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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26화 (27/151)

#26화

라모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신이시여, 제발.

제발 제게 한 번만 다시 시간을 되돌릴 기회를 주세요. 정말 착하게 살게요, 진짜로.

그러니까 제발.

제발 없던 일로 만들어 주세요……!

그녀가 신의 뜻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라모나?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나의 천사.”

철저한 거절의 답이 뚝, 하고 떨어졌으니까.

‘꺄아아악!’

라모나는 내적 비명을 질렀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꼭꼭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 건 잡았다는 듯 놀려 댈 줄 알았던 재앙의 주둥이, 아니 로베르트는 의외로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촉.

다정한 얼굴로 라모나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당황한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왜, 왜 이래?’

훅, 그녀의 얼굴로 다가온 로베르트의 눈물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가 작게 속삭였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지난번 그들의 취중 계약을 뜻하는 말이었다.

로베르트의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간질거리는 기분에 라모나의 귀가 달아올랐다.

‘침착하자, 라모나.’

잘생긴 얼굴에 현혹되면 안 돼. 저 자식의 본체는 주둥이야.

이게 다 연기라는 사실을 안다. 분명 아는데…….

‘……젠장.’

그래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라모나가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사이, 로베르트는 싸늘한 시선으로 요아힘을 훑어보았다.

이내 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뻗었다. 살벌하게도 눈은 싸늘했다.

“자네가 페브룩 영식인가?”

악수를 하기 위해 요아힘이 엉거주춤 손을 내밀었다.

그때.

촥!

로베르트는 그의 얼굴에 홍차를 부어 버렸다.

“어푸, 흡, 가, 각하?”

한층 향긋해진 요아힘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로베르트는 태연스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게 요즘 유행하는 인사법인가 보던데, 맞나?”

그는 요아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아, 아니면 여기에 뺨까지 쳐야 완성인가.”

그제야 그가 왜 나타난 것인지 깨달은 요아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가, 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대답.”

“예, 예?”

“귀가 먹었나?”

“아,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무엇보다! 오해십니다.”

오해라는 말에 로베르트가 눈썹을 까딱했다.

“흐음?”

그가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준 거라고 착각한 요아힘이 라모나를 삿대질하며 말했다.

“저를 때린 건 저, 저 여자입니다. 각하께서도 지금 저 여자의 폭력적인 본성을 모르고 속고 계신 모양…….”

“풉.”

로베르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가, 각하?”

“맞았다는 것도 딱히 자랑거리는 아닌 것 같아서.”

졸지에 여자에게 맞고 다니는 사내가 되어 버린 요아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로베르트는 한층 즐거워진 기분으로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맞았다기에는 뺨이 평소와 같이 뽀얗다.

‘아하, 뺨을 맞은 게 아니라 때린 거였어?’

그럼 그렇지. 저딴 자식에게 마음이 있었을 리 없지. 로베르트는 흡족한 얼굴로 요아힘에게 명했다.

“앉아.”

“……예, 각하.”

“궁금하긴 했단 말이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이기에…….”

그의 시선이 의도적으로 요아힘을 훑었다.

“감히 내게서 라모나를 데려가겠다고 말하는지.”

그제야 제가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실감한 요아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젠장…….’

그가 입술을 짓이겼다.

몇 주 전, 미카엘라 벤트하임의 심부름꾼이 그를 방문했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요청하는 순간에 라모나와 파혼해 달라 말했다. 제법 쏠쏠한 대가는 덤이었다.

애초에 벤트하임에게 줄을 댈 생각으로 맺었던 약혼이었다. 요아힘은 흔쾌히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도 되지 않아 갑자기 라모나와 메닝엔 공작의 염문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요아힘은 일단 몸을 사리며 사태를 주시했다. 그런 그에게 며칠 전 미카엘라의 서신이 다시 도착했다.

라모나와 약혼을 유지하지 못하면 약속했던 지원은 다 없던 일로 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돈에 눈이 뒤집힌 요아힘은 곧장 라모나를 찾아왔다.

사실 당연히 헛소문인 줄 알았다.

저 칙칙한 계집애가 메닝엔 공작을 진짜 꾀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젠장, 공작은 저런 애교도 없는 여자가 뭐가 좋다고…… 미치겠네.’

벤트하임에게 잘 보이려 했을 뿐인데, 이러다 메닝엔의 화를 사게 생겼다.

요아힘이 입술을 깨물었다.

로베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훑어봐도 자신감의 근거를 모르겠단 말이지.”

“…….”

“어느 것 하나 나보다 잘난 구석이 없는데 말이야.”

‘……저거 내 얘긴가?’

요아힘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 로베르트가 그를 향해 턱을 까딱했다.

“한번 그 입으로 말해 보지.”

“예, 예?”

“영식의 눈에 그대가 나보다 나은 점.”

메닝엔 공작이 참 잘나기는 잘난 게 사실인지라, 요아힘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로베르트는 혀를 찼다.

“난 도무지 안 보이는데 말이지.”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 각하, 도리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도리?”

“라모나는 제 약혼녀입니다. 약혼식을 조촐하게 치르긴 했지만 분명 저와 약혼했습니다. 그것만은 확실합니다.”

그의 말에 로베르트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래?”

“게다가 그녀는 제게도 소중한 사람입니다.”

“흐음, 소중한 사람이라…….”

로베르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아까는 그 여자라더니?”

“그, 그건 제가 너무 흥분해서…….”

“게다가 라모나가 폭력적인 본성을 숨기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취향이 그런 쪽?”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요아힘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하, 아니면 그건가?”

그런 그를 바라보는 로베르트의 얼굴에 심상찮은 미소가 떠올랐다.

“메닝엔이 우스워서?”

그의 날카로운 눈이 요아힘을 직시했다.

“제법 독특한 자살 시도군.”

“가, 가, 각하. 그런 것은 절대 아니고…….”

“오호. 메닝엔의 사람을 건드렸지만 메닝엔이 우습지는 않다…….”

젠장. 그제야 요아힘은 자신이 저지른 일의 무게를 깨달았다.

레오벤 제국에서 메닝엔을 건드린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적어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런 미친 짓을 한 자 중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

다급해진 그가 황급히 라모나의 팔을 붙들었다.

“라, 라모나.”

그러나.

탁.

“내 몸에 손대지 마.”

그의 손이 닿자마자 크게 몸을 떤 라모나가 매섭게 그 손을 쳐 냈다.

마치 겁먹은 초식동물 같은 반응이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요아힘에게 윽박지르는 대신 우아하게 품에서 총을 꺼내 내려놓았다.

탁.

차라리 말이 낫지, 요아힘이 기겁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히이익. 죄, 죄송합니다.”

“영식의 말이 영 틀린 건 아니지. 순서에 관한 이야기는 공감해.”

“가, 감사합니다.”

요아힘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 인사를 받기는 아직 조금 일러서.”

로베르트는 턱을 괴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검은 눈이 꼭 자신을 꿰뚫을 것만 같아서 요아힘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윽고 로베르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얼마?”

“……예?”

당황한 요아힘의 눈이 커졌다.

“미카엘라 벤트하임이 얼마를 약속했지?”

그의 입에서 미카엘라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요아힘은 차라리 졸도해 버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로베르트는 같잖다는 듯 피식, 웃고서는 말했다.

“선택해. 두 배로 줄 테니 먹고 떨어지든지…….”

그가 내려놓은 총을 집어 들며 고개를 까딱했다.

“아니면 이쪽도 있지.”

* * *

꼴사납게 기절해 버렸던 요아힘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무릎을 꿇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라모나, 내, 내가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홍차에 쫄딱 젖은 꼴이 꼭 비 맞은 생쥐 같았다.

비를 맞았다기엔 다리 사이가 좀 지저분해 보였지만.

응접실을 청소할 생각에 하얗게 질린 하녀들은 요아힘을 살벌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라모나는 전 약혼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 혼자라면 이렇게 사과받을 수 있었을까.’

아니, 아니겠지. 그 사실 때문일까. 후련함, 시원함, 그리고 배신감이 동시에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때, 로베르트가 다정히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는 속삭였다.

“내 사랑.”

“……언제부터 알았어요?”

“뻔하지 않습니까. 그 미카엘라 벤트하임인데.”

이렇게 쉽게 보이는 것을 정말 나만 몰랐구나. 라모나는 씁쓸한 한숨을 삼켰다.

로베르트가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감히 당신에게 손을 댄 저 자식을 쏴 버리고 싶긴 하지만……. 나의 천사, 당신의 의견은 어떠신지?”

“히이이이익!”

쏴 버린다는 말에 겁을 먹은 요아힘이 숨을 들이마셨다.

“흐음…….”

라모나는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까야 뭐에 홀린 듯 손이 나갔다지만, 이제는 정말 화가 나서 그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좋아. 이왕 악녀가 될 거라면…….’

제대로 하자.

마음을 정한 그녀가 로베르트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 죽여 버릴…….”

“히이이익!”

또 요란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요아힘을 내려다보며 라모나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필요까지는 없겠지요.”

“당신이 원한다면야.”

로베르트는 다시 총을 품에 넣었다.

요아힘의 얼굴에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이 어렸다.

라모나는 나긋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요아힘, 괜찮아?”

“으, 응. 아니, 네, 네, 네. 괜찮습니…….”

그 순간.

짝!

라모나의 손이 요아힘의 뺨을 매섭게 내려쳤다.

이번엔 정말 그녀의 의지로 나간 손이었다.

“어머나, 벌써 괜찮은 건 좀 곤란해서.”

라모나는 무릎 꿇은 요아힘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이내 그녀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꺼져. 너 같은 쓰레기는 내 쪽에서 사절이야.”

그렇게 말하는 라모나의 얼굴은, 정말이지 로베르트 메닝엔을 닮아 있었다.

* * *

메닝엔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로베르트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라모나.”

“예?”

“그거 압니까.”

“……또 뭐를요?”

“방금 굉장히 짜릿했습니다.”

이런 미친. 라모나는 속으로 또 한 번 비명을 질렀다.

‘어쩐지 멀쩡하게 공작 노릇하다 싶더니 이 변태가 진짜.’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라모나, 네가 봐주자. 쟤는 원래 저래. 네가 한 번만 봐주자.’

라모나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각하, 정말 두 배로 줄 거예요?”

“메닝엔의 이름으로 한 약속이니 지켜야겠죠.”

뭐, 어차피 저자가 그 돈을 만져 볼 일은 없을 겁니다.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이내 그의 얼굴에 수상한, 그리고 아주 잘생긴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그렇고, 아까 했던 그 말은 뭡니까?”

“예?”

“우리 그이.”

우리 그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라모나의 등에 소름이 쫘아악 일어났다.

“꺅! 꺄아아악!”

그녀는 귀를 막고 비명을 질렀다.

로베르트는 그런 라모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라모나.”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오늘 잘했습니다.”

“하아나도 안 들린다.”

“앞으로도 그렇게 뺨이라도 내리치십시오. 어디 가서 지지 말고.”

여전히 양쪽 귀를 틀어막은 그녀를 보며 로베르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그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응?’

로베르트의 손목에 또다시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지난밤, 자신이 했던 말이 벼락처럼 떠올랐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물벼락을 맞는다?’

……물벼락.

‘맙소사. 설마……?’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마법 같은 일. 그 일이 정말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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