 각하의 약혼녀니까요.”

말하는 순간 라모나는 알아차렸다.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로베르트가 지난 생처럼 죽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만 더 지금처럼 지내고 싶다는 바람은 사치일까?

라모나는 쉬이 판단하지 못했다.

* * *

평화로운 산새 소리가 가득한 고요한 숲속.

그 한가운데 위치한 별장 테라스에서 한 신사가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두꺼운 안경이 그의 나이를 짐작하게 했다.

그는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꾸준한 운동으로 잘 단련한 몸인 듯했다.

떡 벌어진 어깨와 팔이 어쩐지 잘나디잘난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테이블에 올려 둔 종이봉투를 바라보았다.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이지…….”

제 아비처럼 굴 줄 알았더니. 어쩐지 가라앉은 얼굴로 남자가 중얼거렸다.

뒤에서 한 여인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클레멘스?”

남자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노년의 여인이었다. 곧은 자세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녀의 신분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 주었다.

여인을 발견하자마자 남자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어렸다.

“오, 유디트. 일어났소?”

그가 여인의 손을 다정히 붙잡았다.

“내가 잠을 깨운 모양이로군. 더 자지 그랬소.”

“벌써 해가 중천인 것을요.”

그녀가 남자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남자의 입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서신을 발견한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보, 수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흐으음…… 당신이 신경 쓸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오.”

다만 한번 다녀오기는 해야 할 것 같구려.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긴 남자가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잘난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검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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