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로베르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금 푸른빛이…….”
푸른빛?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라모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각하, 지금 무슨 소리세요? 푸른빛이라뇨?”
“…….”
로베르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얼핏, 그의 얼굴에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내 평소와 같은 뻔뻔한 얼굴로 돌아왔다.
“……미안합니다.”
“예?”
“제가 발을 걸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처구니가 없던 라모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서요?”
“예.”
“각하가 무슨 기린이세요? 다리가 한 2미터는 족히 되나 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저 자식이 진짜.
‘그냥 말을 말자.’
라모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뭐, 큰소리 내서 죄송해요. 그냥 제가 발을 헛디딘 모양이에요.”
“……아닙니다.”
라모나의 사과에 로베르트는 살짝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돌연.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물벼락을 맞는다?”
하고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게 진짜 미쳤나. 라모나가 팔짱을 낀 채로 그를 바라봤다.
“……각하?”
그러나 로베르트는 굴하지 않고 또다시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아닌가? 그럼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사교계 유명 인사가 된다?”
시선은 손목에 고정된 채였다.
‘왜 저러는 거야?’
라모나는 또다시 그의 머리가 정말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저런 게 메닝엔 공작이어도 정말 괜찮을까.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이미 각하 덕분에 유명 인사가 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요.”
그때 브리튼이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각하, 들어가겠습니다.”
급하게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브리튼은 라모나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했다.
“무슨 일이지?”
로베르트의 질문에 힐끔, 라모나를 한 번 살핀 브리튼이 말했다.
“……페브룩 백작가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페브룩 백작가. 그 이름을 듣자마자 라모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요아힘 그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가 조용하더라니.’
요아힘 페브룩.
회귀 전 라모나가 요하네스와 은밀한 사이라는 소문이 돌자마자 그녀를 버리고 떠난,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약혼자였다.
물론 그 소문은 라모나의 평판을 깎아 내리기 위해 요하네스가 퍼뜨린 루머에 불과했다.
결국, 나중에 요하네스가 소문을 사실로 만들어 해명의 의미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그때의 일을 떠올린 라모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 번, 진짜 딱 한 번만 무슨 일인지 요아힘이 내게 직접 물어봤다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을 텐데.’
본인은 저택의 하녀와 놀아난 주제에. 고작 소문 가지고.
그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뭐, 이번에도 약혼을 깨자고 찾아온 거겠지.’
라모나는 확신했다.
황태자와의 스캔들에 질색하며 펄쩍 뛰던 요아힘인데 대상이 메닝엔 공작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와 자신의 약혼은 아직 유효하다며, 레이디와의 독대를 요청했습니다.”
브리튼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약혼을…… 유지?”
이럴 리가 없는데.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상황이 바뀌고 있어.’
정말, 정말로 회귀 전과는 다른 삶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생에는 정말 요하네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울컥,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에 라모나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는 사이, 로베르트는 묘한 얼굴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목에 또다시 맴돌다 사라진 푸른빛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사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이미 사교계의 가장 뜨거운 화젯거리였다.
그녀에 대해서는 여러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세상에, 글쎄 메닝엔 공작의 마음을 사기 위해 하녀복을 입고 마차로 뛰어들었대요!”
라든가.
“공작가의 안 살림을 내놓으라며 시녀장의 뺨을 다짜고짜 때렸다잖아요. 확실히 보통 성격은 아니라니까요.”
등이 있었다.
뭐,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는 했다. 라모나의 의도가 지극히 왜곡되어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라모나는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칠 만큼 사교계의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단 말이지…….’
라모나가 한숨을 삼켰다.
새로 추가된 그녀의 타이틀은 놀랍게도, ‘팜므파탈’이었다.
그래, 치명적인 매력으로 온갖 남자들을 다 후리고 다닌다는 바로 그 팜므파탈.
‘……어이없어.’
메닝엔 공작도, 요아힘 그 쓰레기도 한 번도 후리기는커녕 후리고 싶은 적도 없었다.
‘내 의사도 물어봐야지. 진짜 그놈들을 후리고 싶었냐고, 내 의사도 한번 물어봐야지!’
억울해. 머리가 다 지끈거리는 기분에 라모나가 찻잔을 쓰다듬었다.
오늘은 우아한 크림색의 섬세한 레이스 무늬가 장식된 찻잔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로베르트 메닝엔이 그녀의 전 약혼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하긴, 내 뒷조사를 했는데 요아힘의 존재를 몰랐을 리 없지.’
그런데도 저 잘난 입으로 먼저 약혼이니 뭐니 떠들고 다녔다니.
‘뒷수습은 누가 하라고?’
기가 찼다.
라모나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고 회로였다.
아무튼, 자신도 당당할 수는 없는 처지였기에 그녀는 얌전히 찻잔만 쓰다듬었다.
로베르트는 생글거리며 또 이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된 거, 아예 악녀가 되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각하…….”
“예?”
“혹시 말하기 전에 생각하셨나요?”
그녀의 질문에 로베르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라모나는 새치름한 눈으로 그를 째려봤다.
‘얄미워, 진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요하네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평화로운 삶이었다. 이런 사건 사고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런데 왜 노력하면 할수록…….’
평화로운 삶과는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들까.
‘분명히 저 남자 때문이야.’
약간 맛 간 변태. 또다시 로베르트에 대한 평가를 수정한 라모나의 눈이 흐려졌다.
이내 웃음을 그친 로베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뭐. 마음 가는 대로 해 보시죠.”
“마음 가는 대로요?”
“예. 가서 페브룩 백작 영식의 뺨을 때리든, 욕설을 퍼붓고 오든. 당신 마음대로 말입니다.”
“세상에, 잘 달래서 약혼을 파기하기도 모자랄 판에 무슨 말씀이세요.”
“왜 달랩니까?”
“예?”
라모나의 되물음에 로베르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페브룩이 알아서 기게 될 텐데 왜 달래냐 이 말입니다.”
‘……와.’
이게 바로 권력자의 마인드인가. 라모나는 감탄했다.
그러나 감탄은 감탄이고, 현실은 현실. 라모나는 침착하게 그의 말에 반박했다.
“사교계의 평판 문제를 무시할 순 없죠.”
“오, 혹시 저보다 더 좋은 신랑감을 노리시는 겁니까? 없을 텐데?”
“세상에, 저 자신감 좀 봐. 저뿐만 아니라 아직 미혼인 제 동생도 있고, 사촌 동생도 있잖아요. 게다가 아무리 그래도 도의를 먼저 저버린 건 제 쪽이니까요.”
“뭐, 어떻습니까. 권력은 이쪽이 쥐고 있는데.”
“……권력과 부로 사람을 짓누르는 건 치졸하잖아요.”
그녀의 대답에 로베르트가 피식 웃었다.
“라모나.”
그는 손깍지를 끼며 상체를 앞으로 굽혔다. 그에게서 어쩐지 태생부터 누려온 진한 권력의 냄새가 풍겼다.
로베르트는 습관처럼 야살스러운 눈웃음을 쳤다.
“때로는 치졸한 게 가장 확실한 법입니다.”
그런 그의 손목에서 잠시 푸른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 * *
아이젠부르크 자작저.
‘제발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한숨을 삼키는 라모나의 뒤에서 티아가 속삭였다.
“아가씨, 정말 괜찮으신 거죠?”
“……응.”
“그…… 메닝엔 공작님도 괜찮은 분이신 거 맞죠?”
“티아,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좋다.”
차마 긍정의 대답을 할 수 없던 라모나가 화제를 돌렸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지 티아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가씨, 제가 그리우셨군요……! 아가씨의 유일한, 오직 하나뿐인 제가…….”
“으, 으응. 그럼.”
“정말…… 후! 다시는 그러시면 안 돼요. 아셨죠?”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 티아.”
당연히 라모나도 이 난리를 두 번이나 겪을 생각은 없었다.
‘재앙의 주둥이는 한 명으로 충분해.’
……사실 그 한 명도 딱히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뭐, 아무튼 그랬다.
요아힘은 아이젠부르크 자작저에서 그녀와 독대를 요청했다.
메닝엔 공작저에서 약혼 이야기를 나누기는 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
요아힘의 성정을 떠올린 라모나가 코웃음을 쳤다.
이전부터 그랬다.
그는 라모나 앞에서 백작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나불대다가도, 미카엘라가 나타나면 입을 꾹 다물고는 했다.
굳이 비교해 보자면, 요하네스가 존재감 있는 큼지막한 폐기물 쓰레기라면 요아힘은 어디 쓸 데도 없이 길가에 굴러다니는 하찮은 쓰레기랄까.
아무튼 메닝엔 공작저는 두려워도 아이젠부르크 자작저는 괜찮다는 발상이, 딱 그다웠다.
당연히 외출은 안 된다고 막을 것 같았던 로베르트는 의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마음 편히 다녀오시죠.>
그러고는 덧붙였다.
<페브룩 영식을 죽이지만 않으면 다 수습 가능하니까요, 레이디.>
꼭 그녀가 그러길 바라는 것 같은 말이었다.
‘……아무튼, 잘 이야기해서 돌려보내자.’
어쨌든 현재 상황을 보면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 게 명백했으니까.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애써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이야, 요아…….”
그러나.
촥!
그는 다짜고짜 라모나에게 물을 끼얹었다.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은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그녀의 손목에서, 아주 가느다랗고 푸른빛이 반짝였다.
‘이게 진짜…….’
빛이 반짝이기 무섭게 그녀의 손이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손은.
짝!
요아힘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메닝엔 공작을 유혹한 팜므파탈에서, 약혼자의 뺨을 후려친 악녀로. 라모나가 사교계 최고의 유명 인사가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