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Chapter 4. 당신의 입술
메닝엔 공작저의 집무실, 먼저 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에드윈이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각하.”
그는 클라이스트 백작가의 후계자인 동시에 뒷골목의 숨은 대장이기도 했다.
로베르트가 그를 부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앉아, 이야기한 건?”
“완벽합니다. 오늘 밤에 암살자가 페브룩 백작가로 갈 겁니다.”
“눈물 질질 짜면서 영지로 내려갈 정도로만 해 둬. 다시는 남자 구실 못 하게 되어도 좋고.”
“그거야말로 전문입니다.”
에드윈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로베르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라모나가 죄책감을 가질까 싶어 그 자리에서는 그 족제비 같은 자식의 뺨을 한 대 때려 주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그의 성이 찰 리가 없었다.
감히 이 로베르트 메닝엔과 맞먹으려 들다니. 잘난 것 하나 없는 놈이, 무슨 배짱으로.
‘그딴 놈이 라모나의 근처, 아니 수도에 얼쩡거리는 꼴은 못 보지.’
로베르트는 요아힘을 아예 수도에서 쫓아 버리기로 결심했다.
물론 절대 라모나 때문은 아니었다. 절대, 절대로.
‘생각해 보니 정말 잘라 버리는 것도 괜찮겠군.’
벤트하임 그 고자 놈들의 덕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니 이 김에 진짜 고자로 만들어 주는 것도 괜찮은 생각 같았다.
‘그럼 다시는 먼저 약혼이니 뭐니 그런 헛소리도 못 하겠지.’
로베르트가 말했다.
“에드윈.”
“예.”
“그 자식 걸 잘라 오면 추가로 보수를 준다고 해.”
“네? 뭐를 잘라 오라는 말……. 아, 알겠습니다.”
로베르트의 말을 이해한 에드윈은 잠시 페브룩 영식을 향한 애도의 마음을 가졌다.
“페브룩 백작은?”
“지금쯤 연락이 갔을 겁니다.”
“그래, 파산 이야기가 나오면 그쪽 사업을 다 인수해 두도록.”
“예.”
두 배로 돈을 주겠으니 먹고 떨어지라는 것 또한 진심이었다.
다만 요하임은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그 돈을 만져 볼 일이 없을 뿐이었다.
백작이 도박에 빠져 몰래 사채를 끌어 쓴 대가였다.
물론 그 빚을 내 준 사람은 에드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베르트의 개인 자금이었지만.
“흐음.”
‘그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군.’
만족스럽다.
요아힘과 함께 있던 라모나를 보고 느꼈던 불편함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로베르트는 눈을 감고 자신의 위대함에 심취했다.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잘생긴 얼굴, 제국의 둘째가라면 서러운 권력, 그리고 귀찮은 일을 전부 해결할 수 있는 재력까지.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짜릿해.’
그의 입가에 매끄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왜일까. 갑자기 짜릿하다는 말에 오만상을 쓰던 라모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쳤냐는 듯 파르르 질색하던 그 입술도.
“쿡.”
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재밌다. 확실히 그녀는 그에게 전에 없던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순간 에드윈의 눈이 커졌다.
“……각하?”
“아, 수고했어. 이만 들어가 보도록.”
에드윈은 로베르트를 살폈다.
‘각하께서 저리 웃으시다니…… 역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의 일인가?’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슬그머니 로베르트를 떠봤다.
“바쁘신가 봅니다.”
“뭐, 항상 그렇지.”
“아니면 레이디와 데이트라도 가십니까?”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로베르트가 미간을 찡그렸다.
나와 아무 사이도 아닌 그 여자랑? 데이트를?
순간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만,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가.’
이마에 입술 정도는 맞춰도 되는 사인데. 생각해 보면 약혼녀이기도 했다.
‘보통 이런 사이를 아무것도 아니라 말하나?’
아닌 것 같은데.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 그이.
‘우리’ 그이.
떠오른 건 그 말뿐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던 그녀의 미소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살짝 벌어진 연분홍빛 입술이…….
‘젠장.’
로베르트가 욕설을 삼켰다.
가슴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또 푸른빛인가 싶어 손목을 살폈지만, 빛은커녕 실오라기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괜히 심술이 난 그는 에드윈을 내쫓았다.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
“예,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윈이 다시 힐끔, 로베르트를 살피고는 밖으로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로베르트는 유심히 손목을 살폈다.
‘흐으음…….’
아무래도, 이미 충분히 완벽한 자신에게 무언가 특별한 힘이 생겨 버린 모양이었다.
일단 정보가 필요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어떤 조건에서 발현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 대상이 왜…….
하필 라모나 아이젠부르크인지.
그의 깊은 눈이 가늘어졌다. 한 가지 짚이는 이유가 있기는 했다.
메닝엔 공작가의 가보, 신비한 힘이 깃들었다 전해진 ‘그것.’
로베르트는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뭐, 일단 창고를 한 번 열긴 해야겠군. 그러고 보니 오실 때가 됐는데.’
가보를 떠올리니 골치 아픈 일이 생각나 버렸다.
‘거기까지는 일이 안 뻗어 있었으면 좋겠군.’
부모의 죽음을 떠올린 그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무튼 지금은 이게 더 우선이었다.
“후우.”
습관처럼 한숨을 내쉰 그는 다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푸른빛은 보이지 않았다.
로베르트는 조심스레 속삭였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돈벼락을 맞는다?”
이번에는 물벼락을 돈벼락으로 수정하는 깊은 배려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손목은 여전히 잠잠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새 드레스를……. 아냐, 이건 이미 맞출 예정이었지.”
그는 고민에 빠졌다.
뭐가 좋을까.
라모나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능력을 시험할 수 있는 방법. 그게 뭐가 있을까…….
불쑥, 에드윈이 던지고 간 말이 생각났다.
‘아니면 레이디와 데이트라도 가십니까?’
데이트, 데이트라.
로베르트는 손목에 대고 한층 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저녁에 양고기를 먹는다.”
그는 뚫어지게 손목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반짝.
아주 가느다란 빛이 떠올랐다.
“……이런.”
로베르트가 눈썹을 까딱했다.
조각 같은 그의 얼굴에 재앙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데이트 때문은 아니었다. 절대, 절대로.
* * *
제국 서부.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연병장.
“아, 진짜 죽겠네.”
한 남자가 이마를 타고 주룩주룩 흐르는 땀을 훔쳤다. 매서운 햇빛에 남자의 갈색 머리가 반짝이며 빛났다.
그때, 멀리서 한 남자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왔다.
“레이먼! 레이먼!”
남자의 친구, 콜린이었다. 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며 달려오자 레이먼이 혀를 찼다.
“나 귀 안 먹었다.”
“허억, 허억. 너 그 소식 들었냐?”
“소식?”
별일 아닐 거라 짐작한 레이먼이 시큰둥하게 검을 휘둘렀다. 숨이 찬 콜린은 헉헉거리며 말을 이었다.
“야, 허억, 약혼자. 흐아아, 죽겠다. 너희 누님 약혼자…… 흐어억.”
“약혼자?”
요아힘 페브룩. 그 모자란 놈을 떠올린 레이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멸치 같은 자식에게 우리 누님은 너무 과분해.’
가진 것에 비해 과한 허세며, 한눈에 봐도 티 나는 자격지심.
자신의 눈에도 이렇게 빤히 보이는 걸 누님은 왜 모르는 걸까. 답답한 노릇이었다.
레이먼이 한숨을 삼키는 사이 숨을 고른 콜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약혼자 뺨을 때리고 파혼했다던데.”
파혼? 순간 레이먼의 얼굴이 밝아졌다.
크으, 결단력이며 단호함까지! 역시 우리 누님은 대단해. 그가 뿌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근데 그게 끝이 아니야.”
“엥? 왜? 그 멸치가 매달린대?”
“그리고 메닝엔 공작과 약혼했대.”
거기서 메닝엔 공작이 왜 나와?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전개에 레이먼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콜린이 그다음 이야기를 입에 담는 순간.
“그래서 지금 둘이 동거한다던데?”
툭.
동거.
레이먼은 넋이 나간 얼굴로 들고 있던 목검을 놓치고 말았다.
“레이먼? 너 괜찮냐?”
“…….”
“레이먼? 레이먼!”
콜린이 레이먼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한참 뒤에 레이먼이 입을 열었다.
“……콜린.”
“으응?”
“나 병가 좀 내야겠다.”
“갑자기 웬 병가? 너 어디 아파?”
“응, 마음이.”
얘가 지금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콜린이 입을 쩍 벌리고 레이먼을 바라보았다.
“……너 돌았냐?”
레이먼은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너무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못 하겠다. 병가 내고 수도에 가야겠어.”
“……야, 그 얘기 사령관님한테도 할 수 있어?”
사령관, 2황자 알폰조를 떠올린 레이먼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
“못 하지?”
“…….”
“응? 못 하지?”
레이먼이 시무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콜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편지나 보내.”
“……그래야겠다.”
레이먼이 어두운 낯으로 땅을 걷어찼다. 콜린은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근데 솔직히 난 우리 누나 어디든 시집 가 버리면 좋겠던데……. 메닝엔 공작이면 과분한 거 아니냐? 넌 뭐가 그렇게 심각하냐.”
“넌 몰라.”
“아니, 따지고 보면 네가 이상하다니까? 누가 그렇게 누나를 끼고돌아.”
“너 같은 멍청이는 몰라.”
“이게!”
레이먼과 콜린은 그 이후로도 한참을 투덕거렸다.
멀리서 누군가가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