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짝!
라모나가 요아힘의 뺨을 후려치자 티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머.”
깜짝 놀란 티아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사실 가장 놀란 것은 라모나였다.
‘내가 왜 이런 짓을……?’
뺨을 때리려던 생각은 없었는데? 당황한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티아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티아가 비장한 얼굴로 입술을 벙긋했다.
‘저만 믿으세요! 아가씨.’
‘으응? 잠깐만, 티아…….’
그때, 뺨을 감싸 쥔 요아힘이 입을 열었다.
“이게 진짜, 너 지금 죽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목소리는…….
“꺄아아악! 꺄아아아악! 아가씨! 어떡해, 어떡해! 괜찮으세요?”
티아의 우렁찬 비명에 묻히고 말았다.
쩌렁쩌렁한 소리가 아이젠부르크 자작저를 울렸다.
화들짝 놀란 사용인들은 황급히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가씨? 아가씨!”
라모나가 대답이 없자 겁이 난 그들은 이내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쾅! 쾅쾅쾅!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가씨!”
아가씨가 괜찮지 않다면 사람 하나쯤은 쓱싹해 버릴 기세였다.
티아는 쪼르르 달려가 얼른 문을 열어 버리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세상에! 이를 어쩌면 좋아! 우리 아가씨가 물벼락을, 세상에 뺨을!”
그녀는 의도적으로 말을 흘렸다.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 우리 아가씨가 저 자식 뺨을 때리다니!’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용인들은 뺨이라는 단어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뺨을?”
“뺨이라고?”
“아가씨 뺨을?”
“뭐? 뺨을!”
그사이 티아는 후다닥 집사에게 달려가 무어라 속삭이고는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사용인들 사이에 한바탕 소란이 일자 당황한 요아힘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자, 잠깐만. 얻어맞은 건 얘가 아니라…….”
그러나 이번에는 라모나가 잽싸게 요아힘의 말을 막았다.
“나는 괜찮아, 너무 걱정들 하지 마.”
“뭐? 라, 라모나, 너 지금.”
“응?”
라모나는 다 용서한다는 듯 자비로운 표정으로 요아힘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요아힘. 네가 화가 많이 났겠지. 그럴 수 있어. 다 이해해.”
“이게 무슨……! 너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바깥으로 나돌아 다닐 때부터 내가…….”
“아, 맞다. 그 하녀 말인데.”
라모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 하녀 있잖아.”
네가 밤마다 찾아가는 그 하녀. 이 개 같은 자식아. 그녀는 보란 듯이 화사하게 웃었다.
설마 그 일을 라모나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요아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이젠부르크 자작가의 집사는 매서운 눈으로 요아힘을 노려보며 말했다.
“외람되오나 아가씨.”
“응?”
“일단 이 일에 대해서 마님께 보고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손님과 대화를 더 이어 가실지 여부는 이후에 결정하심이 어떠실지요.”
“흠, 좋은 생각이네. 어머니가 걱정하시지 않도록 잘 전달해 줘.”
“예.”
고개를 숙인 집사가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꼬인 상황에 경악한 요아힘이 라모나를 나무랐다.
“라모나, 너, 너, 진짜 미쳤구나?”
“먼저 내게 물을 끼얹은 건 너야, 요아힘.”
라모나는 우아하게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대답했다.
“일단 응접실 문은 열어 두고 싶은데, 그래도 되지? 우리 그이가 다른 남자랑 단둘이 있는 걸 좀 싫어해서.”
우리 그이.
살다 살다 그 또라이를 이렇게 부르는 날이 올 줄이야. 얼마나 어색했는지 말하는 도중 실시간으로 입가가 굳어졌다.
그녀는 간신히 스스로를 달랬다.
‘안 돼, 안 돼 라모나. 네가 좀 참아 줘. 응?’
다행히 그녀의 필사적인 연기가 효과가 있었는지, 요아힘은 묘하게 순종적인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메닝엔 공작의 이름값이 크긴 큰 모양이었다.
라모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후우,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진짜 악녀가 되는 수밖에 없나, 그건 계획에 없던 일인데.
어쩐지 평화로운 삶이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뒤처리는, 뭐…….’
그 남자가 하겠지.
라모나가 흐린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 * *
한편 그 시각 메닝엔 공작저.
로베르트는 자신의 손목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건 뭐였지.’
지난밤, 분명 손목에서 아주 가느다란 실 같은 푸른빛이 일렁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라모나가 바닥에 넘어졌다. 그것도 뒤로.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그녀가 넘어진 것도, 심지어는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뒤로 곱게 넘어진 것도.
하나같이 이상한 일이었다.
굳이 비유해 보자면, 마치…… 무슨 신비한 힘이라도 개입한 것처럼.
“흐으음.”
‘신비한 힘이라. 말도 안 되는 가정이긴 한데.’
로베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툭 불거진 목젖이 어쩐지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연일까.’
그는 의심스러웠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그녀가 요하네스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른다거나, 듣도 보도 못한 목줄 이야기를 꺼낸다거나.
아니면 메종 마르띠모에서 느꼈던 위화감이라거나.
정말 이 일들이 그저 다 우연에 불과할까.
흐음.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젯밤, 그는 일단 그녀에게 푸른빛에 대해 함구했다.
확인된 바가 없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게 내게 유리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라모나와 그는 부모의 죽음에 얽힌 증거를 놓고 협상 중인 사이였고, 언제나 정보를 많이 쥐고 있는 사람이 협상의 우위를 점하는 법이었다.
결국 이건 메닝엔 공작으로서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묘하게 가슴 한구석이 체한 듯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답답한 기분에 로베르트가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오늘따라 바깥이 웅성웅성 시끄러웠다.
‘웬 소란이지?’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리던 찰나, 브리튼이 다급히 그를 찾았다.
“각하!”
브리튼의 뒤에는 머리가 산발이 된 채 숨을 고르는 하녀가 하나 서 있었다.
뭐지. 미간을 찌푸린 로베르트가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이젠부르크 자작가에서 심부름꾼이 왔습니다.”
브리튼의 대답에 로베르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하, 그때 그 소문의 주범?”
소문 이야기가 나오자 하녀가 움찔 몸을 떨었다.
로베르트는 싸늘한 눈으로 티아를 훑어보았다. 라모나를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말해.”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티아가 입을 열었다.
“페브룩가의 도련님께서 저희 아가씨에게 해코지를 하셨어요.”
“뭐?”
누가, 감히 누구에게?
예상치 못한 소식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다짜고짜 아가씨에게 물을 끼얹으셨어요.”
‘물?’
순간 이상한 기분에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 울상이 된 티아가 묘하게 주어를 생략한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뺨도 때리시고요.”
뺨이라는 말에 로베르트가 인상을 팍 썼다.
가서 실컷 때리고 오라고 친절히 설명까지 해 줬건만 왜 가만히 맞고 있단 말인가.
그의 얼굴이 살벌해졌다.
이내.
‘아니, 내게는 한 마디도 안 지려 들더니. 그쪽은 그래도 진짜 약혼자였다 이건가?’
불쑥 그의 분노가 이상한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권력이면 권력, 얼굴이면 얼굴, 거기다 심지어 몸까지.
백번 양보해서 하나하나 다 따로 놓고 떼어 봐도 페브룩 백작 영식, 그 족제비 같은 자식은 어느 것 하나 자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거늘.
‘……왜 그 자식은 봐주고.’
나는 안 되지?
제국 최고의 신랑감인 나는 왜?
억울했다, 그것도 몹시.
그의 분노는 곧 요아힘에게로 번졌다.
‘설마 그 자식이 진짜 주먹이라도 휘둘렀나?’
그래, 그게 맞을 것 같았다.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맥없이 맞고 있을 리 없었다.
그 개자식이 무식하게 레이디에게 무력이라도 행사한 게 분명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술에 취해 중얼거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새끼가…… 내 목에 목줄을 채우고…… 부모님을, 흡, 부모님을 걸고…….>
뚝.
그의 머리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분노가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냥 죽여 버릴까.’
좀 번거롭기야 하겠지만 수습이 영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면 다시는 남자 구실을 못 하게 거기를 썰어 버려?’
진지하게 고민하던 로베르트가 말했다.
“……브리튼.”
“예, 각하.”
“마차, 아니 말을 준비해. 당장 아이젠부르크 자작가로 갈 테니.”
로베르트는 아마도 자신의 분노가 메닝엔이 무시당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니 이것은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그 발칙한 여자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긍심 때문이리라고.
감히.
메닝엔의 사람을, 메닝엔의 이름을 업신여겼으니 이렇게 화가 날 수밖에 없다고.
그는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정의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뭔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인데? 로베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별거 아니겠지.’
좋다. 자비란 없다.
지금이야말로 메닝엔의 권력과 부.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그 애송이를 꾹 눌러 줄 시간이었다.
물론 치졸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 * *
자작 부인께 다녀오겠다는 집사의 부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사이 험상궂은 자작저의 분위기에 위축된 요아힘이 속삭였다.
“라모나, 지금 네가 단단히 잘못 생각하는 모양인데. 메닝엔 공작이 정말…….”
“아아, 메닝엔 공작이 정말 나를 사랑할 리 없다고? 한때의 감정일 뿐이라고?”
할 말을 빼앗긴 요아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모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미카엘라, 너구나.’
둘이 하는 말이 똑같은 걸 보니, 미카엘라가 요아힘에게 자신을 찾아가라 시킨 모양이었다.
‘……잠깐, 그럼 설마?’
회귀 전 파혼도 미카엘라의 작품이었던 걸까.
‘애초에 요아힘은 나를 진짜 약혼녀로 생각도 안 했던 거구나.’
라모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깟 게 뭐라고 회귀 전, 파혼에 마음 아파했을까.
‘바보같이.’
속상한 마음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쥐었다.
요아힘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아무튼 잘 생각해. 마음 넓은 내가 이번 한 번만 특별히 봐줄 테니까. 대신 앞으로는 쥐죽은 듯 조신하게 살고.”
그가 덧붙였다.
“아, 어머니께서도 크게 화가 나셨으니까 당장 와서 싹싹 빌도록.”
조신은 무슨 얼어 죽을. 라모나 팔짱을 낀 채로 삐딱하게 대꾸했다.
“내가 왜?”
“뭐?”
“우리 그이는 이런 내가 너무 좋아서 죽겠다는데, 내가 왜?”
로베르트의 이야기가 나오자 요아힘이 흠칫, 눈에 띄게 손을 멈췄다.
‘……이것 봐라?’
라모나가 처음으로 로베르트의 쓸모를 찾은 순간이었다.
그녀는 보란 듯이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우리 그이는 권력도, 명예도, 하다못해 얼굴까지 그렇게 완벽한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네 어머니한테 가서 빌어?”
“너, 너, 너 진짜!”
“아!”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치고는 천천히 요아힘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묘한 곳에 머물렀다.
“우리 그이는 정말 남자로서 전. 부. 완벽해서……. 뭐, 이런 얘기까지 하면 좀 그렇겠다. 아냐.”
삐딱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때였다.
“내 사랑?”
왠지 여기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안 돼. 설마. 젠장. 신이시여, 설마.
라모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에, 나의 천사.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응접실 문 앞에는 그가 서 있었다.
재앙의 주둥이, 일명 라모나의 ‘우리 그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