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 시각, 클라이스트 백작가.
똑똑.
“에드윈, 들어간다.”
도도한 인상의 레이디 클라이스트, 로지나가 그녀의 오라버니 에드윈의 방문을 두드렸다.
“어떻게 된 거야?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공작가 시녀장의 뺨을 때렸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녀와 똑 닮은 날카로운 눈매의 붉은 머리, 에드윈이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태평한 그의 태도에 로지나가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
“이야기가 다르잖아. 작업 상대는 바텐베르크 아니었어? 왜 갑자기 아이젠부르크랑 약혼을 해?”
“아니, 나도 이야기 들은 게 없다니까?”
“네가 모르면 어떡해, 네가 전해 준 이야기 듣고 시작한 작업인데.”
로지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의자에 앉았다.
지난번 로베르트의 명을 받고 한참 레이디 바텐베르크의 자존심을 살살 긁고 있던 찰나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의 약혼 소식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게다가 상대는 무려 벤트하임의 시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였다.
‘하아, 보상이 쏠쏠하기에 엄청 신경 쓰고 있었는데.’
로지나가 혀를 찼다.
“기껏 밑밥 다 깔아 놨더니 약혼 이야기가 돌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심지어 황녀 전하는 쓰러지셨다며?”
“나도 놀랐어.”
“……야.”
에드윈의 무책임한 대답에 로지나가 인상을 썼다.
“모른다, 놀랐다만 하지 말고 빨리 공작가라도 다녀와. 그래야 나도 다음 계획을 세우든가 하지.”
“안 그래도 한번 공작저를 방문하라고 서신이 왔어. 아, 그런데 각하께서 뭐 하나 물어보던데.”
“뭘?”
“괜찮은 디자이너 한 명 추천해 달래. 요즘 가장 잘나가는 디자이너로.”
뭐야, 별거 아니네. 잘 다듬어진 손톱을 내려다보며 로지나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해 줘.”
“아니, 나 말고 네가.”
“……남성복을 왜 내가?”
로지나의 되물음에 에드윈이 빙긋 웃었다.
“사랑하는 내 동생, 로지나.”
사랑 같은 소리 하네. 로지나가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에드윈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남성복이 아니니까 너한테 추천을 부탁하는 거란다.”
“……뭐?”
“여성복, 정확히 말하자면 연회용 드레스를 하나 맞춰야겠다고 하시네, 우리 잘난 공작님이.”
에드윈이 다시 빙긋 웃었다.
황당함에 로지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공작님이 사교 시즌에 여장한대?”
“그거참 재밌긴 하겠지만, 설마.”
“그럼…… 아이젠부르크?”
“빙고.”
워후, 로지나가 휘파람을 불었다.
‘정말 사랑에라도 빠진 건가?’
그 자기애 덩어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재밌는 일이 생겼나 본데.”
“그 점에는 나도 공감이란다. 사랑하는 내 동생.”
“그러시군요, 사랑하지 않는 제 오라버니.”
흐음, 로지나가 생각에 빠진 듯 턱을 괴었다.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붉은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물결쳤다.
이내 그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나도 한번 만나 봐야겠는데?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로지나의 말에 에드윈이 여유롭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오래간만에 멍청한 내 동생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군.”
“닥쳐, 에드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더 심한 말 안 한 걸 다행으로 여겨라.”
수상한 냄새를 맡은 클라이스트 남매의 눈이 반짝 빛났다.
* * *
한편 그 시각, 메닝엔 공작저.
“흐음…….”
로베르트는 집무실에서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주얼리숍에서 느꼈던 묘한 위화감이 영 찝찝한 탓이었다.
그는 천천히 처음부터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시작은 그 여자였다.
등장부터 말이 안 됐던 여자.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요란 법석하게 그의 인생에 끼어든 것 치고 그녀와의 협상은 제법 순조롭게 진행됐다.
아니, 순조로운 수준이 아니었다. 그의 뜻대로 일이 알아서 척척 움직이는 수준이었달까.
미카엘라 벤트하임부터 아이젠부르크 자작까지. 일이 쉬워도 너무 쉬웠다.
물론 일이 순조로운 것은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었다.
사고라는 것은 항상 이럴 때 벌어지기 마련이었으니까.
로베르트가 습관처럼 눈썹을 꿈틀했다.
‘슬슬 그 증거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 때인가.’
그와 3황자 베르나딘은 오랜 친구였다.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 만큼.
그렇기에 로베르트는 베르나딘이 황태자 자리를 노리려 하는 것을 알면서도 섣불리 그를 지지하지 못했다.
‘베르나딘은 너무 물러.’
목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요하네스와 달리, 베르나딘은 타고난 성정이 유약했다.
어설픈 각오로 요하네스와 대적하다가는 개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꼭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로베르트는 그렇기에 베르나딘의 뜻을 모른 척했다. 부모에 이어 친구까지 잃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로베르트. 네 부모님의 일 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친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로베르트만이 아니었다.
베르나딘은 로베르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폐하께서 숨기신 증거를 내가 기필코 찾아 주마. 부디 나를 도와다오.>
그는 로베르트가 그렇게 애타게 찾아 헤매던 것을 협상의 대가로 내밀었다.
로베르트는 결국 베르나딘의 손을 내치지 못했다.
오랜 친구가 아니라, 가문의 원수를 노리는 메닝엔 공작으로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뜬금없이 웬 여자가 그 대가를 자신이 주겠다며 나타났다.
힘도 없는 일개 자작가의 여식이 겁도 없이 그런 말을 하는데, 그게 오히려 3황자인 베르나딘보다 믿음직스러워 보였다면 우스운 일일까.
덕분에 저답지 않게 굴었다.
그쪽에서 하녀복이니 뭐니 일을 벌이며 미쳐 날뛰는데, 이쪽에서 응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재밌으니까.’
질색하는 라모나의 얼굴을 떠올린 그가 저도 모르게 피식, 작은 웃음을 흘렸다.
지금쯤 혼전 계약서 이야기도 ‘그 사람’의 귀에 들어갔을 터.
로베르트는 이제 라모나 아이젠부르크와 진짜 협상을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그녀가 증거의 행방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요하네스에 대한 증오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의미심장한 표정의 로베르트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쭉 뻗은 팔을 따라 넓은 어깨가 보기 좋게 벌어졌다.
근육이 풀리는 느낌이 개운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마음은 결린 어깨처럼 껄끄러웠다.
“……뭔가 아쉽네.”
정확히 콕 집어서 뭐가 아쉽다고 말하기에는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이 묵직하니 영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이전처럼 그녀를 놀리며 파르르 떠는 것을 구경할 수 없다던가.
아니면, ……그때 못 한 입맞춤이 아쉽다거나?
그 생각을 하자마자 갑자기 눈앞에 붉은 입술이 아른거렸다.
입술뿐만이 아니었다. 술기운에 장밋빛으로 달아오른 두 뺨, 그리고 목덜미에서 훅 풍겨 오던 향기가 마치…….
‘이런 미친.’
로베르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달아올랐다. 달아오른 것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귀가 벌게진 로베르트가 연신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해요! 하자고요!>
그날 이후로 그 말이 자꾸만 귀에서 맴돌았다. 식사를 하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잠이 들기 직전에도.
하기는 뭘 한다고. 그가 하소연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왜 그런 말을 해서 남을 기대하게 만들어.”
괜한 심술이 덕지덕지 올라온 로베르트가 털썩 소파에 드러누웠다.
똑똑.
마침 들려온 노크 소리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브리튼? 급한 일인가?”
“아니요, 각하. 저예요.”
라모나의 목소리였다.
‘젠장, 왜 하필 지금.’
자기 욕하는 줄은 또 어떻게 알고. 한숨을 삼킨 로베르트가 애써 착한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다.
* * *
“……무슨 일입니까.”
“각하? 안색이 조금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너무 건강한 게 문제이니 걱정하지 마시죠.”
‘너무 건강하다니? 뭔 소리야?’
보나 마나 헛소리겠지. 라모나가 대수롭지 않게 그의 말을 흘려보냈다.
기껏 엘츠 자작의 이야기를 해 주러 왔더니, 반응이 영 아니꼬웠다.
그가 은근 슬쩍 시선을 피하는 것 또한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네, 각하께서 어련히 알아서 건강을 잘 챙기실 텐데 제가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렸네요.”
“알면 됐습니다.”
……이게 진짜.
가뜩이나 회귀 전의 일을 떠올린 탓에 그에 대한 평가가 박해진 찰나였다.
라모나가 새침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어쩐지 벌게진 얼굴로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긴 로베르트가 물었다.
“그래서 어쩐 일입니까.”
“엘츠 자작의 일을 이야기하러 왔는데……. 뭐, 바쁘시면 다음에 이야기할까요?”
“좋습니다. 다음에 이야기하죠.”
왠지 정신없어 보이는 얼굴로 로베르트가 말했다.
라모나는 혀를 찼다.
‘하? 저 자의식 과잉 또라이가?’
황태자의 스파이가 누군지 떠먹여 주겠다는데도 거절하는 것을 보라. 정말이지 명치를 주먹으로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됐어, 그럼 듣지 말든가.’
그게 다 누구 손해인데. 욱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그럼 가 볼게요.”
“……잠깐, 잠깐만. 라모나 내가 방금은 말실수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로베르트가 그녀를 붙잡았지만 라모나는 못 들은 척 문을 열고 나섰다.
그때였다.
“아니, 잠깐만. 라모나. 가지 말고…….”
그의 말과 동시에, 콰당.
“꺅!”
무언가가 발을 잡아당기며 라모나는 뒤로 넘어졌다.
기가 막히게 넘어진 탓에 그녀의 몸이 집무실 안으로 쏙 들어왔다. 다행히 푹신한 카펫 위였던 지라 다치지는 않았다.
‘아니, 말로 하면 되지. 지가 가라 해 놓고 왜 발을 걸어!’
재앙의 주둥이, 정신머리 없는 또라이, 변태. 분노한 라모나가 속으로 온갖 욕을 중얼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각하? 지금 뭐 하시는…….”
그러나 로베르트 메닝엔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상태로 발을 걸려면 다리가 2미터는 넘어야 할 것 같은 거리였다.
‘……뭐지?’
당황한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라모나 못지않게 눈이 휘둥그레진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라모나, 지금…….”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로, 자신의 손목을 멍청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믿을 수 없는 것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