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22화 (23/151)

#22화

그날 저녁, 황궁.

만찬을 함께 들자는 요하네스의 초대에 미카엘라는 굳은 얼굴로 입궁했다.

평소라면 턱을 당당하게 치켜들고 우아하게 황태자궁을 누볐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요하네스가 라모나의 일로 그녀를 부르는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정말.’

고작 라모나, 그 계집애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입술을 깨문 미카엘라가 걸음을 재촉했다.

황태자의 궁, 다이닝룸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레이디 벤트하임. 어찌하여 그리 무거운 인사를 건네는 거야.”

요하네스가 생긋 웃었다.

“그대에게 기대한 것이 그런 인사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 텐데?”

그러나 자비로운 얼굴과 달리 말 속에 담긴 질책은 날카로웠다.

요하네스는 미카엘라를 훑어보며 데미안의 보고를 떠올렸다.

<……혹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그녀의 명을 받은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

명령을 내렸다? 확실히 이 욕심 많은 여자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메닝엔 공작과 갑자기 사랑에 빠졌다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건방지게.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벤트하임의 기고만장한 머리를 좀 눌러 줄 때가 된 모양이었다.

“쯧.”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로 혀를 차자 미카엘라가 움찔 몸을 떨었다.

“레이디 벤트하임.”

“……예, 전하.”

“내 그대에게 그리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데 말이지.”

그리 말하는 그의 얼굴은 정말이지 천사와 같았다.

싱긋 웃은 요하네스가 붉은 장미꽃을 한 송이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벤트하임과의 협약의 증표, 거기다 별거 아닌 가신 가문의 여식 하나. 고작 이 두 가지면 제국의 황후 자리를 거머쥘 수 있는데…….”

투둑, 그의 손에 의해 장미꽃이 꺾였다.

“왜 그대가 이리 바보같이 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요하네스는 유심히 미카엘라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그녀를 뜯어보던 그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화장법을 바꾼 모양이로군.”

갑자기 웬 화장법? 당황한 미카엘라가 말을 더듬었다.

“예, 예?”

“흐음, 설마 아이젠부르크를 질투라도 한 건가?”

놀란 미카엘라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전하! 오해세요. 그건 제가 한 일이 아니라 정말 메닝엔 공작이…….”

“그럼 행동으로 보여 주게.”

요하네스는 가볍게 미카엘라의 말을 무시했다.

이윽고 황태자궁의 사용인들이 식기를 나르기 시작했다.

할 이야기는 다 끝났나 싶었던 미카엘라가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황궁의 사용인이 말했다.

“전하, 레이디 바텐베르크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미카엘라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응? 멜리사가?’

자신과의 요하네스의 식사 자리에 왜 멜리사가 온단 말인가.

당황한 그녀가 요하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미안하네. 내, 레이디 바텐베르크와 저녁 약속이 있는 것을 깜빡했군.”

“……예?”

“그대는 이만 돌아가게.”

요하네스는 더 설명할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내 명을 완수할 때까지…… 감히 그 어느 곳에서도 황태자비 자리를 입에 올리지 말도록.”

이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까딱하면 벤트하임을 내치겠다는 협박.

미카엘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

마침 다이닝룸에 들어오던 레이디 바텐베르크, 멜리사가 그런 그녀를 보고 작게 웃었다.

“풉.”

그녀가 빈정거리듯 덧붙였다.

“레이디 벤트하임이 이미 황태자비 전하가 된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에요. 황태자궁의 식탁에 자리 하나 없는 걸 보면.”

“…….”

“흐으음, 대답이 없는 걸 보면 없는 건 자리가 아니라 입인가?”

비꼬는 멜리사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

미카엘라는 모멸감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황태자궁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는 하녀를 불러 속삭였다.

“당장 페브룩 백작가로 연락을 넣어.”

라모나,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도 다 생각이 있어.

까드득, 미카엘라가 이를 악물었다.

* * *

털썩.

메닝엔 공작저로 돌아온 라모나는 오늘도 쓰러지듯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상하게 지치는 하루였다.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메닝엔 공작저에 첫발을 내디딘 그날부터 매일매일 지치는 나날이긴 했다.

‘……내 인생 왜 이렇게 꼬였지.’

라모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로베르트 메닝엔.

자칭 제국 최고의 신랑감과 함께 있다 보면 하루가 엉망진창으로 흘러갔다.

도대체 왜, 세간에 그 이야기가 떠돌지 않은 것일까.

젊고 매력적이라 소문난 메닝엔 공작이 사실은 제 잘난 것을 아주 잘 알고,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며, 어디서 이상한 통속 소설이라도 읽은 듯 거지 같은 사랑의 말을 속삭이는 이라는 사실이.

도대체 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보좌관들이 참 유능한 모양이네.”

저 지옥 같은 입을 틀어막으려고 고생 꽤 했을 로베르트의 보좌관들을 위해,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애도를 표했다.

갑자기 질리도록 들었던 로베르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오 라모나. 나의 천사, 나의 사랑.>

“……맙소사.”

소름 끼치는 기분에 라모나는 귀를 막았다.

그러고 보니 이 침대 또한 그와 함께 누워 있었던 침대였다.

그것도 무려 상체를 탈의한 그 로베르트 메닝엔과.

그러니까, 잘 다듬어진 조각 같은 등 근육을 내보인 로베르트 메닝엔과.

“꺄아아악!”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라모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겁하며 황급히 팔을 문지른 그녀는 결국,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털썩.

라모나는 습관처럼 무릎을 끌어안고 쪼그려 앉았다. 그를 상상하기만 해도 진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이상한데.’

회귀 전, 요하네스의 집요한 학대 이후로 그녀는 남자와 맨살이 닿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특히나 누군가 강압적으로 누르거나, 로베르트가 아침에 그랬듯 신체를 꽉 잡는 것은 그녀의 트라우마를 건드는 일이었다.

지난번 시녀장의 뺨을 때린 것도 그래서 생긴 일이었다.

‘물론 시녀장은 여자고, 뺨을 때리려고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왜 오늘 아침에는 괜찮았을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왜 하필 로베르트 메닝엔은 괜찮았을까.

‘이유가 뭐지?’

라모나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시간을 되돌아와서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그 이외에 다른 남자도 괜찮아야 할 텐데, 다른 이와 맨살이 닿는 것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쫙 돋았다.

오직 한 사람.

로베르트 메닝엔만 괜찮은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녀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설마…… 그건가?”

말도 안 돼. 충격에 빠진 그녀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말솜씨가 끔찍해서 남자로도 안 보이는…… 그런…… 거?”

어쩌면 좋지, 그래도 약혼자인데. 라모나는 울상이 되었다.

‘아니야, 침착하자. 라모나. 어찌 보면 다행일 수도 있지.’

앞으로 3개월간 공식석상에서 그와 이런저런 연기를 해야 할 텐데, 그때마다 맨살이 닿았다며 그를 후려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자신에게 등짝을 한 대 얻어맞고, ‘오늘도 짜릿하군요. 나의 천사.’라고 말하는 로베르트를 상상하니 당장이라도 이불을 뻥뻥 걷어차고 싶었다.

‘그래, 저 재앙의 주둥이가 도움이 될 때도 있네.’

간신히 진정한 그녀가 팔짱을 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휴.”

사실 회귀 전과 달라진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메닝엔 공작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라. 지난 생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정말 그 일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라모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로베르트에게 협상의 대가로 제안했던 그 증거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 여자가 잘 간직하고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로베르트의 부모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떠올린 라모나가 한숨을 삼켰다.

이미 바뀌어 버린 현실처럼 미래도 바뀐 것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일까.

한 번 확인해 볼 방법이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 제법 큰 스캔들이 하나 있었지.’

바텐베르크 후작가와 클라이스트 백작가가 얽힌, 사교계가 발칵 뒤집힐 만한 스캔들이었다.

시작은 사실 별거 아니었다.

그저 남자 하나를 두고 두 명의 레이디가 벌인 사소한 경쟁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가 그녀들을 부추기는 통에 경쟁은 점점 과해졌고, 그 과정에서 레이디 바텐베르크가 치명적인 거짓말로 상대를 모함하고 말았다.

<레이디 클라이스트는 숨겨 둔 애가 있다면서요?>

클라이스트 백작가는 펄쩍 뛰며 훼손된 딸의 명예에 분노했다.

결국 거짓말이 들통난 레이디 바텐베르크는 사교계에서 제명되어 황태자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정작 그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여자랑 약혼을 발표했었지.’

라모나가 혀를 찼다.

“쯧, 하여간 꼭 그렇게 여자 문제를 몰고 다니는 작자들이 있다니까.”

하여간 쓰레기가 세상에 너무 많아. 라모나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래서 그 남자가 누구였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싸움을 부추긴 남자가 제일 나쁜 놈인데. 그놈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왠지 잘생기기는 했는데, 잘난 척이 엄청 심했던 것 같은……데?’

잘생겨? 잘난 척? 또다시 벼락같은 깨달음이 라모나를 찾아왔다.

“세상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스캔들의 남자 주인공은…… 바로, 그 잘나디잘난 메닝엔 공작.

로베르트 메닝엔이었다.

“허, 허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친 라모나가 중얼거렸다.

“이…… 미친 새…… 가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닌 거야……?”

또다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로베르트 메닝엔.

그냥 좀 잘생기고 자존감 넘치는 변태 정도로만 남아 주면 안 되겠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