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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21화 (22/151)

#21화

그날 저녁, 하늘색 모자를 눌러 쓴 라모나가 로베르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바쁘시다더니 어떻게 시간이 나신 모양이네요?”

너 바쁘다고 입 털더니 별거 아니었구나? 라모나의 도발에 로베르트는 질세라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연인과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니까요, 나의 천사.”

어쩐지 천사라는 단어의 발음이 유독 셌다.

라모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말은 저렇게 해도 분명 자신을 믿지 못해서 따라온 것이리라.

약혼이니 뭐니, 저 잘난 입으로 정신없이 떠들어 대긴 했지만 확실히 그들 사이는 신뢰를 논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으니까.

이제 말싸움하기도 귀찮다. 그녀는 대충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세상에, 저는 호위 정도면 충분했는데……. 공작님의 마음에 큰 감명을 받았답니다.”

당연히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로베르트의 얼굴에 곤란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내 그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물론 ‘그 일’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친절하게도 굳이 한 번 더 허리를 숙여 라모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 제가 레이디를 마음에 품었다거나, 잘 보이기 위해 이러는 것이라는 오해는 하지 마시길.”

‘……아, 진짜.’

저 재앙의 주둥이.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네에, 네. 걱정에 감사해요.”

‘공작님이 입을 틀어막지 않는 이상, 저도 반할 일은 없을 거거든요.’

속마음을 감추며 그녀가 생긋 웃어 보였다.

로베르트는 질 수 없다는 듯 눈썹을 까딱해 보였다.

파지직.

또다시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다행히 멀리서 보기에는 다정한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이내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물었다.

“따로 봐 두신 곳은 있으신가요?”

“엘츠 자작가의 상단에서 운영하는 주얼리숍이 있습니다. 레이디께서만 괜찮으시다면 그리 가 볼까 합니다.”

“좋아요.”

라모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잠깐, 엘츠 자작?’

엘츠 자작. 그가 바로 그녀가 내기에 걸었던 요하네스의 스파이였다.

엘츠 자작가는 메닝엔의 가신 가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자작은 몰래 요하네스와 내통하며 메닝엔의 정보를 몰래 내어 주고 있었다.

요즘에 이르러서는 가신이라는 관계가 많이 희미해지기는 했다.

돈으로 신분도 사는 세상이었으니까.

그러나 정보를 캐다 나른 건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 않은가.

곤란한데. 라모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로베르트는 엘츠 상단의 주얼리숍까지 라모나를 에스코트했다.

“들어가시죠.”

‘으음, 어쩌지.’

엘츠 자작의 배를 불리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그 돈은 요하네스에게로 들어갈 테니까.

하지만 어디에 요하네스의 귀가 있을지 모르는 이 상황에 엘츠 자작이 스파이다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치겠네.’

고민에 빠진 라모나는 대충 아무 곳이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로베르트에게 귓속말을 했다.

“각하, 사실 저기, 저곳을 한번 가 보고 싶은데요?”

“메종 마뜨리모 말입니까?”

메종 마뜨리모?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이름이었다.

불길하게도 로베르트의 얼굴에 잘생긴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지만, 라모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아하, 저곳이 그리 가 보고 싶으셨군요.”

“네, 주변에서 평이 좋더라…….”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라모나는 간판을 발견한 순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뿐인 품격 있는 웨딩을 위하여, 메종 마뜨리모>

‘젠장.’

화난다. 정말. 화가 나.

“……고요.”

옆에서 로베르트가 피식거리며 웃는 것이 느껴졌다.

“뭐, 소문 퍼뜨리기에도 딱 좋겠군요. 가시죠.”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은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리 결혼을 서두르실 줄이야.”

라모나는 이를 악물며 그의 말을 애써 못 들은 척하며 메종 마뜨리모로 들어섰다.

* * *

메종 마뜨리모.

찬찬히 보석을 훑어보던 라모나의 눈에 흥미가 어렸다.

‘흐음, 생각보다 예쁜 게 많네?’

열여덟 살. 회귀 전, 이 나이의 라모나는 미카엘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항상 그녀의 것보다 못한 보석만 착용했었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가지고 있는 보석들이 영 성에 안 차던 터였다.

‘무려 그 잘난 메닝엔 공작의 목숨값인데, 괜찮은 거로 골라도 되겠지.’

라모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열심히 진열장을 훑어보던 그녀의 어깨에 갑자기 로베르트가 다정히 손을 얹었다.

‘……설마?’

불길한 예감에 라모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안타깝게도 불길한 예감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라모나.”

‘그건가…… 나의 사랑, 나의 천사.’

“나의 사랑, 나의 천사.”

그럼 그렇지. 점원들의 시선이 있었기에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하, 하하. 무슨 일인가요.”

“혹시 마음에 드는 게 없는 건가?”

그의 눈에서는 오늘도 거짓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 저 자식 일부러 저러는 거지? 라모나는 욕설을 뱉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참자. 조금만 참자.’

그러나 의지와 달리 입은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기만 했다.

“하, 하. 공작님. 아, 아니 로베르트.”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그게 약간 애매한 감이 있어서.”

그녀의 한마디에 직원이 가장 상등품이 담긴 상자를 재빨리 꺼내 왔다.

달칵.

남색 벨벳으로 곱게 싸인 상자를 직원에게서 건네받은 주인이 호들갑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레이디, 저희가 어렵게 들여온 원석인데요. 원하시는 대로 뭐든 세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주인은 열심히 현미경으로 라모나에게 원석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여기 이 다이아몬드는 독특하게 에메랄드 컷이 되어있습니다. 이런 직각은 아무래도 세련된 멋이 있지요. 아니면 이런 쿠션 컷은 어떠십니까?”

희귀한 핑크 다이아몬드부터 큼직한 사파이어까지. 하나같이 괜찮은 물건들이었다.

라모나는 힐끔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과연 메닝엔 공작의 목숨값은 얼마나 될까?’

저 잘나디잘난 자칭 제국 최고의 신랑감의 몸값이라.

흐으음.

고민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로베르트.”

“무슨 일이지, 나의 사랑.”

“결정했어요.”

그녀가 우아하게 손을 뻗어 맨 앞에 놓인 핑크 다이아몬드를 가리켰다.

그녀의 뜻을 짐작한 로베르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라모나, 그것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은 전부 사도…….”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모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부터.”

그녀의 손가락이 아주 우아하게 영롱한 보석이 가득한 상자를 훑었다.

“여기까지.”

“헉.”

예상치 못한 상황에 주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라모나가 시선을 돌려 로베르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전부, 전부 가지고 싶어요. 내 사랑.”

감격스럽게도 드디어 라모나는 삐걱거리지 않고 그를 ‘내 사랑’이라 말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로베르트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

물론 보석 때문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전부’라는 그녀의 말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 탓이었다.

<그럼 당신도 뭐든 지 다 가질 수 있어, 원하는 것은 전부.>

분명 자신이 어제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아니, 요즘 그런 일이 자주 있었던 것 같다. 유독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듯한, 그런 일이.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뭐, 기분 탓이겠지. 로베르트는 매끄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물론.”

그는 세상에 둘도 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모두 가져야지.”

아, 물론 그 호칭도 빼먹지 않았다.

“나의 천사.”

그 한마디에 결국 라모나의 미간이 구겨졌다.

‘표정 못 숨기긴.’

그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위화감을 느낀 그 즉시, 자각하지도 못한 채 붕붕 떠 있던 마음이 갑자기 뚝 떨어져 제자리를 되찾았다.

드디어 어제 마신 술이라도, 아니 무슨 마법이라도 깬 것처럼.

* * *

딸랑.

숍의 문을 열고 나선 라모나가 즐겁다는 듯 활짝 웃었다.

보아하니 이번에는 연기하는 것이 아닌, 정말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분명했다.

“역시 메닝엔 공작 각하라 그런지, 목숨값이 제법 쏠쏠하네요.”

로베르트는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 순간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차 뒤편에서 수상한 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유해한 변태 자식이 사람을 붙인 모양이군.’

가라앉은 기분이 한층 더 불쾌해졌다.

하여간 하는 짓이 음험하기 짝이 없지. 쯧, 그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라모나가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왜 가만히 있어요? 더 불안하게?”

그는 사람이 붙은 것 같다는 사실을 라모나에게 알려 주기 위해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러나.

<그 새끼가…… 부모님을, 흡, 부모님을 걸고…… 레이먼도 멀리…….>

갑자기 어젯밤에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굳이 겁줄 필요는 없겠지.’

그래, 뭐, 굳이. 그는 미행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싱긋 웃으며 그녀를 약 올리기 시작했다.

“이유가 궁금합니까? 내 사랑?”

내 사랑이란 말에 라모나가 또다시 질색했다. 황급히 그의 품에 붙어 얼굴을 숨긴 그녀가 소곤거렸다.

“아니, 이제 보는 사람도 없는데 적당히 하세요.”

“보는 사람이 왜 없습니까? 이렇게 천지에 사람이 널렸는데.”

“아니면 멘트라도 조금 바꿔 보세요. 나의 천사라니. 세상에, 진부하기도 해라.”

그녀의 나무람에 로베르트가 눈썹을 까딱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목소리를 더 키웠다.

“대체 세상의 그 어떤 말로 당신의 아름다움을 묘사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

“……적당히 좀 하라니까요.”

“아름다움의 현신? 미의 결정체? 제국의 보물?”

“미쳤어요, 진짜?”

느끼한 미사여구의 향연에 질색한 그녀가 찰싹, 그의 등을 때렸다.

“윽.”

등짝을 때리는 손이 제법 매서웠다.

그런데 왜일까. 울상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이쪽이 더 나은 까닭은.

‘기분 탓이겠지.’

또다시 가슴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정말 술이 덜 깨기라도 한 것처럼.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푸른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과장되게 코를 찡긋하며 말했다.

“오, 라모나. 당신의 손길이 너무 짜릿해.”

라모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떡해. 진짜 변태였나 봐.”

아, 이거 정말.

‘미치도록 재밌네.’

로베르트가 애써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괜히 찝찝해졌던 기분이 순식간에 기분 좋게 떠올랐다.

‘그래, 나도 뭐 평소 같지 않은 짓을 좀 할 수도 있지.’

그는 그렇게 조금 전에 느꼈던 묘한 위화감을 털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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