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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28화 (29/151)

#28화

라모나는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재앙의 주둥이가 없는, 아주 완벽한 평화였다.

홀짝.

즐거운 마음으로 차를 한 모금 머금던 라모나는 찻잔 내부의 장식을 발견하고는 감탄했다.

‘오! 역시 댄버스 부인은 안목이 있다니까.’

감탄한 그녀의 코가 찡긋거리며 오뚝하게 솟았다.

작약처럼 넓게 펴진 모양의 민트색 찻잔 내부에는 온갖 화사한 꽃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하아, 좋다. 이런 게 바로 행복이지.’

라모나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었다.

그녀는 여유롭게 홍차를 한 모금 더 머금었다. 곁에 선 티아가 물었다.

“아가씨, 뭐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응. 괜찮아, 티아.”

공작저로 돌아오는 길, 라모나는 로베르트에게 티아를 데려오게 해 달라 부탁했다.

그는 예상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칙하지만 제법 영리한 하녀라며, 어디를 가더라도 꼭 데리고 다니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무튼, 티아를 데려올 수 있어서 다행이니까.’

그래, 이 정도면 오늘은 괜찮다. 잘 참았다, 라모나. 장하다.

뿌듯한 기분에 그녀는 스스로를 칭찬해 주었다.

하지만 다행이라 생각하기가 무섭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설마?’

세상에, 아니겠지. 그래도 공작인데 바쁘겠지. 불길한 예감에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길한 예감은 항상 맞아떨어졌다.

“라모나? 당신의 그이입니다.”

그이.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라니. 라모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선 로베르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녁을 함께 먹었으면 합니다만.”

“……제가요?”

“예.”

“……각, 당신이랑요?”

“예.”

“……왜요?”

“그거야…….”

로베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니까?”

그의 입에서 나온 참담한 말에 라모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꾸 입 안에 생전 내뱉어 본 적 없는 험한 욕설이 맴돌았다. 저 XX라든가, 저 변태X이라든가.

하지만 아직 사정을 모르는 티아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참자, 그래 한 번만 더 참아 주자. 라모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하. 하. 하. 그럴까요, 로베르트.”

“좋습니다.”

분명 그는 ‘좋습니다.’라고 아주 깔끔하고도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나의 천사, 나의 천사…….

나의 사랑, 나의 사랑…….

어디선가 환청이 들리는 기분이 드는 까닭은.

‘……내 귀 돌려내.’

라모나는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 * *

꼭 자신의 눈동자 같은 짙은 푸른빛 원피스를 입은 라모나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를 에스코트한 로베르트는 보란 듯이 라모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정신 나간 본체와는 달리 우아한 모습이었다.

그의 저주받은 주둥이가 또 열심히 일하기 전, 라모나가 얼른 말문을 열었다.

“갑자기 웬 저녁 식사예요?”

“벌써 소문이 쫙 퍼졌더군요. 사람들이 이런 날 화제의 커플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저 욕 좀 먹으라고 나왔다는 얘기네요?”

“이런. 나의 사랑, 나의 천사.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가 특유의 잘생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그저 이렇게 어여쁜 당신이 나의 여자다, 세상에 보여 주고 싶은 것뿐입니다.”

“예에, 그거참 감사합니다.”

하여간 능글맞기는. 라모나는 그를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로베르트의 눈이 휘었다. 사람 하나둘 정도는 거뜬히 홀릴 미소였다.

라모나는 솔직히 인정했다.

‘……역시 얼굴은 봐줄 만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기 무섭게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상큼하게 코를 찌르는 시트러스.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묵직한 나무 냄새.

그 향기를 맡은 순간.

<이 정도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라모나는 뺨에 닿았던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떠올리고 말았다.

곱게 휘던 눈 아래 콕, 하고 찍힌 눈물점도 함께였다.

두근.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너 이렇게 얼굴에 약한 사람이었니? 저 자식에게 멀쩡한 건 얼굴뿐이잖아.’

지성인답게 행동하자. 저건 주둥이다. 주둥이야.

그녀가 애써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왜 그거 안 해 줍니까?”

더운 숨이 귓가를 간질였다. 갑작스러운 귓속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라모나가 말을 더듬었다.

“예, 예, 예? 뭘요?”

그, 그, 그, 그거? 그게 뭐지?

불쑥 떠오른 이런저런 이상한 생각에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로베르트는 나른하게 웃었다.

“그거 있지 않습니까.”

“뭐, 뭐요?”

“나의 그이.”

“…….”

이런 미친.

“빨리 해 보시죠, 나의 그이.”

라모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너의 그…… 이빨 좀 털어 버리고 싶다.’

역시 욕이 늘기는 늘었다.

‘주둥이가 예뻐 봤자 예쁜 주둥이지.’

그녀는 한숨을 삼키고는 해탈한 듯 웃어 보였다.

“이만 가시죠, 주두…… 아니 각하.”

두근거리던 심장이 빠르게 제 속도를 되찾았다. 달아오른 귀는 아직 뜨끈했지만.

* * *

로베르트의 말은 맞았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그들을 훔쳐보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라모나를 훔쳐보았다.

사람들은 신이 나서 소곤거렸다.

“세상에, 페브룩 영식의 뺨을 때렸다면서요. 그것도 양쪽을.”

“먼저 약혼자를 배신한 주제에 설마요.”

“진짜예요. 양쪽 뺨이 벌게진 페브룩 영식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니까요.”

“어머나, 어머나.”

‘다 들린다, 다 들려.’

라모나는 한숨을 삼켰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요아힘의 뺨을 때렸고, 또 반대쪽 뺨도 때렸으니까.

그래 봐라, 봐. 그녀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보란 듯이 로베르트와 팔짱을 꼈다.

로베르트는 갑자기 움찔, 몸을 떨었다.

“……각하? 어디 안 좋으세요?”

“흐음, 흠. 아, 아닙니다. 드시고 싶은 건 없으십니까?”

그는 어쩐지 당황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묘하게 라모나의 시선을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뭐, 다른 생각이라도 했나 보지.’

그런 그가 조금 의심스럽긴 했지만, 이제 이 정도는 그러려니 싶었다.

아무튼, 천사니 뭐니 하는 망언을 한 건 아니었으니까.

라모나는 이내 그가 던져 준 숙제에 빠져들었다.

‘흐으음…….’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가. 뭔가 기름진 음식이 먹고 싶었다.

‘흔한 거 말고 안 먹던 거…… 뭐 없나?’

향신료가 잔뜩 들어갔다거나, 아무튼 평소랑 다른 게 당기는 날이었다.

‘뭐가 좋을까.’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든 라모나를 로베르트가 힐끔 바라봤다.

그가 물었다.

“해산물? 육류?”

“……육류.”

식사 이야기가 나오자 라모나가 묘하게 순해진 것을 깨달은 로베르트가 웃음을 삼켰다.

‘안 그렇게 생겨서 어린애처럼 굴기는.’

귀엽게. 아니, 잠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안 그래도 팔짱을 끼며 갑자기 가까워진 그녀의 몸 때문에 달아올랐던 귀가 조금 더 벌게졌다.

당황한 로베르트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수상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내 불청객의 정체를 깨달은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젠장, 그 유해한 변태 자식이 또 사람을 붙였군.’

요하네스의 미행을 발견한 로베르트가 욕설을 삼켰다.

힐끔, 그가 라모나를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미행의 존재를 아직 모르는 듯했다.

라모나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흐음, 좀 이국적인 걸 먹어 보는 건 어때요?”

아, 그녀가 손바닥을 가볍게 쳤다.

“양고기라든가?”

양고기.

그 순간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당황한 라모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각하?”

“양고기, 말입니까.”

“혹시 싫어하세요? 그럼 다른 것도 괜찮아요.”

“아니요, 좋아합니다. 양고기.”

그가 황급히 라모나의 소매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푸른빛이 라모나의 소매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확실해. 무언가 일어나고 있군.’

로베르트는 신음을 삼키며 자신의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라모나는 가느다란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자꾸 이상하게 구네. 혹시…….’

정말 뭐 잘못 먹은 거 아냐?

그래도 오늘 낮에는 예쁘다면 예쁜 짓을 해서 그런지,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각하?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그녀의 질문에 로베르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얼굴이었다.

“아주 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윽고 로베르트는 눈을 야살스럽게 접었다. 입에는 불길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설마.’

저거 설마 그거 아니지?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여차하면 한 대 때리기, 아니 오그라드는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로베르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의 사랑. 제국의 보물. 당신에게서 나는 빛에 눈이 멀 것 같으니 말입니다.”

헙. 주변 사람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라모나에게까지 들려왔다.

그녀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저런 미친 주둥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참자. 오늘은 라모나 네가 딱 한 번만 더 봐주자. 여기서 저 남자까지 때리면 너는 악녀가 아니라 그냥 깡패가 되는 거야.

라모나는 남몰래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경고하듯 팔짱 낀 그의 팔을 살며시 꼬집었다.

그러나 로베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속삭였다.

“오, 짜릿해.”

라모나의 얼굴이 썩어 들어 갔다.

그냥 악녀 말고, 깡패는 어떨까. 그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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